[종교칼럼] 따뜻한 종교 이야기?

입력 2019-03-06 11:18:34 수정 2019-03-06 19:10:20

각정스님 청련암 암주

각정스님 청련암 암주
각정스님 청련암 암주

아침에 공양을 마치고 암자에 오면 대문을 열어놓는다. 새싹을 틔우기 위해서 나뭇가지에 물이 통통하게 오르고 바람에 묻어오는 온기는 봄기운을 완연하게 느끼게 한다. 얼었던 땅이 녹고 부풀어 오른 틈새로 녹색의 생명을 본다. 땅으로부터 봄이 시작되는 것이다.

쫑긋 솟아오른 수선화는 봄이 오는 게 궁금한지 땅 위로 초록색 촉수를 안테나처럼 밀어 올린다. 땅에 낮게 붙어서 피는 작은 풀꽃들의 활동이 먼저 시작되었다. 나뭇가지들은 새잎이 아직 돋지 않아 겨울잠이 든 것처럼 보이지만 땅속 뿌리들은 이미 깨어서 가지 끝으로 물을 밀어 올리고 있었다.

3월의 봄은 대지로 허리를 낮추고 보는 사람에게 먼저 보인다. 그래서 '밀라레파'는 가장 낮은 곳을 차지하면 높은 곳에 이르게 된다고 한다.

3월의 숲은 갈색의 수묵화 같다. 천천히 조심스럽게 들어가면 이미 초록색으로 바림질하며 아주 작고 귀여운 봄꽃들이 숲 바닥을 바느질하듯 수(繡)를 놓고 있었다. 특히 복수초가 곳곳에 피어서 숲을 장엄하게 했다. 아직 키 큰 나무들은 잎이 나지 않아서 숲의 지붕은 열려 있었다. 그 사이로 쏟아지는 햇빛은 바닥까지 내려간다. 식물학자들은 이 순간을 '기회의 창'이 열리는 시간이라고 한다. 작은 풀꽃들은 이때를 놓치지 않는다.

이 시간의 봄은 낮은 데서 피며 꿈틀대는 이끼와 제비꽃처럼 눈에 잘 띄지도 않고 화려하지도 않다. 정신을 바짝 차리고 보지 않으면 그냥 밍밍하게 후르륵 지나가 버리고 마는 것이다.

3월이 지나면 새잎과 꽃잎이 앞다투어 피어나고 그 양도 많아지고 종류도 다양해져서 그만 봄 속에 갇히게 된다. 자연은 종교다. 3월의 숲은 황량하지만, 자세히 보면 구석구석에서 봄이 오고 볼을 스치는 바람에 음악이 있었다.

가객 강권순이 부르는 정가(正歌) '산천초목'을 들으면 신비롭다. 정좌하고 무릎에 손을 얹고 허공을 바라본다. 소나무에 부는 바람처럼 읊조리는 가곡은 남자의 소리도 좋지만, 공기를 안고 나비처럼 솟아오른다. 소리의 너비와 마음의 평화가 우리의 서정을 극점으로 끌어올린다. '루미'는 음악과 시는 신에게 가는 지름길이라고 한다. 따뜻한 종교는 친절한 마음이다. 거기에 자비와 지혜가 있어야 한다. 종교를 가진 사람은 없는 사람보다 훨씬 행복하다.

물론 무종교인도 있지만 연민이 있으면 다행이다. 믿음에는 건강한 믿음과 불신도 있다. 바른 믿음은 자신과 남을 지키며 자신과 남을 해치는 일을 하지 않는다.

우리나라 불자들이 불교를 어려워할 때 서구의 일반인들은 행복과 성공을 부처님 말씀에서 발견하고 있다. 다종교 사회에서는 종교 간 이동이 빈번하기도 하지만 그들은 해탈, 열반이라는 목표 이전에 내 삶을 더 풍요롭게 할 수 있는 대안을 불교에서 발견했다.

부처님 말씀은 대체로 쉽고 선문답은 어렵다. 가장 쉬운 게 가장 어려운 것이다. 자비심이 없는 지식은 마른 지혜이다. 가짜 뉴스가 가짜 부처님을 만든다. 티베트 속담에 "만약 두 철학자의 의견이 일치한다면 둘 중 하나는 철학자가 아니다"라고 한다. 지금은 봄이다. 봄은 어디서 오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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