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세운동의 현장, 지금은] 기억하는 이 없는 개령면 만세운동

입력 2019-03-11 13:33:58

1919년 3월 24일 주민 수 백여 명이 모여 대한독립만세을 외쳤던 개령초등학교 전경. 신현일 기자
1919년 3월 24일 주민 수 백여 명이 모여 대한독립만세을 외쳤던 개령초등학교 전경. 신현일 기자

1919년 김천시 개령면에서는 모두 4차례에 걸쳐 만세운동이 일어났다.

김천시가 발행한 '김천시항일운동사'에는 '1919년 3월 24일 개령보통학교(현 개령초등학교) 졸업식과 함께 열린 학부모 은창서 집안의 혼인 잔치에 모인 사람들이 만세운동을 펼쳤다'고 돼 있다.

기록에 따르면 당시 결혼식 피로연을 진행하던 김태연 등은 "전국적으로 독립운동이 일어나고 있는데 김천지역만 만세운동이 없는 것은 수치"라며 이날 오후 4시쯤 주민 수백여 명과 함께 만세 행진에 나섰다.

일제에 의해 주민들이 해산되고 주동자가 체포됐지만 만세운동은 이어졌다. 같은해 4월 3일 개령면 동부동 주민 문정환이 동료들과 마을 뒷산인 감문산에 올라 만세를 불렀으며, 4일에도 같은 장소에서 주민들이 만세를 불렀다.

또 6일에는 개령면 동부동에 거주하는 머슴들이 횟불을 들고 감문산에 올라 만세를 외치다가 9명이 일본 경찰에 붙잡혀 옥고를 치렀다.

앞서 김천의 만세운동은 3월 20일 밤 기독교와 천주교 신자들이 시내 곳곳을 돌며 만세운동을 벌인 것이 시초였다. 당시 헌병과 경찰의 삼엄한 경계망 탓에 신도들은 산발적으로 자정까지 시내 곳곳에서 만세를 불렀다.

현재 만세운동이 벌어졌던 개령면 현장에는 당시를 기억하는 이도, 그 흔적도 찾아볼 수 없었다. 아쉽게도 이날을 기념하는 행사도 치러지지 않고 있다.

만세운동 당시 주민들이 모였던 개령초등학교에도 만세운동과 관련한 자료들은 남아 있지 않았다. 개령면사무소도 마찬가지였다. 당시 기록이나 만세운동을 기억하는 주민을 찾아 봤으나 100년이 지난 지금, 그날의 뜨거웠던 만세운동 열기를 기억하는 주민은 없었다.

이는 전국적으로 만세운동이 일어났던 지역 주민들이 자부심을 갖고 그날을 기념하고 있는 것과는 대조적이다.

김천과 인접한 구미시는 진평동 만세운동 장소에 기념비를 세우고 매년 '구미 인동 3.1문화제'를 열어 만세운동을 기념하고 있다. 칠곡군도 석적읍 장곡리에서 열린 만세운동을 기념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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