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동진 경북대학교 사회학과 교수
지난 3·1절에는 3·1운동 100주년을 기념하는 행사가 전국적으로 개최돼 100년 전 전국 방방곡곡에서 일어났던 3·1운동을 기억하였다. 3·1운동은 한국과 해외에 사는 조선인들이 함께 참가한 '거족적인' 운동이었다.
이것이 가능했던 것은 종교나 학교와 같은 사회조직이 존재하고, 교통과 통신이 발달하고, 이동성이 급격하게 증가했기 때문이었다. 도시를 중심으로 하는 해외와 국내의 사회조직을 거점으로 해서 해외 소식이 빠르게 국내에 전해지고, 서울 소식이 빠르게 지방에 전해질 수 있었다.
그 결과로 해외와 국내 각지의 운동이 서로 이어질 수 있었다. 3․1운동의 중요한 의의는 우리 민족이 비로소 지방시간, 국가시간, 세계시간의 동시성을 경험한 것이었다.
3·1운동이 세계시간 속에 있었음은 나중에 인도의 초대 수상이 된 네루가 감옥에서 또한 나중에 인도의 수상이 되는 딸에게 보낸 편지글인 '세계사 편력'에서 3·1운동에 참가한 한국 여학생들을 언급한 데서도 알 수 있다. 3·1운동이 세계시간의 일부를 이루는 세계적인 운동이었다는 것은 1920년 4월 1일 동아일보 창간호에서 1919년 1월에 시작된 아일랜드 독립전쟁을 특집 기사로 채택했던 데서도 확인할 수 있다.
3·1운동이 동시성의 경험이 될 수 있었던 것은 그것이 민족주의운동이었을 뿐 아니라 민주주의운동이었기 때문이었다. 후자는 3·1운동으로 인해서 탄생하게 된 상해 임시정부가 '대한민국은 민주공화정이고(제1조)', '대한민국의 인민은 남녀, 귀천 및 빈부의 계급이 없고, 일절 평등하다(제3조)'고 하는 민주적인 헌법을 채택한 데서 확인할 수 있다.
3·1운동의 경험을 직접적으로 반영한 대한민국 임시정부 헌법의 민주성은 불과 10년 전의 대한제국이 전제군주정이었던 것, 그리고 3·1운동 당시의 일본이 아직도 입헌군주정을 수립하지 못한 것과 비교할 때 확연히 드러나는 사실이다. 이것은 한국인이 3·1운동을 통해서 일본인보다 더 세계시간과 동시적인 삶을 살았음을 뜻한다.
3·1운동이 100년 동안 끊임없이 기억되고 기념되어 온 것은 사실이지만 3·1운동의 동시성 경험이 온전하게 기억된 것은 아니었다. 식민지 시기에는 3·1운동에 대한 기억 자체가 어려웠으며, 해방 후에는 남북 분단으로 인해서 3·1운동에 대한 기억도 분단됐다. 3·1운동에 대한 기억은 국가시간으로서 주로 기억되었으며, 지방시간과 세계시간으로서는 그다지 기억되지 못했다.
최근 3·1운동을 지방시간 속에서 기억하려는 움직임이 활발하며, 그 과정에서 여성 등 종래 숨어 있던 독립운동가들을 발굴해내는 성과가 나타나기도 하는 것은 고무적인 일임에 틀림이 없다. 그러나 아직도 3·1운동의 최전선에 서 있었던 희생자들에 대한 조사와 연구가 충분히 이루어지지 못했다.
3·1운동 희생자들의 정확한 수를 알 수 없는 것이 단적인 예다. 이것은 3·1운동에 대한 기억, 다시 말하면 3·1운동 정신에 대한 계승이 부족함을 뜻한다.
이제 100주년을 맞은 시점에서 우리는 3·1운동을 지방시간, 국가(민족)시간, 세계시간 속에서 동시적으로 기억해야 할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동시성의 경험이야말로 대한민국 건국 정신이라고 할 3·1운동의 정신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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