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영애 시인
새해 들어 아부에 대한 책을 읽으면서 주변을 돌아보게 되었다. 태초에 아부가 있었다는 말처럼 뛰어난 아부는 탁월한 팔로워십의 다른 이름이기도 하다. 유교문화권인 우리나라에서 아부는 배척해야 할 타도의 대상이면서 또 배워야 할 관계의 모델이기도 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나는 아부에 약하다. 엄격한 도덕주의자는 아니지만 타고난 기질 자체가 독립적이고 이익을 염두에 둔 사회생활을 하지 않아도 되어서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되었다. 그렇다고 아부 자체를 백안시하지도 않는다. 웃지 않아도 좋을 때 웃어야 하는 작은 아부부터 생존을 위한 아부까지 생활 자체가 아부의 연속이라는 것을 인정하기 때문이다.
힘 있는 쪽으로 쏠리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생존의 방식이고, 인간은 타인의 인정을 받고 싶어하기 때문에 아부 또한 인정투쟁의 한 속성이라고 본다. 그런데 문제는 자신의 이익을 노골적으로 관철시키려는 아첨 행위이다.
"까마귀는 죽은 사람을 쪼아 먹지만 아첨은 산 사람을 먹어 치운다"고 했다.
자신의 사적 이익을 위해 공론을 파괴하는 사람을 더러 본다. 그들은 교언영색을 하고 정도가 심해지면 타인을 모략하기도 한다. 아첨과 관련된 유명한 말로는 교언영색과 곡학아세를 들지만 산 사람을 먹어치우는 아첨으로는 연옹지치도 있다. 치열한 생존경쟁의 장에서 살아남으려면 아첨형 인간이 되지 않을 도리가 없다고 변명할 수도 있겠지만 치질 앓는 밑을 핥는다는 연옹지치형 인간이 되어서야 되겠는가.
대부분의 사람들은 연옹지치형 인간보다는 사회의 부조리에 눈을 감고 외면하는 침묵으로서의 아첨을 택한다. 침묵함으로써 입을 더럽히지 않고 몸을 숙이는 행태를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그 침묵형 아첨을 우리 사회는 인간관계를 잘 맺어가는 뛰어난 팔로워십으로 오해하기도 한다.
아첨형 인간은 조직을 갉아먹고 리더가 상황판단을 잘못하게 만들며 동료들과의 관계마저도 결국은 망가뜨린다. 이런 인간들은 리더의 자질에 대해서는 별 관심 없이 오직 그 리더를 통해 자신의 목적한 바를 이루어내고자 할 뿐이다. 리더를 보려면 부하를 보라는 말이 괜히 있는 것이 아니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자신의 이익을 얻어내는 것이 성공이라고 생각하는 아첨형 인간과 달리 염치형 인간은 그 이익을 포기하는 한이 있어도 자존심을 지키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이 복잡다난한 세상을 살아가면서 두문동 72현처럼 두문불출까지는 아니라도 노해야 할 때 노 정도는 할 수 있어야 염치가 있다고 하지 않을까. 아첨으로서의 침묵 또한 아첨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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