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들반들 윤이나 보이던 모래사장이 그 어느 날부터 온통 글자로 뒤덮였다. 가끔 밀물이 휩쓸고 간 자리에는 흔적도 없이 지워져버렸지만 그러기에 내 공책은 더욱 넓어졌고 맘껏 쓰고 또 써도 돈이 드는 공책 염려는 절대로 없었다.
"쓸데없는 짓 어지간히 하고 자빠졌네."
어머니는 그런 나를 발견할 때면 혀를 차며 못마땅해했지만 나는 개의치 않았다.
"그럴 시간 있으면 마루나 한 번 더 닦아!"
호된 꾸지람에도 나는 공부를 게을리하지 않았으며 오로지 내 목적 달성을 위해 전진만 할 뿐이었다.
2. 남의집살이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나는 13살 어린 나이에 남의 집 식모로 팔려갔다. 생활고에 허덕이던 우리 부모님은 많은 생각 끝에 결정을 내리고 쌀 두 가마를 받고 나를 목포 시내 당숙모네 집으로 가게 했던 것이다. 나는 울며 가지 않겠노라 떼를 썼지만 도저히 가지 않고는 배겨낼 수 없는 여건이 나를 등 떠밀어 가게 했다. 노망이 들어 벽에 똥칠을 하는 할머니와 어린 두 동생들의 배고픔을 지켜보는 나로서는 끝까지 우기며 나 자신만을 위해 고집부릴 수가 없었다. 사립문 밖에 서서 치맛자락으로 눈시울을 닦아내는 어머니의 모습이 떠나는 내 뒷덜미를 무겁게 만들었지만 나는 이를 앙다물고 발걸음을 옮겼다. 물론 그 시간에는 부모님이 원망스럽고 미웠지만 이런저런 이유를 들어 나를 설득하는 부모님을 한편으로는 이해하고 싶었고 지긋지긋한 가난이 싫어 부잣집이라는 당숙모네 집으로 가서 사는 편이 훨씬 나을 거 같다는 얄팍한 내 마음속의 계산도 있었기에 그다지 서럽거나 애달프지는 않았다. 더욱이 그때 내 나이 13살, 세상에 대해 아무것도 알 수 없었던 나로서는 그것이 너무나 당연한 일인 줄만 알고 곧 순응하며 부모님 말씀을 거역할 수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비록 먼 친척인 당숙모네라고는 하지만 남의집살이가 편할 리가 없었다. 낮 동안 고된 일에 지친 나는 밤이 되면 녹초가 돼 이불깃을 적시며 울어댔다. 부모님도 보고 싶고 동생들 그리고 할머니도 그리워 견딜 길이 없었다. 나는 그때 처음으로 가족에 대한 그리움을 가슴으로 절절히 느꼈다. 일도 버거웠다. 하지만 일보다 더 참을 수 없는 것은 보고픈 가족들과 헤어져 산다는 사실이었다.
거기다 내 나이와 동갑내기인 당숙모의 딸이 매번 음으로 양으로 괴롭힐 때는 정말이지 죽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더욱이 당숙모는 성격이 급하고 참을성이 없는 터라 조금만 일이 더디다 싶으면 곧잘 매질을 해댔다. 그것도 등허리든 머리든 아니면 종아리든 닥치는 대로 때리곤 했다. 물을 길어오는데 시간이 많이 걸린다든지 때로 힘에 부쳐 엎는 날은 영락없이 호된 꾸지람과 더불어 매질을 당했다. 나는 너무도 당숙모가 무서웠다. 그렇다고 도망도 갈 수 없었고 또 갈 곳도 없었다. 나는 그럴 때마다 책을 펴들고 스스로 마음을 달랬고 더욱 어금니를 꽉 깨물며 후일을 위해 공부를 멈추지 않았다. 어느 때는 그것이 화근이 돼 더 심하게 매를 맞았다. 당숙모는 하얀 이를 드러내며 눈꼬리를 올리고 내 손에 든 책을 빼앗아 아궁이에 집어던진 뒤 작대기로 실컷 두들겨 팼다. 나는 잘못했다고 두 손을 모아 싹싹 빌었지만 당숙모는 조금도 인정을 두지 않았다.
"뱁새가 황새 걸음 걷다간 가랑이가 찢어진다는 거 몰라? 꼴값을 떨어도 분수가 있지, 어디 남의집살이 하는 년이 공부를 한답시고 책을 끼고 살아! 주제도 모르고."
매보다 더 아픈 당숙모의 이런 말들은 어린 내 가슴에 비수가 돼 꽂히곤 했다. 나는 서러움을 우물가로 달려가 씻어냈다. 두레박으로 물을 퍼 올리며 입으로는 A B C D E F G! 하고 크게 소리를 질렀다. 우물은 당숙모네 집과 상당히 먼 곳에 있었기에 들킬 염려는 거의 없었다. 중학교에 다니는 당숙모의 딸은 그런 나를 볼 때마다 입술을 삐죽거리며 시기질투를 하는 듯싶었다. 얼굴도 못생기고 공부도 못하는 입장이었기에 나와 늘 자신을 비교하며 더욱더 못살게 굴었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당장 달려가 당숙모에게 고자질한다.
"어머니, 숙자 지금 책 보고 있어. 못 믿겠으면 직접 가보셔."
"정신 나간 년! 얼마나 맞아야 정신이 들 건감!"
숨을 씨근덕거리며 곧바로 내가 있는 곳으로 달려온 당숙모는 내 머리채를 휘어잡고 저만큼 내동댕이쳤다.
"야, 이년아! 널 얼마 주고 데려온 줄 알아? 밥값도 제대로 못 하면서 속이나 썩이지 말아야지! 네 팔자에 공부는 해서 뭐 하게? 사람은 분수를 알아야 된다고 몇 번을 말했어. 맞아죽기 전에 그만하는 게 좋을 거야. 죽으면 쥐도 새도 모르게 묻어버릴 거니까. 알아들었어!"
머리를 쿡쿡 쥐어박으며 당숙모는 두 눈을 부라려보였다. 나는 너무도 무섭고 겁이나 온몸을 벌벌 떨었다. 그러나 내 공부에 대한 열망은 전혀 식을 줄 몰랐고 그러면 그럴수록 내 마음 안에 어떤 오기가 가득 차오르는 것만 같았다.
해질 무렵 물을 길어오던 중 먼 곳 하늘을 바라봤다. 붉은 노을이 하늘을 가득 채우고 아름답게 펼쳐져있다. 그리움이 묻어난다. 노을 속 어딘가에 내 가족들이 살고 있는 모습이 내 시야를 얼핏얼핏 지난다. 밥상에 둘러앉아 꽁보리밥을 목구멍으로 삼키던 그때 그 시간, 입안에서 뱅뱅 도는 보리알이 지금 생각해보니 사뭇 그립다. 가을걷이가 끝난 뒤 어머니가 들판을 헤매며 주워온 잔치래기 무를 소금간만 해 담가둔 다음 숭덩숭덩 썰어 밥상에 올려놓으면 유일한 반찬으로 그보다 별미는 없는 듯 여겨졌다. 동생들은 동치미 국물을 조금이나마 더 먹겠다고 아우성이고 그럴 때면 어김없이 어머니의 숟가락 응징이 동생들의 머리 위로 날아다니곤 했다. 어머니는 뜨는 둥 마는 둥 숟가락을 내려놓고 하염없이 눈물지으며 한탄의 목소리를 쏟아냈고 나는 슬며시 일어나 방밖으로 나오는 게 언제나처럼 일상이었다. 방안에서는 아직도 끝나지 않은 가난의 전쟁이 계속되고 있었다. 어머니의 목소리가 방 밖으로 새어나온다. 나는 급히 몸을 움츠리고 가슴을 졸였다.
"에고, 가난한 집구석에서 뭐 하려고 새끼들만 주렁주렁 낳아 이 고생이람. 더러운 내 팔자."
또 팔자타령이다. 나는 그 소리가 너무도 지긋지긋했다. 왜 가난하게 사는가는 깨우치지 못하고 늘 팔자라는 단어에 매달려 신세 한탄만 한다. 가난이 어디서 오는가. 가진 거 없으면 가난한 것이다. 그렇다면 가난에서 벗어나려면 가져야 하지 않겠는가. 하지만 가질 수가 없다. 부모 때부터 뼈 빠지게 농사짓고 허덕여보지만 물려받은 재산이 없으면 더욱 고달플 뿐이다. 그러므로 자식에게 물려줄 것도 없고 역시 가난은 대물림될 수밖에 없다.
시대가 변해간다. 아무것도 알지 못하면 평생 농사일밖에 매달릴 곳이 없다. 그것은 육체의 고된 노동이다. 그렇다고 대가가 큰 것도 아니고 농사도 머리로 짓지 않으면 더욱 힘든 법이다. 경우에 따라서는 가난은 게으른 데서 오기도 하지만 우리 부모님은 남달리 부지런한데도 가난이라는 틀을 벗어나지 못하는 까닭은 아무리 돌려 생각해봐도 배우지 못한 탓인 것만 같다. [1월29일 자 시니어문학상 면에는 논픽션 당선작인 '열망' 3회가 게재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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