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기기증 신청해도 가족 반대하면 취소…기증자 의사 존중해줘야"
1994년. 일곱 살 미국 소년 니콜라스는 가족들과 이탈리아 여행을 하고 있었다. 여행 도중 니콜라스는 갑자기 나타난 강도의 총에 머리 총상을 입었고 뇌사상태로 빠져들었다. 니콜라스의 부모였던 레그 그린과 매기 부부는 아이를 죽음으로 내몬 이탈리아에서 이탈리아인들을 위해 장기기증을 결정했다. 니콜라스의 심장, 각막, 신장, 간, 췌장은 기증돼 죽음의 기로에 섰던 7명에게 새 생명을 선사했다.
니콜라스가 전해준 파장은 컸다. 유럽에서 장기이식 건수가 가장 낮았던 이탈리아의 장기기증 건수는 니콜라스의 사연이 알려지면서 두 배로 늘었다. 대통령부터 정·재계는 물론, 운동선수와 의사 등 각계각층의 많은 사람들이 장기기증 서약을 했다. 니콜라스 효과가 만들어진 것이다.
니콜라스의 아빠 레그 그린은 아들의 얘기를 책으로 펴냈다. 이 책은 우리나라에서도 번역돼 지난 2016년 나왔다. 제목은 '니콜라스, 정말 네가 한 거야?'.
이 책이 나왔을 당시 니콜라스에 관한 내용도 감동적인 것이었지만 옮긴이가 흥미를 끌었다. 옮긴이는 전문 번역가가 아닌 당시 계명대 동산의료원 이식혈관외과의 조원현 교수와 인제의대 부산백병원 신장내과 김영훈 교수였다.
조원현(66) 교수는 계명대에서 정년퇴임한 뒤 서울에서 새로운 일에 도전하고 있다. 이식혈관외과 교수로 일하며 평생동안 안타깝게 생각했던 척박한 한국의 장기이식 문화를 바꿔보겠다는 의지 때문이다. 보건복지부 산하 재단법인 한국장기조직기증원장으로 재직하면서 생명을 나누는 일, 즉 니콜라스 효과를 한국에 심는 작업을 하고 있다.
지난 8일 서울 충정로의 한국장기조직기증원 사무실에서 조 원장을 만났다. 그는 장기·조직 기증을 통해 생명을 살릴 수 있는 길이 있는데 기증에 대한 참여도가 낮아 너무 안타깝다고 하소연했다.
-환자의 죽음을 숱하게 봐온 이식 전문 의사인데 은퇴 후 장기기증 활성활를 위한 사회운동에 참여하고 있다. 기증을 받지 못해 안타까운 죽음에 이른 숱한 환자를 봤을텐데 그 아픈 기억때문에 이 운동에 나서는 것인가?
▶내가 젊은 시절이었으니 1990년대 중반으로 기억한다. 선천성 대사질환을 앓아온 여자 어린이였는데 간 이식을 하면 살 수 있었다. 뇌사자를 엄청나게 오랜 세월동안 수소문했다. 결국 찾았다. 그런데 그 어린이가 먼저 세상을 떠나버렸다. 태어날 때부터 병마와 싸우며 고통받아온 그 어린이는 13년밖에 살지 못하고 생을 마감했다. 이런 죽음은 안된다고 생각했다. 이식 수술만 하면 살 수 있는데 너무 안타깝고 속이 상했다. 그런데 당시만해도 이런 현실에 대해 누구도 관심이 없었다.
-장기 기증만 활성화된다면 훨씬 더 많은 사람들이 생명을 구할 수 있다는 것인가?
▶생명을 구하는 것 뿐만 아니라 더 나은 삶을 살 수 있다. 목숨만 붙어 있는 삶도 의미있지만 삶의 질도 중요해졌다. 장기·조직 기증만 잘 이뤄진다면 이런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 의료기술의 발달은 간·폐·심장·신장 등은 물론, 팔 이식까지 해내고 있다. 기술 수준으로만 보면 성기나 자궁 이식도 가능해졌다. 뇌 이식까지 의료계에서 도전하고 있다. 가장 활성화된 이식 중 하나인 콩팥은 이식 수술을 받은 사람 중 30년 이상 생존한 사례도 많다. 기증이 활성화되면 정말 많은 사람들이 생명을 얻는 것은 물론, 행복하고 질 높은 삶으로 나아갈 수 있다.
-장기기증에 대한 인식을 바꾸자는 캠페인이 오랜 세월동안 진행돼왔고 종교계에서도 활발한 활동을 펴왔는데 기증이 늘어나고 있지 않은가? 상황이 어떤가?
▶정반대다. 고민스러울 정도로 줄어들고 있다.
(기자가 통계를 찾아보니 최근 국내 뇌사 장기 기증자 수는 2년 연속 감소했다. 지난 2000년 장기이식법이 발효된 후 매년 뇌사 장기 기증자 수는 증가해 왔지만 2017년 처음으로 떨어졌으며 지난해 역시 감소했다.
한국장기조직기증원에 따르면 지난해 국내 뇌사 장기 기증자는 12월까지 총 449명으로 2016년 573명, 2017년 515명에 이어 2년 연속 감소했다. 뇌사자 장기와 별개로 피부나 각막 등 조직 기증자 수도 2016년 248명에서 2017년 111명을 거쳐 2018년 115명으로 뚝 떨어졌다.
국내 기증 동의에 대한 거부율은 계속 오르고 있다. 2016년 48.7%였던 장기 기증 거부율은 2017년 58.0%에서 2018년에는 61.3%로 올라갔다.
기증자 수가 적고 기증 거부율이 올라가면서 장기 이식 대기자로 등록돼 있다가 사망하는 사람들 수는 늘어나고 있다. 지난 2015년 이식 대기 기간 중 사망자 수는 하루 평균 3.3명이었지만 2016년 3.6명을 거쳐 2017년 4.4명으로 증가했다.)
-왜 기증이 줄어들고 있는 것인가? 생명 나눔, 너무나 숭고한 가치 아닌가?
▶기본적으로 장기기증으로 발생하는 신체훼손에 대한 거부감이 너무 강하다. 일부 기증자 가족들은 금전적 부분에 대해서도 생각을 하는 것 같다. 기증자에 대해 장례지원비 명목으로 소정액의 금전지원을 하고 있지만 선진국 관계자들은 "이 부분에 대해서는 일체의 지원도 해서는 안된다"는 입장이다. 숭고한 기증 의사가 금전적인 문제로 오해를 받거나 훼손되어서는 안되기 때문이다.
외국에서도 장례비를 지급하자는 의견이 없는 것은 아니나 생명나눔의 기본적인 가치를 훼손한다고 해서 거부된 상태다.
현 상황에서 걱정되는 것은 장례지원비마저 없애버리면 기증이 더 줄어들 것 같아 고민이다. 그러나 이런 고민을 감내하면서 국민, 정부와 함께 어떻게 하면 기증자의 정신을 존중하고, 기증하신 분을 명예롭게 그리고 사회의 영웅으로 대접할 것인가에 대한 공감대를 이루어야 한다.
-우리 사회에 기부 문화는 일정 부분 발전되고 있다는 평가가 나오는데 생명을 나누는 장기와 조직 기증문화는 왜 진전을 보이지 않을까?
▶문화의 문제가 큰 것 같다. 다른 사람의 장기 기증은 뉴스에서 보면서 기증을 자연스러운 것으로 받아들이지만 막상 내 가족 문제로 다가오면 안된다는 입장이 너무 강하다.
의료현장에서 느낀 우리 국민들의 기증에 대한 반응은 신체 훼손으로 인한 부모에 대한 불경, 새로운 수술로 인해 기증자가 고통스럽지 않을까 하는 오해, 인터넷 등에서 떠도는 장기 거래 등의 부정적인 인식때문에 기증 동의를 망설이게 하는 것 같다.
익숙한 풍경이지만 수술을 마치고 나오면 가족들이 수술실 앞에서 모두 기다리다가 막 수술실 문을 열고 나서는 의료진들에게 '어찌 됐느냐'고 다급한 물음을 쏟아낸다.
뇌사자의 장기기증 수술때도 마찬가지다. 외국의 경우를 보면 장기기증에 대한 동의가 끝나면 대부분의 가족들은 집에서 수술이 끝나기를 기다리고, 병원에서 수술을 마쳤다고 연락을 하면 그때 장례식장으로 가는 것이 보통이다.
그러나 우리는 기증자를 홀로 두고 집에서 기다린다는 것이 예의에 어긋난다고 생각하는 문화다. 몇해전 메르스 사태에서도 문제점으로 지적됐지만 우리의 독특한 간병 문화는 이런 연장선이다. 이제는 병원문화도 바뀌어야한다. 내 가족을 사랑해야하지만 지나치게 집착하는 것은 것은 환자의 감염예방을 위해 지양해야한다.
-가족에 대한 사랑은 선진국에서도 강한 것 아닌가? 어쩌면 우리나라 사람들보다 더 강할지도 모르는데, 왜 그들은 가족의 장기 기증을 기꺼이 받아들일 수 있는가?
▶유럽의 예를 보자. 유럽 사람들은 요람에서 무덤까지라는 복지 개념이 철저하다. 그런데 그들은 복지에 대한 국가 책임도 강조하지만 개인의 책임도 함께 강조한다. 국가가 복지를 베푼다면 개인도 복지를 위한 행동을 당연히 해야한다는 것이다.
중증질환에 시달리며 평생을 투병하면 그 환자를 위해 국가가 엄청난 세금을 들여 치료비를 물어야한다. 그런데 뇌사자의 장기·조직 기증이 많다고 해보자. 그 환자는 이식을 통해 빨리 완쾌할 수 있고 치료비가 절감돼 사회적 비용을 줄일 수 있다. 이 메커니즘을 유럽 사람들은 잘 알고 사회 구성원들은 이를 이행해야한다고 믿는다.
또 국가는 이를 통해 국가재정을 절약하면 다시 복지 혜택을 통해 국민에게 되돌려주려고 한다. 이러한 과정에서 장기·조직 기증 문화가 국가의 우선 정책(National Priority)으로 연결된다. 우리가 선진국으로 가기 위해서는 이 메커니즘을 이식할 수 있어야한다. 우리가 반드시 가야할 길이다.
-병마와 싸우는 것은 더 이상 개인만의 문제가 아니다. 기증 문화가 빨리 확산되어야하는데 대책은 어떤 것이 나와야할까?
▶지난해 말 기준으로 국내에 2만9천명 정도의 이식 대기자들이 있다. 그런데 기증을 하는 사람이 연간 몇백명 수준이니 자꾸 하는 소리지만 참 안타까운 모습이 펼쳐진다.
제도적으로는 장기이식법 개정을 통해 장기 기증을 활성화해야 한다. 현재 뇌사자에게만 한정된 장기 기증을 심정지 환자에게서도 이뤄질 수 있게끔 하고 기증자 본인의 의사를 가장 먼저 존중해 기증 문화가 안착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지금은 본인이 기증 희망 등록을 하더라도 다른 1명의 가족 동의를 반드시 받아야 하며 선순위 동의권자 동의가 있더라도 다른 가족이 반대하면 선순위 동의권자가 동의를 취소할 수 있어 장기 기증이 어려운 경우가 많다. 외국에서는 기증자 본인의 싸인이 있는 카드가 있으면 이를 전적으로 존중하는데 우리는 아직 이를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다.
미국의 경우 지난 2002년 장기 기증자 수가 정체 상태를 보이자 정부와 국회, 병원, 각종 협회 등 유관 단체 구성원이 모두 모여 규제를 줄이고 장기 기증 문화를 확산시킬 수 있는 방안을 공동 모색해 이듬해부터 기증자 수가 다시 늘어나게끔 했다. 우리도 범사회적 논의가 필요하다.
-앞으로 기증만 늘어나면 더 많은 생명을 구하고 환자들의 삶의 질도 높일 수 있을까? 또다른 벽은 없는 것인가?
▶의료진을 구하지 못하는 사태가 가장 걱정이다. 이식외과는 근무시간이 들쭉날쭉이다. 한밤중에도 불려나와야한다. 예전에 학회를 다닐 때 비행기를 탔다가 학회 개최국 공항에 도착하자마자 바로 되돌아온적도 있었다. 요즘 의사들은 이런 것을 싫어한다.
정부가 노동시간 감축정책을 쓰고 있어서 전공의 근무시간도 줄어든다. 자연적으로 야간이나 휴일에 주로 발생하는 뇌사자 관리나 기증 수술이 의료진 부족으로 큰 타격을 받게 된다. 이 부분도 걱정이다.
이런 풍토속에서 의료 서비스가 뒷받침을 못해줄까봐 심히 염려스럽다. 의료진들부터 생명을 나누는 일에 대해 관심을 기울이는 교육을 해야한다. 의대 교육과정에 이 부분을 필수로 해야한다는 목소리도 있다.
-현장에서 뛰는 의료진들도 그러하지만 사회 전체적으로 모든 구성원들이 함께 노력해야할 사안 아닌가?
▶언론도 매우 중요한데 국민들의 생각을 바꿔줘야한다. 단순히 장기기증희망등록을 하는 단계를 넘어서 실질적인 장기기증을 결정하는 단계로 전환될 수 있도록 해야한다. 긍정적인 부분은 강조하되 부정적 보도는 좀 지양해줬으면한다. 부정적 보도는 나누려는 마음을 접게 만드는 것 뿐만 아니라 손꼽아 이식을 기다리는 대기자들의 생명을 위협할 수 있다.
미국 소년 니콜라스의 부모가 장기 기증을 결정한 내용이 이탈리아, 미국, 그리고 세계 각국에서 다양한 언론 보도로 이어졌다. 이 보도를 통해 각국의 장기기증이 10% 이상씩 폭증했다. 언론의 힘을 보여준 것이다.
최근 주춤해졌지만 국내에서도 장기와 조직 기증의 증가세를 나타냈던 것은 언론이 긍정적 보도를 한 이후였다. 언론을 통한 보도가 국민들의 오해를 멈추게 하고 기증에 대해 제대로된 이해로 이어질 수 있다.
-뭐니뭐니해도 행정력과 재정을 갖고 있는 정부의 역할이 가장 큰 것이 아닐까?
▶미국의 레이건 대통령은 장기 기증 캠페인을 직접 했다. 이것은 국가의 운영을 원활하게 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이 사업은 정부 차원의 계획과 국가적 우선 사업이라는 개념이 주어져야한다.
절망에 빠진 환자들의 생명이 국민들의 자발적이고 순수한 생명나눔을 통해 새로운 삶으로 바뀌는 것은 물론, 이식 수혜자 본인과 그 가족의 삶의 질을 향상시킨다. 개개인 환자 및 가족의 삶의 질이 나아지면 지금 한국사회가 매우 걱정하고 있는 건강보험재정 건전성도 좋아진다.
우리가 수십년간 노력해온 것이 있다. 교통사고나 심뇌혈관질환으로 인한 사망자를 줄이자는 것이었다. 그런데 국가적으로 노력한 결과, 실제로 많이 줄었다.
이제 또한번 도전해야한다. 장기 이식을 기다리는 대기자 명단과 대기 중 사망자 숫자를 줄여야한다. 충분히 할 수 있는 것인데 안하면 안된다. 정부가 나서고 전 국민이 동참해야한다. 생명을 나누는 일, 누구나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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