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림공원 수선화축제, 월령선인장마을
서귀포 애기동백, 계절없는 유채꽃
제주 식물들은 사시사철 푸름푸름하더라
하마터면 모르고 살 뻔했다. 겨울에도 꽃이 핀다. '눈꽃'같은 말장난이 아니다. 꽃잎이 있고 꽃술이 있는 살아있는 식물, 꽃이다. 겨울에도 바람 맞아가며 꽃들이 피어나는 곳, 제주도다.
제주의 겨울 기온은 영상권이다. 다운점퍼를 입는 게 유난스러울 법하다. 아침 기온이 영상 8도에 이르기도 한다. 바람이 변수다. 바람이 찰 때는 목도리며 장갑도 아쉽다.
그럼에도 제주는 '푸름푸름'하다. 가지만 앙상해져 본 적이 없는 짙푸른 제주의 가로수다. 메마른 가지에 전등을 매달아 반짝이는 야경으로 승부하는 일루미네이션이 굳이 필요하랴. 겨울바람을 시원하게 받아치며 피어나는 꽃과 늘 푸른 나무가 있는데.

◆애기동백
동백꽃나무 안은 무풍지대다. 한창 불던 바람도 잠시 꽃나무 옆에 멈춰 선다. 바람이 쉬어주니 애기동백의 새콤한 향이 주변에 머문다. 만개 시기는 12월로 알려져 있다. 바람의 특혜 덕분인지 꽃잎은 1월 중순에도 쌩쌩하다.
배려가 뿜뿜 솟아나는 공간이다. 인파가 우르르 몰리지 않는다. 나무 한 그루당 한 그룹씩 질서정연하게 붙는다. 사진작가가 되고 모델이 되는 불문율이다. 상대의 촬영을 위해 고개를 숙였다가, 잠시 멈춰 섰다가를 반복하는 것도 규칙이다. 동백꽃 군락지를 둘러싼 제주의 돌담에 순서대로 올라앉는 것도 차례가 있다. 이 훈훈한 분위기를 어쩔 것인가.

어느 것 하나 최상의 사진이 나오는 데 무리가 없다. 화룡점정으로 사진에 반드시 담겨야할 웃음도 마구 터져 나온다. 꽃가루는 알레르기를 일으켜 재채기를 유발한다지만 여기선 웃음을 끌어낸다. 사람들의 콧속을 거쳐 뇌를 자극해 터져나오는 웃음인지 모를 일이다. 애기동백꽃의 금빛 꽃술 가루가 유난히 반짝인다. 반전의 상징으로 꽃을 전한 이유였으리라.
화사한 동백꽃들은 떨어져서도 피어있다. 금방 피어난 듯 화사하다. 낙화의 서러움은 느끼지 못할 만큼이다. 서귀포 위미리 제주동백농원, 카멜리아힐, 휴애리 자연생활공원에서 만날 수 있다. 입장료는 제각기 다르니 확인하고 가야 한다.

◆유채꽃
"20년 동안 키웠다. 10년 전에도 입장료로 1천원 받았다."
'비싼 거 아니니 입장료 내고 들어가서 가까이에서 보고 사진도 찍으라'는 말로 해석됐다. 제주에선 뭘 하든 돈이라는 말이 실감난다. 성산일출봉이 한 눈에 보이는 곳이다. 얼마나 흐드러지게 피었는지 겨울인줄도 모르는 유채꽃밭이다.
꽃밭에 들어가 꽃을 보고 꽃을 배경삼아 사진을 찍으려면 입장료를 내야한다. 어색하다. 꽃을 소재로 한 전국의 축제장에서 한 번쯤 느낀 감정이다. 메밀꽃밭도 그랬다. 소위 사진이 잘 나오는 곳은 어김없이 '배경이용료'가 붙는다.

수목원에는 입장료 내는 게 당연하고 작은 밭에는 입장료 내는 게 억울하냐고 하면 반박하기 어렵다. 꽃씨를 뿌리고 비료도 주고 열심히 키운 주인의 심정과 논리를 이해한다면야.
어색함은 꽃밭을 공공재로 인식한 데서 시작된다. 제주 여행에선 이런 인식을 깨는 게 편하다. 여행의 풍류를 해치지 않는 지름길이다. 관광객의 발길을 끌 수 있는 매력적인 상품을 만든 것에 수고비를 받겠다는, 지극히 자본주의에 충실한 주고받음이므로.

◆선인장
내비게이션에 '월령선인장군락지'로 가득 채울 것도 없다. '월령'만 넣어도 자동 입력이다. 제주 서쪽해안에 있다. 현무암 검은 해안에 에메랄드빛 바다, 선인장무더기가 어우러진다. 국내 최초 상업용 해상풍력발전인 제주 탐라해상풍력발전단지가 멀지 않게 보인다. 맑은 하늘까지 도와준다면 그림이다.
왜 이곳에 선인장이 이렇게 많은 걸까. 선인장 군락에 대한 제주도의 설명은 다음과 같다.
'국내 유일의 선인장 야생 군락이다. 선인장에 이곳에 자라게 된 이유는 명확하지 않다. 여러 설이 있는데 선인장 씨앗이 원산지로 알려진 멕시코에서 쿠로시오 난류를 타고 이곳에 밀려와 모래땅이나 바위틈에 뿌리내린 것으로 보고 있다.
이곳 주민들은 뱀이나 쥐가 집으로 들어오는 것을 막기 위해 집 울타리 돌담 옆에 선인장을 심게 됐다고 한다. 6~7월이면 노란 꽃이 피고 11월에는 열매가 익는다. 백년초다. 손바닥 모양과 같다 해서 손바닥 선인장이라 불린다'
보랏빛 선인장 열매 '백년초'가 꼭지처럼 달렸다. 마을 건너편을 살피니 밭이 있다. 특용작물로 재배도 하고 있다. 알고 보니 천연기념물이다. 선인장이 무더기져 있지만 가시가 날리진 않는다. 들어가지 말라는 팻말이 있음에도 굳이 들어간다면 가시를 각오해야 한다. 올레길 14코스의 일부다. 500미터 정도 이어진 목재데크길을 여러 번 왔다 갔다 해도 좋을 길이다.
이곳도 씨름선수 출신 연예인이 식당을 열어 영업하던 프로그램의 배경으로 입소문이 났었다. 하지만 제주 4.3사건 당시 총상으로 평생 흰 천을 얼굴에 두르고 살아야했던 일명 '무명천 할머니', 고(故) 진아영 할머니(1914~2004)가 살았던 곳이기도 하다. 선인장 씨앗을 뿌린 주인이 없어선지 입장료도 없다. 마음껏 사진을 찍어도 된다.

◆수선화
1년 내내 꽃 축제장인 곳도 있다. 월령선인장군락에서 5분 거리다. 한림공원이다. 1월엔 수선화축제장이다. 하얀 꽃잎 가운데로 꽃술이 샛노랗게 툭 튀어나왔다. 치즈팝콘이 녹색 풀밭에 뿌려진 듯하다. 새콤달콤한 향기가 온 사방을 적신다.
나르시시즘(Narcissism)의 어원이 된 수선화다. 이곳에선 자아도취에 빠져 혼자 잘난 꽃이 아니다. 수선화는 일찌감치 꽃망울을 틔운 매화, 홍매와 백매의 들러리가 돼 준다. 2월이면 이곳의 주인공은 홍매와 백매로 바뀐다.
제주에서 유배생활을 하다 수선화 예찬론자가 된 추사 김정희의 이야기가 찬시와 함께 전해온다. 서울에서는 보기 어려워 어쩌다 중국에 다녀오는 이가 가져온 수선화만 구경했었는데 유배생활 동안 수선화 덕에 덜 울적했으리라.
수선화가 국내에 들어온 건 순조 12년인 1812년 신위가 연경에 사신으로 갔다가 겨울에 돌아오면서 가지고 왔다는 설이 유력하다. 귀한 수선화가 유배지 인근에 널렸으니 그 마음이 어땠으랴.

"수선화는 과연 천하에 큰 구경거리입니다... 그 꽃은 정월 그믐, 2월 초에 피어서 3월에 이르러서는 산과 들, 밭두둑 사이가 마치 흰 구름이 질펀하게 깔려 있는 듯. 흰 눈이 광대하게 쌓여 있는 듯하기도 합니다."
꽃밭 사이로 공작새가 산책을 다닌다. 공원 안에 사파리조류원이 따로 있어도 제 맘대로 활보한다. 한림공원의 주인은 공작이다, 라는 말이 무리가 아닐 만큼이다. 사람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외려 귀찮은 듯 피해 다닌다.
날개를 활짝 펴길 기대하는 사람들의 주문을 알아듣지 못할 텐데 주변에선 열심히들 외쳐댄다. 그저 공작새의 꼬리깃털을 밟지 않도록 주의를 기울일 일이다. 한림공원의 주인은 누구다? 입장료가 있다. 일반 1만2천원, 어린이 7천원.
◆당일치기 여행 노려볼 만
짐 없이 가볍게 당일치기도 가능하다. 아침 일찍 나서면 소개한 4곳을 모두 둘러보고도 저녁 비행기로 대구에 도착한다. 몇 년 새 대구공항 주변에 주차하기 어려워졌다. 주차할 곳이 마땅치 않으면 아양교 금호강변 주차장에 무료 주차하고 800m 가량 걷는 것도 괜찮다.
※취재협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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