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적폐 청산의 기술

입력 2019-01-21 11:17:17 수정 2019-01-21 19:05:13

추연창 대구경북동학연구회장

추연창 대구경북동학연구회장
추연창 대구경북동학연구회장

적폐는 오랫동안 쌓이고 쌓인 잘못이다. 오래되고 잘못된 것이라 하더라도 개인 차원의 것은 적폐라고 하지 않는다. 타인과 사회에 부정적 영향을 끼칠 때 그것을 적폐라 한다. 즉 적폐는 장기간에 걸쳐 계속되어온 사회적 해결 과제이다. 적폐를 없애야 사회가 바로 선다. 그런데도 적폐는 계속 생겨나고 또 이어진다. 기득권층 등 누군가가 적폐의 유지를 통해 이익을 누리기 때문이다. 적폐가 기득권층에 이익이 된다는 추정은 역사를 보면 흔히 입증된다. 74세에 창의한 최익현 선생은 고종의 신임을 얻어 호조참판이 된 후 적폐를 바로잡으려다 기득권층의 반발을 사 제주도로 유배됐다.

공민왕 때의 승려 신돈도 마찬가지다. 신돈은 공민왕의 신임을 잃자 역모를 획책하다가 발각돼 처형된 인물이지만 그의 몰락도 적폐 청산과 연관돼 있다. 신돈은 고려 내부의 혼탁한 사회적 적폐를 타개해 질서를 잡으려 했다. 전민변정도감을 두고 부호들이 빼앗은 토지를 소유자에게 돌려주고 노비로서 자유민이 되려는 자들을 해방시켰으며, 국가 재정을 정리하고 민심을 얻었다. 그러나 그의 지나친 급진적 개혁은 상층 계급의 반감을 사면서 막을 내렸다.

신돈에 대한 역사적 평가에는 매우 상투적인 인식이 들어있기도 하다. "급진적 개혁을 추진하다가 상층 계급의 반감을 샀다"는 대목이 그것이다. 이는 점진적인 개혁을 했더라면 기득권층의 반감을 사지 않았을 것이라는 논리를 깔고 있다. 하지만 점진적인 적폐 청산 정책이 진정으로 개혁의 성공을 낳는다면 기득권층은 처음부터 그 '점진'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이론으로만 가능할 뿐 결코 현실에서는 통하지 않는 '그림의 떡'이다.

일찍이 정도전은 왕권(王權)보다 신권(臣權)이 중요하다고 외쳤지만 백성들은 그를 지키지 못했다. 고려 초기 정권을 안정시키는 데 역량을 발휘했던 광종도 개국공신과 호족들을 짓누르는 방법을 썼다. 정도전의 실패와 광종의 성공에는 신하와 임금이라는 신분 차이가 결정적 요인으로 작용했다고 보면 안 된다. 정도전은 자신의 이상을 실현하는 데 노둣돌이 될 만한 세력을 갖추지 못한 반면, 광종은 외세와의 대결을 겪으면서 든든한 군사력을 축적했다. 지지 세력 확보라는 기초적 준비 상태가 너무나도 달랐다.

적폐 청산에 들어가기 이전에 적폐 청산 정책을 지지할 백성부터 모아야 한다. 급진적으로 하든 점진적으로 하든 기득권층의 반발과 무산 기도는 집요하고 끈질기다. 인조반정을 기도한 세력은 광해군 15년이 아니라 즉위 원년부터 쿠데타를 획책했다.

그렇다면 적폐 청산 지지자를 어떻게 모을 것인가? 역시 정도전과 광종이 교훈을 준다. 정도전은 잡은 권력을 분배하는 데 골몰하던 중 몰락했다. 광종은 국민 다수가 대상인 '을'에게 기회의 균등을 보장하는 과거 실시와, 부당하게 하층민이 된 수많은 이들을 '보통 사람'으로 돌아가게 하는 노비안검법 제정을 통해 소수 기득권층의 반발을 누르고 승리했다. 대다수 국민들에게 구체적으로 경제적 이익과 심리적 만족을 주는 정치, '나에게도 기회를 주고 신분상 불이익을 받지 않도록 해주려고 정부가 애쓰고 있구나!'라고 보통의 국민들이 느낄 수 있는 정치, 그것이 적폐 청산의 기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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