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흥]느림보 기차, 5060세대 '추억 곱씹기' 취향 저격…백두대간 협곡열차

입력 2019-01-09 19:30:00 수정 2019-02-25 10:28:37

객차 양옆 유리창 너머 펼쳐진 협곡…영화 '박하사탕'처럼 떠오르는 기억들

봉화군 분천역을 출발한 백두대간 협곡열차는 강원도 철암역까지 협곡사이를 시속 30㎞로 달리고 있다.이채근 기자 mincho@imaeil.com

느리다는 걸, 비싸다는 걸, 춥다는 걸 알고도 탄다. 빨리 가는 게 목적이었으면 애초에 타지도 않았다. 여행비용 대비 만족도는 속칭 '콧바람 효과'로 절정에 이른다. '나의 기차 여행'이 기분 전환을 위한 최선의 선택임을 대외에 입증할 필요도 없다.

경북 봉화군 분천역에서 출발해 강원 태백시 철암역까지 가는 '백두대간 협곡열차'다. 2천600원을 내면 40분 만에 갈 수 있는 27km 거리를 8천400원 들여 1시간 걸려 가면서도 좌석이 없어 안달이다.

◆열차, 느려서 고맙다

열차는 시속 30km로 간다. 느려서 고맙다. 동병상련의 심정일까. 승객 상당수가 50, 60대다. 느린 열차에 몸을 싣고 있노라면 복기(復記)는 자연스럽다. 가깝게는 오늘 아침 경로를 되짚고, 멀리는 어린 시절 통학로를 떠올린다. 문득문득 떠오르는 기억을 정리하는 건 흔히 있는 일이건만 기차에 오르면 틀림없다. 희한하게 기억의 재편집은 강제적이라 할 만큼 자동적이다. 기차의 매력이다.

사실 열차가 지나는 곳, 백두대간 협곡의 풍경을 겨울에 추천하기는 애매하다. 깎아지른 듯한 협곡이 이어져 장관을 연출하는 게 아니기에 겨울에는 황량하기 그지없다. 물론 걷는 만큼 보이는 트레킹이라면 얘기는 완전히 달라진다. 열차 안에서 보는 풍경으로는, 일부 구간 외엔 아쉬움이 남는다. 황지에서 시작한 낙동강이 겨울에 하얀 칠을 하고 함께 달려주는 유일한 벗이다. 눈이 내린 뒤라면 얘기가 또 다르다. 강원남도라는 우스갯소리가 있을 만큼 눈이 많은 봉화를 기대한다면 일기예보 추이를 관찰한 뒤 예약해도 늦지 않다.

백두대간 협곡열차의 출발역인 봉화군 분천역앞에는 산타마을이 개장돼 관광객들이 겨울여행을 즐기고 있다.이채근 기자 mincho@imaeil.com
봉화군 분천역을 출발한 백두대간 협곡열차는 강원도 철암역까지 협곡사이를 시속 30㎞로 달리고 있다.이채근 기자 mincho@imaeil.com

그래도 탁 트인 시야만큼은 자랑할 만하다. 삼방(三方)이 열려있다. 객차 양 옆과 맨 뒷 칸이 유리창으로 돼 있다. 백두대간 협곡열차를 타기 위해 예약은 필수지만 좌석 위치에는 큰 의미가 없다. 어차피 좋은 풍경이 나올 때, 예를 들어 거북이바위나 구문소 정도를 들 수 있는데 다들 일어서서 창가에 붙어 바깥을 본다. 설령 창가에 붙지 못했어도 전경이 훤히 다 보일 정도로 방해물이 없다.

특히 열차 맨 뒷 칸에서 달려온 철로를 바라보노라면 영화 '박하사탕'의 한 장면, 필름을 거꾸로 돌리던 풍경이 겹친다. 열차의 이런 장치들은 승객의 '복고심리'를 자극하는데 열차판 '백투더퓨처(Back to the future)'를 만들려는지 객차 안에서 흘러나오는 노래 대부분이 또 5060세대 취향 저격이다.

왁자지껄 수다 떨며 가는 여행길의 낭만은 각자가 만들어낸다. 스스로 돌리는 추억회로에 맥주를 조금 부어주면 백두대간 협곡열차 여행의 비용 대비 만족도는 100%를 넘어선다. 10원짜리 2개 들고 D.D.D로 전화를 거는 1989년의 기억이 객차 창문에 비친다. 가수 김혜림 씨는 단지 영감을 줬을 뿐이다.

생각보다 실내온도가 낮다. 그러므로 난방도구는 각자 체질에 맞게 준비해야 한다. 객차마다 하나씩 난로가 있긴 해도 겨울의 강원도를 지나기엔 역부족이다. 장갑을 끼고 부츠를 신었다면 몰라도 얼마 지나지 않아 손발이 시리다. 그래서들 술을 한 잔씩 하는지도 모를 일이다. 무엇보다 양원역과 승부역에서 한 번씩 10분간 정차하니 용변 부담도 없다. 열차 안에 화장실을 따로 두지 않는다. 20분에 한 번꼴로 정차하는 셈이라 흡연자들이 주먹을 불끈 쥐며 환호한다. 그래봤자 총 1시간 거리다.

백두대간 협곡열차를 타고 양원역에 도착한 관광객들이 10여분간의 정차시간동안 따뜻한 오뎅을 먹거나 지역 특산품을 구입하고 있다.이채근 기자 mincho@imaeil.com
백두대간 협곡열차의 출발역인 봉화군 분천역앞에는 산타마을이 개장돼 관광객들이 겨울여행을 즐기고 있다.이채근 기자 mincho@imaeil.com

◆역, 만나서 반갑다

백두대간 협곡열차는 산타마을로 유명해진 분천역(4.2km, 괄호 안은 두 역간 거리)을 시작으로 비동승강장(2km), 양원역(3.7km), 승부역(17.8km), 그리고 철암역까지 27.7km 영동선 일부 구간을 달린다. 지역민들에게 익숙한 철로인 경부선, 경북선과 달리 지리적 거리감을 주는 철로 영동선이다.

실제 열차의 출발점인 분천역은 경북과 강원의 경계에 있는 봉화군 소천면의 산골마을이다. 2013년 산타마을로 이름을 알리기 전까지 봉화에서도 오지로 통하던 곳이다. 곧 있으면 벚꽃이 만개할 거라는 4월의 일기예보 속에서도 눈발이 날린다는 동네다보니 산타마을이라는 별칭이 어울린다.

그런 분천역에 인공눈이 날린다. 최근 들어 한동안 눈이 내리지 않아서다. 산타마을과 눈은 떼려야 뗄 수 없는 조합이다. 밟을 때마다 뽀드득 소리가 큰 인공눈의 고밀도 질감이 어색할지언정 분천역사는 하얀 눈에 둘러싸여야 제멋이 난다.

느리게 출발한 열차는 10분이 되었을까. 얼마 가지 않아 정차한다. 비동승강장이다. 역이 아니지만 트레킹하는 이들을 내려주고 태우는 곳이다. 비동승강장~양원역 2km 구간을 스위스의 체르마트길에 빗대 '체르마트길'이라 부르며 트레킹 코스로 만들어뒀다.

트레킹 코스 덕에 비동의 한자어 이름(肥洞)을 보기 전까지는 날아갈 만큼 좋은 동네라든지, 날아다니는 것들이 머물러 사는 곳이라든지, 뭔가 날아오르는 곳일 거란 이름일 것으로 생각했다. 막상 직역하니 '거름 동네'다. 땅이 기름져 붙은 이름이라고 한다. 살이 쪄 꽤 퉁퉁한 모양의 '피둥피둥'과 어감이 비슷해 기억에 오래 남는다.

인증샷을 찍으려는 승객을 위해 배려하듯 1분 정도 정차한다. 숨만 고르고 지난다. 그래서 이런저런 먹을거리를 내다 파는 좌판이 없다.

좌석에 앉으려 하니 금세 양원(兩元)역이다. 이것저것 팔려고 내놓은 좌판이 보인다. 10분간 정차한다는 소리에 주변을 둘러본다. 느릅나무, 칡, 생콩가루, 국화, 민들레 사이에 '데추'가 끼어 있다. '대추'의 오기다. 데추를 보니 양원역이 더 반갑다.

철암탄광역사촌 건물 옥상에서 바라본 철암역과 탄광. mincho@imaeil.com
백두대간 협곡열차를 타고 양원역에 도착한 관광객들이 10여분간의 정차시간동안 따뜻한 오뎅을 먹거나 지역 특산품을 구입하고 있다.이채근 기자 mincho@imaeil.com

양원역은 '양'쪽의 '원'곡마을에서 붙은 이름이다. 일제 강점기 때 낙동강을 경계로 원곡마을을 봉화와 울진으로 나누는 바람에 양쪽에 원곡마을이 생겼다. 양원이라는 이름이 나온 배경이다. 열차 외에 다른 교통수단이 없어 마을 주민들이 1988년 '대추 팔아 번 돈'을 모아 직접 역사를 만들었다. 승강장, 대합실, 명판까지 직접 만들었다. 슬레이트 지붕에 아담한 콘크리트 건물이다. 국내 유일의 민간 역사다. 마을 주민들의 자부심은 대형 백화점을 낀 동대구역이 부럽지 않을 기운이다.

부유함이 이어지는 곳이라는 승부(承富)역을 지나 열차가 시속 60km로 속도를 올리면 이내 종착역인 철암역이다. 유일하게 역답게 생겼다.

철암탄광역사촌에는 이전 광부들이 신었던 작업용 신발과 작업복등이 전시돼 있다.이채근 기자 mincho@imaeil.com
'하늘도 세평,땅도 세평'.협곡속에 위치한 승부역에 내린 관광객들이 추억의 인증샷을 찍고 있다.이채근 기자 mincho@imaeil.com

분천역으로 돌아가는 열차 시각까지 40분~1시간 여유가 있다. 승객 대부분은 철암역 바깥으로 나와 탄광촌과 광부들의 흔적이 묻어있는 철암탄광역사촌으로 향한다. 1980년대 후반까지 탄광으로 유명했던 곳으로 지금도 이곳엔 석탄을 고르는 작업장이 있다. 철암탄광역사촌에서 만난 이곳 주민에게 겨울에 추워서 어떻게 지내냐 물으니 여름에 시원한 곳이니 꼭 다시 오라고 했다. 역발상의 우문현답이다.

철암탄광문화장터에는 캐릭터 열차와 라이온 킹,캐릭터 이글루 등 기차여행과 동화의 만남을 주제로 눈조각 작품이 전시돼 있다.이채근 기자 mincho@msnet.com
철암탄광역사촌 건물 옥상에서 바라본 철암역과 탄광. mincho@imaeil.com

◆어떻게 가면 좋을까

대구(매일신문사 기준)에서 분천역(2시간 10분)이나 영주역(1시간 30분)까지 자동차로 가는 방법이 있다. 분천역에서 철암역으로 가는 열차는 하루 5대다. 백두대간 협곡열차는 오전 10시 20분, 오후 1시 52분 두 차례 출발한다.

동대구역에서 출발해 철암역까지 가는 방법도 있다. 오전 6시 출발, 오전 10시 10분 도착 무궁화호 열차다. 백두대간 협곡열차처럼 느리지 않다. 아침 식사를 거르기 힘들고 4시간 이상 열차에 앉아 있기 불편하다면 영주역에서 내리는 것도 고려해볼 수 있다. 오전 8시 18분 영주역에서 내려 인근 식당에서 아침 식사를 하고 오전 8시 50분에 출발하는 백두대간 협곡열차를 타는 것이다. 빠듯하긴 하다.

철암탄광역사촌에는 이전 광부들이 신었던 작업용 신발과 작업복등이 전시돼 있다.이채근 기자 mincho@imaeil.com

물론 분천역과 철암역에는 적당히 요기할 수 있는 식당이 있다. 철암역에서 파는 옥수수빵이나 감자떡으로 간단하게 허기를 면하는 방법도 있다. 제한시간 10분이긴 하나 양원역과 승부역에서는 어묵을 판다.

백두대간 협곡열차는 월요일, 화요일엔 영주역에서 출발하지 않으니 주의해야 한다. 백두대간 협곡열차와 비슷한 중부내륙순환열차가 화요일 낮 12시 26분 영주역에서 출발해 철암을 거친다.

철암탄광문화장터에는 캐릭터 열차와 라이온 킹,캐릭터 이글루 등 기차여행과 동화의 만남을 주제로 눈조각 작품이 전시돼 있다.이채근 기자 mincho@msnet.com

여행사들이 판매하는 상품도 있다. 다만 동대구역에서 출발하는 무궁화호를 타고 분천역에서 내려 백두대간 협곡열차로 갈아탄다. 백두대간 협곡열차가 냉난방에 취약하기 때문이다. 특히 영주역에서 출발하는 첫차는 한기를 품고 있어 오들오들 떨어야 한다는 승객들의 불평 때문이다. 난로만으로 객차 안을 어느 정도 데우려면 1시간 정도 걸리기 때문에 산타마을이 있는 분천역에서 시간을 보낸 뒤 협곡열차에 오르는 방식을 택한다.

어쨌거나 추워도, 속도가 느려도, 운임이 세도 인기는 높다. 주말에는 거의 매진이다. 방학 기간이라 평일에도 매진인 경우가 있으니 미리 확인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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