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제4회 시니어 문학상 논픽견부문 당선작](⑧·끝)노병의 증언/ 김길영

입력 2019-01-07 19:30:00

일러스트 전숙경(아트그룬)
일러스트 전숙경(아트그룬)

▶실종 40여 일

우리 일행 일곱 명은 대구에 도착하여 8사단 보충대에 입소했다. 나와 고향 전우 박준영 외 5명은 횡성 전투에서 실종됐다가 40여 일 만에 8사단 16연대로 복귀한 것이다. 사단 보충대에서는 우리 일행을 데리고 빈 창고로 가서 분사기로 DDT를 뿌려댔다. 머리도 군인답게 잘라주었다. 그리고 온수목욕탕에서 때를 밀었다. 전쟁터 화약 냄새며, 중공군 노린내도 씻어 냈다. 새 군복으로 갈아입고 특별 신체검사를 받았다. 모두 건강에는 이상이 없었다. 40여 일 동안 짐승처럼 마른 풀을 씹어 먹고, 소나무 껍질을 벗겨 먹은 목숨들이었다. 꽁꽁 언 밥솥에 물을 붓고 끓여 허기를 채웠다. 어딘가 모자라거나 병이 생길만했다. 그런데 멀쩡한 군인으로 돌아온 것이다. 우리 부대는 2월 11일 강원도 횡성에서 전면 피습당한 후, 3월 3일 대구에서 재편성하고 강도 높은 훈련을 실시했다.

▶ 부모님 면회

훈련을 마친 2월 말, 우리 8사단은 11사단과 교대하여 지리산전투사령부를 설치하고 공비토벌작전을 펼치기 위해 열차편으로 이동하게 되었다. 경산역에서 잠시 정차하는 동안 역무원을 통하여 고향에 엽서 한 장을 띄우게 되었다. 내가 일선에 있을 때에는 매일 같이 군사우편을 이용하여 소식을 전해드렸으나 포로가 된 40여 일 동안 편지를 띄우지 못했다. 고향집에서는 오매불망 내 소식이 오기를 기다렸을 것이다. 내 편지가 끊기고 소식이 두절되었을 때 후방에서 들은 이야기들은 8사단이 전멸했다는 소문이 돌았다는 것이다. 불길한 소문이 후방에 퍼져가던 차에 내 엽서를 받아 본 우리 가족들은 부리나케 봇짐을 메고 우리 부대가 있는 진주까지 찾아 오셨다. 죽었다고 생각한 아들이 어머니 품에 안긴 것이다. 이때 고향 전우 박준영이도 함께 면회를 했다.

▶연락병

51년 3월 30일. 우리 8사단은 지리산공비토벌에 참가했다. 전주에 사단본부가 주둔하고 10연대는 지리산을 중심으로 서북지역, 21연대는 동부지역, 내가 속한 16연대는 동남부지역인 경남 진주농업시험장으로 가게 되었다. 전주 사단본부와 16연대가 있는 진주와의 거리가 너무 멀어서 전령이 당일 왕복하기가 힘들었다. 지금처럼 장거리 버스가 있는 것도 아니고 군용차량이 수시로 왕래하지도 않았다. 험한 재를 넘어야하는 경우가 많아서 연락업무가 불편했다. 그래서 막중한 연락업무를 당일 처리하지 못했다. 16연대는 전주와 진주 중간 지점인 전라북도 남원에 중간 연락소를 설치하고 전주 사단본부와 진주 16연대를 왕래하면서 연락업무를 수행하게 됐다.

▶부대전방으로 이동하다

51년 5월 19일. 8사단은 지리산토벌작전 중에 강원도 인제 기린면 현리 북방 주저항선으로 긴급히 이동했다. 5월 25일 용포리 일대의 전투에서 일진일퇴를 거듭하면서 북진했다. 연대 CP를 성화리로 이동하고 장기 주둔했다. 우리 연대는 서화면 노전편 전투에서 중공군과 인민군이 합세한 적군과 한 달여 동안 혈전을 벌였다. 유엔군의 전폭기와 동해 함포사격 지원을 받으며 맹공을 가했다. 중공군은 사상자가 많았다. 보급품 수송이 차단되고 전세가 불리해지자 소련이 유엔을 통하여 51년 7월 10일 휴전회담을 요청해오고 개성에서 회담을 개최한 바 있었다.

51년 9월 22일. 16연대는 4개월간 혈투를 거듭하던 인제 작전을 다른 사단에게 인계하고 양구 고방산 전투에 투입되었다. 이곳에서는 중공군 패잔병과 인민군혼합부대와 약 2개월 간 공방전이 벌어졌는데, 결국 기세를 꺾어 놓는데 성공했다. 우리 부대는 2개월간 사수한 양구지역을 또 다른 사단에게 넘겨주고 우리 부대는 춘천으로 이동했다. 소양강변 백사장에 주둔하면서 부대 점검에 들어갔다.

▶다시 지리산공비토벌작전

51년 9월 26일. 우리 부대는 다시 지리산공비토벌작전명령을 받았다. 춘천에서 서울. 서대전. 전주를 거쳐 남원에 도착했다. 남원농림학교 후방에 CP를 두고 28일 임실군 갈평리를 통과해서 어느 냇가에 전방 CP를 설치하고 작전준비에 들어갔다. 16연대 작전지역은 임실. 순창. 담양. 장성 일대의 지역으로 작전범위가 매우 넓었다. 지리산 동남부를 총괄하는 범위였다. 밤이 되면 공비들이 부락으로 내려와 식량을 약탈하고 방화 후, 짐을 싣고 도망치면서 부녀자를 납치하는 만행도 저질렀다.

51년 12월 1일을 기해 정부군 2개 사단과 전투경찰대를 총지휘하는 야전사령관에 백선엽 소장을 임명하고 지리산 공비소탕작전에 총력전이 시작되었다. 이 작전으로 공비사살 438명, 생포 528명의 전과를 올렸다. 이로써 4개 군 지역의 주민들에겐 평화를 되찾게 하였다.

52년 2월 5일. 우리 16연대는 2차 지리산토벌작전을 마치고 다시 정읍을 출발하여 청량리에 도착 했다. 수송부대 차량으로 포천군 오점포에서 6주간 강도 높은 훈련을 받았다. 그리고 포천에서 인제군 서화면으로 부대 이동했다.

52년 5월 30일. 당시 서화초등학교 운동장에 연대본부를 설치하고 대형 천막 10동을 세웠다. 그리고 16연대는 52년 8월부터 인제군 서화면 가전. 대왕산 전투에서 요충지 확보를 위해 격렬한 전투가 연일 이어졌다.

▶수도고지

52년 9월 23일. 16연대가 김화전선으로 이동했다. 우리가 맡고 있는 수도고지에서 중공군은 하루 6백여 발의 포사격을 퍼부으며 공격해 왔다. 고지를 빼앗기고 되찾기를 열네 번이나 거듭하다보니 산은 민둥민둥해졌다. 그만큼 쌍방 간 병력 손실이 컸음을 말해 주는 것이다. 아군은 휴전협정이 임박해지자 한 치의 땅이라도 빼앗기지 않으려고 결사적으로 방어를 했다.

53년 7월 초순. 중공군과 인민군 합동 대공세에 밀려 수도고지를 포기하고 20킬로미터나 후퇴했다. 김화읍 금곡. 방통 북쪽으로 이동한 것이 지금의 휴전선으로 53년 7월 27일 판문점에서 휴전협정이 이루어졌다. 나는 휴전협정이 이뤄지기 약 4개월 전에 의병제대 했다. 이 땅에 다시는 전쟁이 발발해선 아니 될 일이다. 나와 같이 평생을 전쟁의 기억 속에 살고 있는 병사가 없기를 바라는 마음 간절하다.

이규락

1950년 8월 30일 입영 ~ 1953년 4월 1일 전역(의병제대)

군번: 0141497

병과: 100

계급: 육군하사

*1951년 2월 12일 횡성 전투에서 실종~1951년 3월 22일 귀대

<1월15일 자 시니어문학상 면에는 논픽션 당선작인 김영숙 '열망' 이 게재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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