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0년대 말에 등장해서 몇 년간 세계 팝팬들의 감성을 휘어잡았던 밴드가 있다. 심플리 레드다. 이들의 몇 곡 없는 히트넘버 가운데 '지나간 해를 붙잡고' (Holding back the years)는 한국에서도 꽤 알려졌다. 이 무렵이면 누구나 한 해를 어떻게 보냈는지 감정이 복잡해진다. 누가 사교적인지 아닌지를 알려면 제야의 종소리를 어디서 듣는지 살펴보면 된다. 난 컴컴한 집에서 혼자 새해를 맞는 일이 많았다. 몇 번의 예외가 있긴 했는데, 대학 다닐 때 친구들과 어울려 시내 술집에서 포도주를 마신 적이 있었다. 새해맞이 카운트다운도 없던 그곳은 한 없이 지루했다. 친구들 이야기는 집중 안하고 내가 물끄러미 봤던 조명등은 지금도 기억 속에 남아있다. 이젠 딱히 신기할 것도 없지만, 색이 계속 바뀌는 등을 본 건 난생 첨이었다. 그때 흘러나오던 음악이 '지나간 해를 붙잡고'란 건 당연한 사실이고.
최은혜의 작업도 미묘한 색의 변화를 짚어낸다. 정육면체로 된 상자 더미 속에 LED로 짐작되는 광원이 색을 발하는 입체작업은 사랑스럽다. 또박또박 잘 쓴 글씨체를 볼 때 드는 쾌적한 느낌은 몬드리안이나 홍승혜가 재구성한 세계의 질서를 통해 우리에게 익숙한 것이다. 하지만 입체 작업도 그렇고, 회화를 통해 작가가 보여주는 색의 부드러운 대비와 나열은 상당히 독특하다. 하늘의 무지개와도 비교할 수 있는 그 아름다움은 색과 빛이 미세하게 바뀌는 찰나의 포착에서 비롯된다. 색의 파장이 길고 짧거나 온도가 높고 낮거나 그 물리적인 상태가 우리를 환기시키는 기억은 다양하다. 이 모든 경이로움은 작가의 시각과 인지 속에서 생긴 몽환적이고 강박적인 이미지에서 시작된다.
그냥 혼자 생각인데, 최은혜가 펼친 '기억의 온도'는 나처럼 이해력이 떨어지는 사람은 쉽게 파악할 수 없는 이미지를 파악하기 어려운 설명으로 방어하는 것 같은 전시다. 작가노트를 읽으면 의미는 추측이 되는데, 중복되는 수식과 중립적인 명제는 많은 미술이론가들의 안쓰러운 글처럼 좋은 작품 해석을 방해한다. "아니, 이렇게 감각적인 작품과 논리적인 설명 앞에서 눈만 껌뻑이는 윤규홍 당신은 자격미달이군요."라고 작가가 내게 뭐라 할 것 같다. 어쩔 수 없다. 몇 가지 원칙은 작가가 밀어붙였으면 좋겠다. 더 단순하고, 더 힘을 빼고, 운율에 감각을 싣고, 자신의 이야기를 보여줄 것.
윤규홍 (갤러리분도 아트디렉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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