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종문 계명대 한문교육과 교수
사람도 새떼들도 다 끊이고 없는 산길 山徑無人鳥不回(산경무인조불회)
어둑어둑 찬 구름에 쌓여 있는 외딴 마을 孤村暗淡冷雲堆(고촌암담냉운퇴)
유리알 같은 세계 뽀득뽀득 밟고 가서 院僧踏破琉璃界(원승답파유리계)
쿵- 쿵- 얼음 깨고 물을 길어 오는 스님! 江上敲氷汲水來(강상고빙급수래)
이 시를 지은 북창(北窓) 정렴(鄭石+廉:1506-1549)은 매월당 김시습, 토정 이지함과 함께 조선시대의 3대 기인으로 불리는 인물이다. 그는 유·불·도 삼교는 물론이고, 천문과 의술, 음률과 점술에 정통했으며, 산수화와 시문에도 일가를 이룬 사람이었다. 뿐만 아니라 중국어 회화와 풍수지리에 각별한 조예가 있는데다, 금강산 꼭대기에서 한바탕 신명나는 휘파람을 불면 그 우렁찬 휘파람소리가 골짜기마다 장엄하게 메아리쳤다는 휘파람의 명수이기도 했다. 워낙 팔방미인이다 보니 무수한 전설이 곁들여져서, 허구와 사실이 뒤범벅이 되어버린 안개 속의 인물이기도 하다.
그러나 이 희대의 천재의 삶은 아버지를 잘못 만나 아주 시퍼렇게 멍이 들고 말았다. 그의 아버지는 을사사화의 주역인 정순붕(鄭順朋). 알다시피 그는 무고한 선비들을 죽이고 귀양 보낸 흉악하고 파렴치한 사람이었다. 정렴은 서슴없이 악행을 자행하는 아버지의 옷자락을 잡아당기며, '동작 그만'을 눈물로 하소연했다. 하지만 아버지는 오히려 자신이 하는 일에 방해가 된다면서 이 착한 아들을 죽이려고 했다. 아들은 아버지와 결별하고 세상 밖으로 뛰쳐나갈 수밖에 없었다. 위의 시도 정렴의 그와 같은 삶이 빚어낸 정서적 등가물의 성격이 짙다.
작품 속의 검단사 일대는 지금 엄청난 폭설 상태다. 폭설로 인하여 모든 움직임이 정지되어버렸고, 외딴 마을에는 구름더미들만 싸늘하게 쌓였다. 시간조차도 '일단정지' 신호에 걸려버린 절집에는 천근의 고요 만 근의 고요가 적막하게 도사리고 있을 뿐이다. 바로 그 고요 속에서 어디선가 들려오는 뽀득뽀득, 뽀드득, 뽀드득 소리. 새하얗게 눈 덮인 유리알 세계를 사뿐사뿐 밟고 물 길러 가시는 스님의 착하신 발자국 소리다. 이윽고 우주 전체를 공명통 삼아 장중한 메아리로 울려 퍼지는 쿵- 쿵- 쿵- 쿵- 겨울 강의 얼음 깨는 소리, 첨벙첨벙 바가지로 물을 길어서 뽀드득 뽀드득 되돌아가는 소리. 그리고 나면 절집은 다시 만 근, 십만 근의 고요 속이다.
혹시 들리는가? 바로 그 고요 속에 꼼지락거리는 보글보글 찻물 끓이는 소리, 도란도란 이야기 나누는 소리! 그 소리 속에 엎드리고 있는 백만 근, 천만 근도 훨씬 넘는 고요!
댓글 많은 뉴스
"尹 지지율 46% 나와…2030 지지율도 40%대 ↑"
박수현 "카톡 검열이 국민 겁박? 음주단속은 일상생활 검열인가"
'카톡 검열' 논란 일파만파…학자들도 일제히 질타
이재명 "가짜뉴스 유포하다 문제 제기하니 반격…민주주의의 적"
판사 출신 주호영 국회부의장 "원칙은 무조건 불구속 수사…강제 수사 당장 접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