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년 표구작업 배첩명장 이현식 씨

입력 2018-12-19 10:17:50 수정 2018-12-19 11:06:29

배첩명장 이현식 씨가 대구에 있는 한 대학이 의뢰한 대방광불화엄경 서적을 보수 처리하고 있다.
배첩명장 이현식 씨가 대구에 있는 한 대학이 의뢰한 대방광불화엄경 서적을 보수 처리하고 있다.

족자, 액자, 병풍 등으로 잘 마무리된 문인화나 서예 작품은 보는 이에게 작품의 품격을 높일 뿐 아니라 원래 작품이 품은 작가의 의도나 특이성을 더욱 도드라지게 하는데 한몫을 한다. 이것이 바로 배첩(褙貼)이 지닌 아우라 즉 '예술작품에서 흉내낼 수 없는 고고한 분위기'이다.

배첩을 파자처리하면 '등(背)에 옷(衣)을 입힌다(貼)'가 된다. 따라서 글씨나 그림에 종이와 비단을 붙여 족자, 액자, 병풍 등의 형태로 만들어 작품의 심미성은 물론 실용성과 보존성을 높여주는 전통적인 서화처리법이 배첩이다. '표구'(表具)란 일제강점기에 들어와 보편화된 말이다.

대구에서 43년째 배첩 일을 해온 예전표구사 이현식(62) 씨는 문화재 수리 기능보유자로 올 10월부터는 예전배첩연구소도 운영하고 있는 배첩명장이다.

"완전히 떨어져 나간 책 표지를 거의 원형에 가깝게 복원하자면 한지 한 장 한 장의 두께 편차까지 고려해야 합니다. 옛 한지의 두께는 요즘 것보다 더 얇기 때문에 무척 섬세한 손작업이 요구됩니다."

이 배첩명장이 복원한 서책.
이 배첩명장이 복원한 서책.

간찰, 고서, 탱화, 괘불, 서화류 등 문화재를 복원 작업할 때는 특히 원형보존에 최대한 노력하는 것이 관건이다. 미세 솔을 이용해 표지나 책장의 이물질을 제거하고 물을 뿌려 다시 더 작은 이물질과 때를 씻은 후 해당 문화재와 맞는 한지를 주문하고 이를 문화재 색과 맞춰 염색하는 '색맞춤' 공정을 거쳐 찢겨진 부분을 메우는 작업을 한다. 이때 한지의 두께는 거의 mm 단위까지 정밀보수가 이뤄진다. 게다가 이 명장은 한지제작 공정에서 한지를 뜰 때 생기는 발의 촉수까지 맞춰 주문해서 사용하고 있다.

시인 이육사'구상 시집 보수, 용봉사 영산회괘불탱화(보물 1262호), 임고서원 정몽주 진영, 은해사 극락보전 칠성도, 축서사 괘불탱(보물 1379호) 보존처리 등이 이 명장에 의해 새롭게 태어난 대표적 문화재들이다.

이 명장은 고교 졸업 후 "너는 손재주가 있으니 배첩일을 배우면 먹고 사는데 지장은 없을거다"는 숙부의 말에 1975년 당시 대구 소림당 표구사에서 이 일을 배우기 시작했다. 이후 더 나은 기술을 익히려 서울 인사동 묵운당 표구사에서 2년간 도제수업을 받고 1978년 대구 봉산동에서 개업했다.

일반적으로 병풍과 족자 제작은 한지와 물, 풀, 비단 등을 이용해 이뤄진다. 맨 먼저 작품에 물을 뿌려 활짝 편 다음 한지 한 장을 덧붙이게 되는데 이를 1차 배접이라고 한다. 이때 사용하는 풀은 보통 7년 이상 삭힌 것으로 끓여서 쓴다. 이유는 풀 속 밀가루에 있는 철분과 미네랄 등을 먹이로 하는 벌레가 생기기 때문인데 이를 제거하기 위한 과정이 풀을 오랫동안 삭혀 벌레 제거와 접착력 향상을 도모하기 위해서이다. 풀은 오래 삭힐수록 접착력과 보존성이 뛰어난다.

1차 배접을 한 후 약 24시간 건조시킨 후에 비단을 이용해 2차 배접을 하면 족자는 완성된다. 액자의 경우 틀에 작품을 확실히 부착시키기 위해 한지를 한 번 더 덧대는 2차 배접을 하는 것이 족자와 다르다.

"70년대와 80년대 국전공모전이나 대구시미술전이 열릴 때면 납품기일을 맞추기 위해 3, 4일씩 밤샘작업이 예사였죠. 또 추석과 설 명절엔 병풍을 제작하거나 보수하는 물량이 밀려 힘이 들어 그만 둘까 생각한 적도 있었죠. 지금 생각하면 행복한 비명이었고 보람도 많았던 시절이었습니다."

실수도 있었다. 특히 서예 작품이 전서(篆書)인 경우 글씨모양이 좌우대칭이거나 획의 굵기도 같은 특징 때문에 작품을 거꾸로 배첩하는 경우가 더러 있었다. 또 당시 한지는 아주 얇아 비침 현상이 있어 작업 중 찢어지거나 좌우가 바뀌는 사건(?)도 있어 전 공정을 해체하고 다시 작업하는 경우도 잦았다.

세월이 흘러 배첩 40여 성상. 이 명장이 제작한 굵직한 배첩 작품만도 수를 헤아리기 어려울 정도이다. 미국 뉴욕 원각사 소장 '보현행원품 24곡 병풍', 독립기념관 소장 '독립선언문 36곡 병풍', 구미 남화사 소장 '대방광불화엄경 60곡 병풍', 공산예원 소장 '묘법연화경 168곡 병풍' 등이 이 명장의 손을 거쳤다.

현재 이현식 명장은 명장의 반열을 넘어 배첩 최고의 영예이자 무형문화재인 '배첩장'이 되기 위해 꾸준히 노력하고 있다. 현재 우리나라 배첩장은 2명인데 이 명장은 충북 청주에 있는 홍종진 씨로부터 기술을 이수 받았다. 또 이 명장의 아들 상권(34'한국전통문화대 문화재보존처리학과 대학원 수학) 씨가 3년째 이 명장의 기술을 전수받고 있다.

글 사진 우문기기자 pody2@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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