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월읍내는 영화 라디오스타의 통무대
충북, 강원, 경북의 교집합 지점
첩첩산중의 지역 강원도 영월은 남한강의 시작인 동강과 서강이 만나는 곳이다. 물이 돌아가는 곳이 많아 절경을 뽐내는 곳이 강물을 따라 곳곳에 자리 잡았다. 자연이 준 선물을 갖고 있어 평화롭기 그지없는 곳이지만 가슴 아픈 이야기가 많아 애처로운 곳이기도 하다.
임진왜란의 고종원과 계유정난의 이홍위가 난리를 피해 스스로 혹은 강제로 발들인 곳이 영월이었다. 그들의 흔적은 오늘의 영월을 불러온 주요 관광지가 됐다.

◆고씨동굴
비보부터 전해야겠다. 이달 21일까지 휴장이다. 그런데 더 추울 때 갈수록 좋다. 동굴 내부 온도는 영상 15도 안팎을 유지한다. 670m 남짓 거리의 동굴 내부를 보고 나면 계절에 상관없다는 생각이 절로 든다. 가다 서다는 물론이고 철제계단을 무수히 오르고 내려야 한다. 땀이 뻘뻘 난다.

단양 고수동굴과 이름이 비슷하다. 헷갈리는 사람이 부지기수다. 고씨동굴에 다녀왔다면서 단양 이야기를 한참 한다든지, 고수동굴을 봤다면서 칡국수를 꼭 먹으라는 사람들이 더러 있다. 명확한 구분을 하고 싶다면 다리를 건너갔는지 확인하면 된다.
고씨동굴 앞으로는 제법 폭이 넓은 물이 흐른다. 얕은 물이 아님에도 강바닥이 다 보인다. 시리도록 맑다. '동강인가 보다'라며 혼잣말 같은 물음을 던지니 고씨동굴 앞에 있던 시설관리공단 직원이 남한강이라고 수정해준다. 지도를 살펴보니 남한강 상류다.
50년 전 천연기념물로 지정됐다. 88번 지방도 서쪽에 태화산이 있는데 이곳에 꽤 깊이 파인 굴이다. 원래 이름은 노리곡 석굴이었다고 한다. 고종원(1538~?)이라는 선비 일가가 임진왜란 당시 왜군을 피해 이곳에서 지냈다는 일화가 있다. 동굴 이름 '고씨동굴'의 유래다. 동굴 초입에서 얼마 가지 않아 거실처럼 제법 넓은 공간이 나온다. 동굴 안에 물도 있고 실내 온도도 10도 이상을 유지하니 최소한의 생활은 가능했으리라 짐작한다.

그러나 이곳에서의 생활은 길지 못했고 비극적으로 마무리된다. 왜군은 너구리 사냥하듯 이곳 입구에 연기를 피워 이들을 쫓았다고 한다. 조선 임금 선조를 잡기 바빠 조령을 택했던 왜군이 왜 이곳 동굴까지 샅샅이 훑었던 것일까. 의병이 이곳에 숨어 지냈기 때문으로 짐작한다. 전설이 아니라 '팩트'다. 고씨동굴의 주인공인 고종원이 살아남아 1592년 4월 20일 임진왜란이 일어난 직후부터 9월 6일까지의 기록을 남겼다.
고씨동굴을 비롯한 영월의 비경은 지형과 관련이 있다.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고생대 퇴적암 지대라서다. 여기에 동강, 서강, 그리고 둘이 합쳐진 남한강 물길까지 도와주니 어디든 절경이다. 진작에 강원도 영월, 정선, 태백, 평창 일대는 '강원 고생대 국가지질공원'이란 이름의 벨트로 묶였다. 고생대 퇴적암류와 더불어 하천지형과 카르스트지형이 발달해 학술적으로도 중요한 곳이기 때문이다. '강원 고생대 국가지질공원' 21곳 중 8곳이 영월에 있다. 고씨동굴을 비롯해 선암마을 한반도 지형, 동강의 어라연과 선돌 역시 영월이 자랑하는 풍광이다.
◆청령포와 장릉

1457년 유배 교서를 받고 궁을 나섰던 노산군 이홍위(단종)가 일주일 만에 도착한 곳은 청령포였다. 당최 이런 섬 같은 육지가 있으리라 상상이나 했을까. 소나무가 빽빽하게 뻗어 얼핏 보면 비경으로 보이나 안으로 들어가 보면 서쪽에 육육봉이 100m 가까운 높이로 우뚝 솟았고 나머지 면은 강물(서강)이 둥글게 둘러쌌다. 나룻배를 이용하지 않고는 들어갈 수 없는 곳이다. 노산군이 궁에서 수영을 배웠다면 모를까 헤엄쳐 바깥으로 나오기란 불가능했다. 영월군도 그 심정을 느껴보라는 의미인지 지금껏 다리를 설치하지 않았다.

청령포에 오기 1년 전, 왕위를 삼촌 수양대군(세조)에게 넘기며 그가 기대한 것은 '살육없는 평화'였을 것이다. 1453년 자신의 수호천사들이 줄줄이 죽어나간 계유정난은 그에게 트라우마로 남았을 것이다. 수양대군을 비롯한 그 당시 정변의 주역들을 마주하기란 더 큰 고역이었을 것이다. 영화 '관상'을 통해 계유정난을 이해하는 이들도 적잖은데 큰 흐름은 어느 정도 사실과 일치한다.

노산군이 창살없는 감옥, 청령포에서 그가 지낸 기간은 두 달 남짓이었다. 세조실록에는 이 기간 임금이 갖은 노력을 다해 노산군을 챙겼다고 기록돼 있다. 여름에 덥다며 얼음이 끊이지 않도록 하고, 참외나 채소 등을 보내고, 가뭄으로 인하여 금주령을 내렸지만 노산군에게는 술을 보내라는 식이다.
압권은 금성대군에게 사약을 내린 부분이다. 단종 복위에 나섰던 금성대군에게 사약을 내리자 노산군이 자결했다는 대목이다. 예를 갖춰 장사를 지냈다고 돼 있다.
조선의 사관을 믿을 것인지 야사를 믿을 것인지 아리송하다. 왜냐하면 야사를 정설로 봐야 청령포와 장릉의 이야기가 자연스럽게 연결되며 훨씬 설득력이 있다. 야사는 이렇다.
단종이 유배된 지 두 달 만에 홍수가 나 관풍헌으로 거처를 옮겼다. 이후 얼마 지나지 않아 사약을 받게 되는데 이즈음이 금성대군에게 사약을 내린 시기다. 단종은 사약을 거부했다. 그러자 단종을 살해하면 상을 받으리라 생각한 한 하인이 단종의 목을 졸라버렸다는 것이다. 단종의 죽음과 관련해서는 여러 설이 있으나 이것이 야사 중 정설로 꼽힌다.

죽음 이후에도 누구도 시신을 수습하지 않았다. 그때 엄흥도(嚴興道)라는 사람이 강물에 떠도는 단종의 시신을 수습해 몰래 묻었다. 시신 수습 후 후환이 두려웠던 엄흥도는 매장을 마친 뒤 숨어 지냈다고 한다. 단종의 시신이 매장된 곳이 청령포에서 7분 거리에 있는 장릉이다.
엄흥도는 노루가 앉아있던 자리를 묫자리로 썼다고 하나 실제로는 아무도 찾지 못할 곳이었다. 옛 지도인 해동지도 영월부에는 산에 겹겹으로 둘러 싸여있는 장릉이 나오는데 이곳을 찾아낸 게 신기할 정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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