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 MC 송해, "내 고향 북한 황해도 재령서 '전국~!' 외칠 때까지 MC할 것"

입력 2018-12-03 12:39:10 수정 2018-12-03 16:55:41

고향 땅 북한 황해도 재령에서 전국노래자랑을 진행하는 것이 마지막 소원이라고 말하고 있는 송해.박노익 기자 noik@msnet.co.kr
고향 땅 북한 황해도 재령에서 전국노래자랑을 진행하는 것이 마지막 소원이라고 말하고 있는 송해.박노익 기자 noik@msnet.co.kr

송해는 고향 땅 북한 황해도 재령에서 전국노래자랑을 진행하는 것이 마지막 소원이라고 했다. 박노익 기자 noik@msnet.co.kr
송해는 고향 땅 북한 황해도 재령에서 전국노래자랑을 진행하는 것이 마지막 소원이라고 했다. 박노익 기자 noik@msnet.co.kr

전국노래자랑의 주인공은 출연자라고 말하는 송해.
전국노래자랑의 주인공은 출연자라고 말하는 송해.

송해는 결혼 63년이 지난 2015년에야 아내에게 면사포를 씌워줬다.
송해는 결혼 63년이 지난 2015년에야 아내에게 면사포를 씌워줬다.

할아버지 같은 푸근한 모습으로 전국노래자랑을 31년째 진행해오고 있는 송해를 우리는 '국민 MC'라고 부른다. 많은 시청자들이 매주 일요일 낮 12시 10분에 방송되는 '전국노래자랑'에서 그의 말 한마디에 울고 웃기 때문이다. 올해 92세인 송해는 자신은 단 한 번도 전국노래자랑의 주인공이라고 생각한 적이 없다고 했다. "전국노래자랑의 주인은 여러분이다. 즐거움을 만드는 것은 여러분들이고 자신은 그걸 받아서 전하는 사람일 뿐"이라며 겸손해했다. 그는 고향 땅 북한 황해도 재령에서 전국노래자랑을 진행하는 것이 마지막 소원이라고 했다. 지난달 29일 서울 종로3가 원로연예인 사랑방에서 그를 만났다.

◆1·4후퇴 때 "이번엔 조심해라 그게 어머니의 마지막 말씀"

송해는 1927년 4월 27일 황해남도 재령에서 태어났다. 본명은 송복희(宋福熙), 위로 형님과 아래로 누이 동생이 있었다. 1949년 해주예술전문학교 성악과를 졸업했다. "어릴 때 골목대장을 할 정도로 끼가 다분히 있어 어려운 살림에 어머니가 아버지 몰래 쌀을 팔아 학교에 보내줬다"고 회고했다.

송해는 예술을 체제선전 도구로 이용하는 것이 싫었다. 그래서 월남을 결심했다. 남한으로 내려가 있다가 안정되면 다시 고향으로 돌아올 요량으로 친구 6명과 함께 집을 나왔다. 집을 떠나는 그에게 어머니는 "이번엔 조심해라"고 당부했다. 그게 마지막이었다. 송해는 "이 목소리가 지금도 어려운 일을 당할 때면 귓가에 아련히 들려온다"고 했다.

그는 해주에서 배를 타고 연평도에 도착해 정박해 있는 UN군 화물선을 타고 3일 만에 부산에 도착했다. "배 위에서 3일동안 바닷물로 밥을 지어 먹었다"고 했다.

바로 군에 입대해 암호를 해독하는 무선통신병이 멋있어 보여 통신병에 지원했다. 통신병으로 군복무를 하면서 '1953년 7월 27일 22시를 기해 모든 전선에 전투를 중단한다'라는 내용이 담긴 휴전 전보를 자신이 직접 쳤다고 말했다.

대구에서 근무할 때 현재 아내를 만났다. 쉬는 날이나 휴가 때 갈곳이 없었다. 직속 상관이었던 손위 처남이 자신의 집으로 데려갔다. 1952년 어느날, 여동생을 소개해줬는데, 그 여성이 바로 아내 석옥이(2018년 1월 타계)였다. "결혼식도 못했다. 63년이 지나 2015년에야 면사포를 씌워졌다. 많이 미안했죠." 그 대목에서 송해는 눈시울을 붉혔다.송해는 군복무 중 군예대(KAS)에서 활동했다. 이후 1955년 창공악극단에서 가수로 정식 데뷔했다. "그때 단원들은 말 그대로 모두 탤런트였다. 노래는 기본이고 연기, 코미디, 분장 등 1인 3, 4역을 해야 밥을 먹을 수 있었다"고 말했다.

◆"전국노래자랑은 공부하는 프로그램"

전국노래자랑이 곧 송해이고, 송해가 곧 전국노래자랑이다. 1980년 첫 전파를 타기 시작한 전국노래자랑은 초대 MC 이한필을 시작으로 이상용, 고광수 아나운서, 최선규 아나운서 등을 거쳐1988년 5월 현MC 송해가 마이크를 잡게 되었다. "제가 맡아 1994년에 5개월 정도 자리를 비웠을 뿐 30년 넘게 지켜왔으니 제 분신과도 같은 프로"라고 했다.

송해는 1988년 당시, 라디오 프로 '가로수를 누비며'라는 교통정보 방송을 진행하고 있었는데, 전국노래자랑을 진행하는 PD가 함께해보자는 제의를 해왔다. "당시 아들을 교통사고로 잃어 더 이상 방송에서 '교통안전 지킵시다'라는 말을 못 하겠더라고요. 그래서 그만두고 승낙했다"고 말했다.

송해는 큐시트만 갖고 진행을 하지 않는다. 녹화 지역이 지방이면 하루 전에 그 지역으로 내려가 가 장터에서 국밥도 먹고 목욕도 하는 등 지역 주민과 이야기를 나눈다고 했다. 그 지역을 잘 알기 위해서다. 그리고 다음 날 오후 1시부터 시작되는 녹화지만, 송해는 오전 8시면 현장에 도착한다. 보통 9시부터 시작되는 리허설을 꼼꼼히 살펴보고 참가자들과 교감하기 위함이다. 송해는 "참가자들 만나서 오늘 어떤 노래를 할지도 물어보고 재밌는 이야기도 해주고 안정시켜놓아야 한다. 무대에 오르면 생각했던 것도 잊어버린다. 마음 놓고 놀게 해야 재밌는 게 나온다"고 말했다.

지역색도 뚜럿하다고 했다. "프로그램은 영호남이 살린다. 한마디로 화끈해요. 충청도는 한 템포씩 늦고, 강원도는 가만히 계산했다가 확 들어오고, 경기도와 서울은 깍쟁이 같다"고 나름대로 분석했다.

송해는 전국노래자랑은 우리의 삶이 묻어나는 프로그램이라고 했다. "어린 아이도 나오고 90대 어르신도 나온다. 또 직업의 높낮이가 없다. 똑같은 자격으로 나와서 실력 발휘하고 들어간다. 생선장수나 국회의원이 나와도 다 똑같은 자격이다. 높다고 봐주지 않는다. 나와서 수많은 관객들을 웃기고 감동을 주고 그런 사람이 이 프로그램의 스타다. 덕분에 난 영원히 공부하는 사람이 됐다"며 특유의 털털웃음을 터뜨렸다.

◆"고향서 '전국~!' 외칠 때까지 MC할 것"

송해는 고향 황해도 재령에서 '전국노래자랑'을 진행하는 것이 소원이라고 했다. "내 고향 연백평야에서 생산되는 쌀을 유명하다. 쌀이 너무 기름져 밥을 지으면 파리가 안질 못한다는 우스갯 소리도 있다"며 연신 고향을 늘어놓았다.

송해는 어머니 이름만 나와도 눈시울을 붉혔다. "세월이 오래 돼 어머니 얼굴도 가물가물하고 가족들 생사도 모른다. 만일 세상을 떠나셨다면 무덤 앞에 가서 절이라도 한 번 해야 할 것 아닌가. 남아 있는 식구들이 있다면 그동안 살면서 나누지 못했던 정도 나눠야 한다"고 했다.

그러면서 최근 급진전되고 있는 남북 관계에 다시 희망을 꿈꾼다고 했다. 그래서 고향에서 '전국노래자랑'이 열리는 그 날까지 진행하겠다고 했다. 고향에서 '전국노래자랑'이 열린다면 오프닝을 어떻게 하겠느냐는 질문에 "'고향에 계신 여러분. 복희가 왔습니다'라고 말해야 하는데 아마 몇 분 동안 말을 못 이을 것 같다"며 말끝을 흐렸다.

끝으로 송해는 전국노래자랑 후임 MC에 대해 "하고 싶어하는 후배들이 많다. 그러면 50년 후에 물려준다고 농담하곤 한다"며 껄껄 웃었다.

(박스)◆송해코메디박물관

송해는 달성군을 제2의 고향이라고 했다. "달성군 옥포는 처가가 있다. 그곳에 올 1월에 세상을 떠난 아내의 무덤이 있고, 그 옆에 내 가묘도 있다. 군생활도 대구에서 했고, 아내도 만나는 등 대구과는 인연이 있는 것 같다"고 했다.

달성군은 2016년 송해의 처가가 있는 달성군 옥포면 옥연지 인근에 송해공원을 조성했다. 송해공원은 연간 60만 명의 관광객이 찾아오는 등 관광 명소로 부상하고 있다.

달성군은 송해공원 내에 송해코미디박물관(가칭)을 건립하기로 하고 현재 전시할 소장품을 모으고 있다. 박물관에는 '방송인 송해'의 60년 활동과 '인간 송해'의 면모를 알 수 있는 자료를 전시할 계획이다. 한켠에는 우리나라 대중문화를 이끈 여러 예술인의 소장품을 전시할 우정관도 마련된다. 송해는 "고마운 일이다. 현재 다방면으로 자료를 모으고 있다. 어느 정도 모이면 달성군에 전달하겠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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