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경철이 만난 사람] 최염 경주 최씨 중앙종친회 명예회장

입력 2018-11-21 07:09:15 수정 2018-11-21 20:37:59

최염 경주 최씨 중앙종친회 명예회장. 매일신문 DB
최염 경주 최씨 중앙종친회 명예회장. 매일신문 DB

구세군 종소리가 울리고, 사랑의 온도탑이 만들어진다. 부자들의 역할이 어느 때보다 큰 계절, 겨울이 다가온 것이다. 나누고 베풀면 모두 함께, 더 잘 살 수 있다는 것을 깨닫는 시기다.

겨울의 초입, 나눔의 정신을 가장 잘 실천했던 것으로 잘 알려진 경주 최부잣집의 후손을 만났다. 최염(85) 경주 최씨 중앙종친회 명예회장이다. 기자의 성(姓)이 최 명예회장과 같다고 해서 오해는 마시라. 기자와 경주 최 부잣집은 아무런 연관이 없다.

300여 년 동안 부(富)를 일궈오면서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실천한 대표적 부자 집안인 경주 최 부잣집. 최 명예회장은 최 부잣집의 마지막 거부(巨富)였던 최준의 손자로, 경주 최 부잣집의 정신을 전파하는 데 노력을 쏟고 있다. 그는 "절대로 자기 혼자 잘 살 수 없는 것이 바로 이 세상"이라고 했다. 함께 살아가는 고민을 부자들이 해야한다는 것이다.

경주 최부잣집의 마지막 부자였던 자신의 할아버지(최준)가 거의 모든 재산을 지역 인재 육성을 해야한다며 대학 설립을 위해 기부하는 바람에 최 명예회장은 재산도 거의 물려받지 못했다고 했다. 하지만 최 명예회장은 원망을 절대 안한다고 했다. '함께 살기'에 매진했던 최 부잣집의 정신을 이어받은 것만 해도 대단한 것을 물려받았다는 것이다.

-경주 최 부잣집은 어떻게 부자가 됐나?

▶내 11대 조인 국선 할아버지 때부터 부를 일궜다고 한다. 그 전엔 큰 부자가 아니었다. 당시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겪고 나서 국토가 황폐화됐다. 나라가 개간을 장려했고 개간한 토지에 대해 면세혜택 등 요즘 말로 하면 인센티브를 줬다.

땅을 개간하고 모내기를 통해 쌀농사를 짓는 새로운 영농기법을 당시 우리 집안에서 개발했다. 냇가에 나무를 이용해 차단막을 설치해 물을 확보, 무논에 직파를 하는 방법이 아닌 모내기 기법을 통해 쌀농사를 지었다. 이른바 농업기술혁명이었다.

직파를 하던 방법에서 탈피해 모내기를 하니 수확량이 직파 때보다 5, 6배나 늘어났다. 자연조건도 도와줬다. 형산강 상류여서 물 확보가 쉬웠다. 수량 확보가 쉬운 곳에서 이앙법을 도입하니 쌀 수확량이 급증했다. 국선 할아버지는 부농이 됐다. 당시 100마지기 정도 수확량을 올리면서 부자가 됐다고 한다.

-갑자기 부자가 되면 시기·질투도 많고, 임진·병자 양란 이후라서 민심도 흉흉했을텐데 재산을 잘 지킬 수 있었나?

▶당시 소작농에 대한 착취가 대단했다. 소출의 대부분을 지주가 가져가는 구조였다고 한다. 소작농들은 열심히 농사를 짓고도 가져가는 것이 없었으니 항상 빚을 지고 살았다. 겨울이 닥쳐 먹을 것이 떨어지면 지주에게 곡식을 빌려 다음 추수 때 갚아야했다.

그런데 이자가 원금의 2배였다. 지주와 소작농은 항상 이런 채권·채무 관계로 살아야했다. 이 관계속에는 일종의 차용증서인 '장리'라는 문서가 존재했는데 이것 때문에 소작농들은 항상 눈물속에 살아야했다.

가난한 사람들에 대한 착취가 늘어나자 도적떼가 생겼다. 횃불을 들고다니는 도적이라고 해서 명화적이라고 불렸다고 한다. 이 도적떼들은 부잣집에 들어가 곡식은 챙기지 않고 장리를 훔쳐 달아났다. 장리에 대한 불만이 얼마나 크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어느날 횃불을 든 명화적이 최 부잣집에도 들어왔다. 이웃의 다른 부자들은 최 부잣집에 찾아와 도적떼가 누군지 신원이 확인됐으니 관에 신고를 하자고 했다. 하지만 최 부잣집은 말을 듣지 않았다. 그리고 집안에 남아있던 모든 장리를 불태웠다.

-어렵게 부자가 됐을텐데 너무 일찍 곳간을 열어젖힌 것 아닌가?

▶흔들리지 않는 철학이 있었기 때문이다. "나 혼자 잘 살 수 없다"였다. 도적떼를 관에 고하지도 않고 도적떼 사건이 있은 뒤 반분작 제도를 도입했다. 소작농이 지은 수확량의 80, 90%를 지주가 가져가는 구도에서 과감히 탈피해 절반만 지주가 가져가고 절반은 소작농이 확보하는 구조를 만든 것이다.

이웃한 지주들이 모두 손가락질했다. 저러다가 최 부잣집은 결국 망할거라는 얘기였다.

하지만 예상은 빗나갔다. 집에서 멀리 떨어진 논을 판다는 소식은 사실상 알기 어려운데 소작농들이 이 얘기를 전해주기 시작한 것이다. 농토 매물이 나오면 바로 최 부잣집으로 정보가 들어왔다.

싼 가격에 농토를 매입하면서 땅이 순식간에 불어났다. 이 과정에서도 최 부잣집은 베푸는 일을 멈추지 않았다. 농토 매물을 소개해준 소작농에게는 반드시 농토를 떼내 해당 소작농에게 소작권을 부여했다. 덕분에 증조부 때는 6천석에 이르렀고 할아버지 대에 와서는 9천석까지 불어났다.

-최 부잣집은 부자로도 유명하지만 재산을 지키고 사회와 공존하는 법에 대한 철저한 고민이 있었다는데?

▶남들이 보기에는 좀 이상한 규칙을 지키고 살았다. 아무리 재산을 많이 모아도 1만석 이상을 해서는 안된다는 불문율을 만들었다. 재산을 특정인이 독점해서는 안된다는 원칙은 명화적의 사례를 생각해서라도 반드시 지켜져야하는 것이었다. 내가 모든 것을 가지면 하나도 가지지 못한 상대방은 결국 도적으로 변신할 수밖에 없다는 의미다.

또 벼슬은 하되 진사 이상 벼슬을 해서는 안된다는 원칙도 세웠다. 부와 명예를 함께 지닐 수는 없다는 이유 때문이었다.

또 빠질 수 없는 것이 사치에 대한 경계였다. 부자라고 해서 내 돈을 내 맘대로 써서는 안된다는 이치다. 경주 최 부잣집으로 시집온 며느리들은 3년동안 무명옷만 입었다. 부잣집에 들어왔다고 해서 재산에 현혹되면 안된다는 훈계였다. 스스로 낮추지 않는 부자는 부자될 자격이 없다고 집안 어른들은 항상 말씀하셨다.

-암울했던 일제강점기에는 독립운동에 많은 재산을 기꺼이 내놓았다는데?

▶백산상회·백산무역이라는 상호를 들어봤을 것이다. 백산 안희제 선생이 백산상회를 설립해 그 수익금을 독립운동 자금으로 댔는데 일제가 이를 알게되면서 결국 더 이상 지원 역할을 할 수 없었다.

할아버지(최준)가 이 일을 승계하게됐다. 백산무역을 만들어 할아버지가 대표이사가 됐다. 그리고 1919년 5월 1일 백산무역은 영업을 개시했다.

독립운동 자금을 대기 위해서는 외상수출을 하고 돈을 떼였다는 핑계를 댈 수밖에 없었다. 임시정부로 이 돈을 가져다줬는데 이런 과정에서 자본금은 줄어들고 빚은 자꾸 늘어났다. 다른 주주들이 대표이사를 고발했다.

1928년 회사도 파산했다. 당시 130만원의 빚이 할아버지 앞에 쌓였다. 1만석 하는 집에 3만석 부채가 쌓였다. 완전히 망한 것이다.

-일제강점기 독립운동자금을 대다가 경주 최 부잣집은 완전히 파산한 것인가?

▶파산을 모면할 수 없는 구조였다. 하지만 당시 채권은행이었던 일본 식산은행장은 할아버지를 좋게 봤다. 나이도 비슷했다. 채권 조정을 통해 분할 상환을 할 수 있는 길을 열어줬다. 파산은 모면한 것이다.

은행장 개인의 성향도 있었지만 당시 일제의 정책과도 연관이 있었다. 일제는 당시 식민지 유화정책을 쓰고 있었다. 채무자들의 친일화를 시도한 것이다.

채권 은행은 채권 행사를 위해 할아버지가 갖고 있던 토지에 대한 경매를 하지 않고 일단 압류를 풀어준 뒤 신탁을 통해 매년 토지에서 나온 일정 수익을 이자 및 원금 상환 개념으로 분할해서 가져가는 결정을 내렸다. 할아버지는 남은 재산 3천석을 지킬 수 있었다.

이때 내려진 채권 은행의 정책 결정을 인식해 할아버지를 친일파로 모는 사람들이 있는데 이는 정말 잘못된 것이다. 백산무역이 망한 뒤에도 여러 경로를 통해 독립운동자금을 보내려고 했으나 일제의 감시가 워낙 지독해 송금이 불가능했다. 할아버지가 친일을 하지 않았다는 것은 이후 민족문제연구소 검증에서도 확인됐다.

-일제가 우리 땅에서 물러간 뒤 남은 재산 3천석은 어떻게됐나?

▶해방된 뒤 채권은행 신탁이 풀렸다. 3천석에 대한 재산권 행사가 가능해진 것이다. 할아버지는 남은 재산을 인재를 키우는 일에 쓰고 싶어했고 이를 실행했다.

1947년 할아버지를 비롯해 대구경북지역 5명의 설립자 명의로 영남대 전신인 대구대를 설립했다. 공식 설립자는 5명이지만 실질적으로 더 많은 사람들이 기여했다. 할아버지는 우리 지역 고급 인재 육성을 위한 대학을 만들고자 했다. 우리 지역이 잘 되기를 바라는 뜻이었다.

-그렇다면 지금 영남대의 설립에 경주 최 부잣집이 주축이 되었다는 뜻인가?

▶그렇다. 5·16이 일어나면서 상황이 급변했다. 군사정부가 학교에 많은 간섭을 했다. 학교 이사장이었던 할아버지는 혼란을 겪었다. 군사정부 등장 후 재벌들에 대한 규제도 심해지면서 삼성 이병철 회장이 돌파구를 찾자는 의도에서 경주로 할아버지를 찾아왔다. 학교를 자신이 맡아보겠다는 것이었다. 1963년이었다.

할아버지는 아무런 조건도, 어떤 대가도 받지 않고 대학을 이 회장이 맡아서 운영하도록 했다. 그런데 몇년도 안돼 이른바 사카린 밀수사건이 터졌고 삼성은 큰 위기에 몰렸다.

삼성은 대구대에서 손을 뗐다. 헌납을 했다. 할아버지에게는 단 한마디 말도 없이 이런 결정이 내려졌다.

1967년 대구대는 청구대와 합쳐져 영남대가 됐는데 이상하게도 설립자들의 역할은 온데간데 없어졌고 1980년대 박근혜 전 대통령이 학교 재단이사장이 돼 수년간 학교를 운영하는 이해할 수 없는 일이 벌어졌다.

-할아버지가 마지막 남은 3천석 재산을 대학을 만들기 위해 내놨는데 후손 입장에서 오늘의 이 상황이 매우 받아들이기 힘들다는 것인가?

▶물론이다. 하지만 내가 이 나이에 대학 운영에 관여하겠다는 것이 아니다. 절대 아니다. (그는 이 부분에서 목에 힘을 줬다) 할아버지가 남은 재산을 모두 대학 설립에 넣으면서 나는 유산을 하나도 받지 못했다. 그러나 불만은 없다.

내가 원하는 것은 대학이 설립 목적대로 바로 가야한다는 것이다. 대학은 개인이 주인이 되어서는 안된다. 그것이 할아버지의 뜻이었다.

그런데 지금 영남대는 그 뜻과 맞지 않다. 바로잡아야한다. 지금 정부가 이를 해줄 것으로 믿는다. 대구경북 지역민들의 대학으로 가야한다. 누가 주인이라는 것은 맞지 않다.

권력자가 권력의 힘으로 대학을 사유화했다면 이제 이를 고쳐 제자리로 돌려놓아야한다. 지난날의 권력 남용이 지금 이 시대에까지 이어져서는 안된다.

-큰 부자였던 할아버지로부터 재산은 물려받지 못했지만 최 부잣집의 정신을 전파하고 있는 지금, 마음은 아직도 부자가 아닌가?

▶할아버지, 아니 우리 조상들이 해온 것처럼 사회, 그리고 이웃에 무엇을 해줄 수 있을지를 부자들은 항상 고민해봐야한다. 정치를 아무리 잘해도 가난한 사람이 생긴다. 그렇다면 누가 역할을 해줘야할 것인가? 조금 더 가진 사람이 역할을 해야한다.

내 재산을 유용하게 쓰면 세상이 시끄럽지 않다. 할아버지는 국권회복을 위해 전 재산을 내놓았고, 우리 지역 인재를 키워야한다며 아무런 조건도 걸지 않고 주머니를 몽땅 비웠다. 할아버지는 그것이 바른 길이라고 믿었기에 결단을 내렸다.

우리 모두 주머니에 뭔가를 잔뜩 채우려고 하지만 인생은 마치는 날이 정해져있다. 인생이 유한한데 언제까지 채우고만 살 것인가? 내놓는 삶. 베푸는 삶이 있어야한다.

그리고 내놓는 손길과 베푸는 손길이 보람을 느낄 수 있는 사회의 구조도 만들어야한다. 선의를 갖고 희생을 했는데 값지다는 평가를 받지 못하면 더 이상 선의가 나오지 않는다. 우리 사회가 정의롭고 공정하다면 더 많은 선의가 나올 것이다. 권력이 불공정하고 사적인 부분에 사용되는 한 선의를 기대하기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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