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자와 함께] "억울하게 간첩 가족으로 산 그 세월은 누가 보상하나요?"

입력 2018-11-15 17:09:10 수정 2018-12-21 10:23:44

‘울릉도 간첩단’ 사건 연루된 친지 여파로 불명예 전역…서동윤 씨 사연
2015년 대법원서 40년 만에 무죄로 최종 판결

1976년 작은아버지가 울릉도간첩단에 연루되면서 불명예 전역을 한 서동윤 씨가 군 복무 시절 받았던 훈장을 들고 상념에 잠겨있다. 김영진 기자 kyjmaeil@msnet.co.kr
1976년 작은아버지가 울릉도간첩단에 연루되면서 불명예 전역을 한 서동윤 씨가 군 복무 시절 받았던 훈장을 들고 상념에 잠겨있다. 김영진 기자 kyjmaeil@msnet.co.kr

베트남전 참전용사인 서동윤(71) 씨는 42년 전 천직으로 여겼던 군에서 쫓겨났던 지난날을 생각하면 아직도 눈시울이 붉어진다. 1969년 스물 두살에 육군에 입대했던 그는 1971~73년까지 베트남전에 파병됐다.

서 씨는 당시 매복 중이던 베트남군을 먼저 발견해 소대원 32명을 지키는 활약을 펼쳤고, 그 공을 인정받아 화랑무공훈장을 받았다. 또 부사관 임관 2년 6개월 만에 중사로 진급해 특전사 공수여단에서 복무했다.

그러나 특전사에서 근무한 지 3년째였던 1976년 그는 '현역 복무 부적격자'라는 이유로 강제 전역됐다. 소수 정예요원으로 꼽혔던 서 씨는 납득하기 어려웠다. 더구나 당시는 병력 부족으로 자발적으로 전역을 하려해도 군에서 한사코 만류하던 시기였다.

서 씨는 여러 경로를 통해 자신이 전역하게 된 이유가 울릉도에 살고 있던 작은아버지 때문이라는 사실을 알게됐다. 1974년 2월 서 씨의 작은아버지가 간첩 혐의로 검거돼 이듬해 대법원에서 무기징역을 선고받았던 것. 이른바 '울릉도 간첩단 사건'이었다. 이 사건은 1974년 당시 중앙정보부가 울릉도 등지에 거점을 두고 간첩활동을 하거나 이를 도왔다며 전국에서 47명을 검거한 공안 조작 사건이다.

이후 서 씨의 삶은 평온하지 못했다. 지독한 '연좌제'의 굴레 탓이었다. 일용직을 전전하다가 어렵게 취업하면 '동향 파악'을 한다며 경찰이 찾아왔다. 주위의 따가운 시선을 견디지 못해 어렵사리 구한 직장을 옮겨다닌 적도 한두 번이 아니었다.

그렇게 수십년을 살아온 서 씨는 지난해 친지 장례식에서 충격적인 소식을 들었다. 울릉도간첩단 사건이 고문 등 가혹행위로 조작됐고, 2015년 대법원에서 최종 무죄 판결을 받았다는 것이다. 작은아버지는 31년 간의 옥살이 끝에 2006년 출소했고, 5년 뒤인 2011년 6월 억울함을 풀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다.

자신을 옭아맸던 간첩단 사건이 무죄로 결론이 나자 서 씨도 국방부에 탄원서를 제출하는 등 명예 회복에 나섰다. 올 2월 불명예 사유를 알려달라는 탄원서를 내고, 5월에는 법원에 국가배상소송도 제기했다. 그러나 최근 법원은 서 씨의 청구를 모두 기각했다. 국가배상소송 등은 재심으로 무죄 판결이 확정된지 6개월 내에 제기해야하지만, 서 씨는 이미 청구 시효가 소멸됐다는 이유였다.

서 씨는 "그동안 친지들과 연락이 뜸해 간첩단 사건이 무죄 선고를 받은 지 알 수 없었고, 종전에 3년이었던 청구시효가 6개월로 줄어든 사실도 몰랐다. 비록 늦었지만 지금이라도 명예로운 군인으로 남고 싶다. 억울함을 법원이 풀어달라"고 호소했다.

1976년 작은 아버지가 울릉도 간첩단에 연루되면서 불명예 전역을 한 서동윤씨는 국가배상소송을 제기했지만 기각됐다. 김영진 기자 kyjmaeil@msnet.co.kr
1976년 작은 아버지가 울릉도 간첩단에 연루되면서 불명예 전역을 한 서동윤씨는 국가배상소송을 제기했지만 기각됐다. 김영진 기자 kyjmaeil@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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