울릉도의 삶과 문화 100년의 이야기 ④.끝

입력 2018-11-13 11:54:31 수정 2018-11-13 20:03:15

1970년대 북면 소재지인 천부마을 전경. 사진 중앙부 왼편 흰색 첨탑이 있는 건물이 천부성당이다. 성당을 기준으로 4시 방향에 천부침례교회가 보인다. 울릉군 제공
1970년대 북면 소재지인 천부마을 전경. 사진 중앙부 왼편 흰색 첨탑이 있는 건물이 천부성당이다. 성당을 기준으로 4시 방향에 천부침례교회가 보인다. 울릉군 제공

<글 싣는 순서>

①오징어잡이
②강고배 제작
③음식문화
▶④종교와 삶

"이 섬 백성들의 신앙 정도는 어떠한가. 기독교 신자 280명에 복마전의 보천교도가 568명의 절대다수라고 한다. …불교의 절이 한 곳 있는데 여승 2명만 있어 괴로운 섬에 한층 더 고적의 느낌이 보는 이로 하여금 일게 하는데…." 1928년 9월 12일 자 동아일보 기사다.

일제강점기 상당수 한국인은 종교에 의지했다. 팍팍한 살림살이에 나라도, 말도 빼앗긴 백성이 마음을 기댈 곳은 종교뿐이었다. 일제강점기 한반도에 '민족종교'란 이름으로 수많은 신흥종교가 생겨난 것도 이런 이유에서였다.

울릉도 상황도 별반 다르지 않았다. 1921년 전북 정읍에서 생겨난 신흥종교인 보천교가 멀리 울릉도까지 전파돼 번성한 대목이 흥미롭다.

◆이주 초기 들불처럼 번진 기독교

울릉도에 기독교가 처음 전해진 것은 1909년의 일이다. 그해 북면 나리동에 세워진 나리교회(천부제일교회 전신)가 울릉도 첫 교회다. '경북교회사'(1924)는 이렇게 기록했다.

"1909년 울릉도 나리교회가 입(立)하다. 강원도 삼척 부호교회 감리교인인 김병두가 전도하여…."

김병두 씨는 영국 성서공회 소속 매서인(선교 초창기 전도지와 성경을 배부하거나 팔면서 복음을 전했던 사람)이었다. 그의 선교를 통해 장흥교회(지금의 간령교회)와 저동교회(동광교회), 도동교회(도동제일교회)가 연이어 세워지며 1909년 한해만 4곳의 교회가 들어서게 된다.

울릉도에 처음으로 발을 디딘 선교사는 호주 출신으로 부산에서 근무하던 매견시(제임스 노블 멕켄지)였다. 그는 1910년부터 1917년까지 5차례 섬을 방문해 초기 교회의 기초를 다졌다. 1913년 4월 그가 남긴 기록이다.

"(울릉도엔) 7천 명의 조선인과 1천500명의 일본인이 있다. 조선인들은 정말 비참하게 살고 있다. 작년에 들었는데 곡물의 흉작으로 1년에 석 달은 들에 난 야생뿌리와 나물 등을 먹으며 산다고 한다. 그들은 거의 일본 상인에게 빚을 지고 있는데 땅에서 난 모든 수확물을 빚을 갚는 데 다 바친다. 그러면 다음 해의 경작과 생계를 위해 더 많은 빚을 내야 되고, 이런 과정이 반복된다. 조선인은 자기네 땅에서 마치 귀양 온 사람처럼 멀리 떨어져 살게 되니 그들은 위로와 소망을 안겨주는 복음을 받아들일 준비가 충분히 되어 있었다."

초기 기독교와 관련한 흥미로운 기록도 있다. 1928년 9월 8일, 9일 자 동아일보 기사다.

"이 섬(울릉도 부속 섬인 죽도)에는 도사(島司)가 있으니 그는 박재천 씨다. 이 섬은 울릉도와는 또 다른 별천지로 박 씨의 집 한 가호가 있을 뿐으로 이 섬의 도사라고 부름도 이 때문이다. …이 섬의 목사요 울릉도의 목사인 그는 온유하고도 겸손하여 어진 양 같다. …일요일이 되면 배를 준비해 놓고 흰 기를 다는데, 울릉도 도동 예배당에 설교를 가려는 때문이라고 한다."

당시 죽도를 방문했던 기자는 박재천 씨를 목사라고 썼지만, 그가 실제로 목사였는지는 확인이 필요한 부분이다. 울릉도에 목사가 상주하기 시작한 건 '1944년 8월 주낙서 목사 때부터'라는 게 교계의 공식 기록이다.

울릉도 첫 목사였던 주낙서 목사와 울릉도와의 인연은 짧았다. 부임 4개월째인 12월 12일 밤 전도를 마치고 북면 나리동을 나선 주 목사는 울릉읍 저동으로 이어지는 장재를 넘다 폭설을 피하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다.

지금 울릉도엔 41곳의 교회가 있다. 대다수가 1970년 이전에 지어졌고, 이 가운데 10여 곳은 일제강점기에 지어졌다. 고단한 삶을 종교로 이겨내려 했던 옛 울릉 주민의 삶의 단면이다.

1970년대 울릉읍 저동침례교회 전경. 현재 울릉도엔 41곳의 교회가 있다. 대다수가 1970년 이전에 지어졌고, 이 가운데 10여 곳은 일제강점기에 지어졌다. 고단한 삶을 종교로 이겨내려 했던 울릉 주민의 삶의 한 단면이다. 울릉군 제공
1970년대 울릉읍 저동침례교회 전경. 현재 울릉도엔 41곳의 교회가 있다. 대다수가 1970년 이전에 지어졌고, 이 가운데 10여 곳은 일제강점기에 지어졌다. 고단한 삶을 종교로 이겨내려 했던 울릉 주민의 삶의 한 단면이다. 울릉군 제공

◆진각종 종조 탄생…천주교 사제 5명 나와

울릉도에서 가장 오래된 불교 사찰은 울릉읍 도동에 있는 대원사다. 불국사 말사인 대원사는 1900년대 초 비구니 박덕염이 창건했다는 것 외엔 남아 있는 기록이 없다. 창건자가 비구니였기 때문인지 지금도 비구니 도량으로 이어지고 있다.

불교에서 주목할 부분은 한국 불교 4대 종단의 하나인 진각종의 종조가 울릉도 출신이란 점이다. 종조인 회당 손규상 대종사는 1902년 울릉읍 사동에서 태어났다. 1937년 포항 죽림사에서 본격적인 수행길에 들어섰고 10년 뒤인 1947년 대구의 한 도량에서 100일 정진을 마친 다음 날 큰 깨달음을 얻었다고 한다. 때문에 진각종단은 1947년을 진각기원년(眞覺紀元年)으로 삼는다.

대종사는 1964년 입적할 때까지 교육사업에 큰 관심을 보였다. 대구의 심인중·고교와 서울의 진선여중·고교, 위덕대학교가 종단이 건립한 학교다.

종단에선 1948년 대종사가 태어난 터에 진각종 사찰인 총지심인당을 지었다. 1953년에는 울릉읍 도동에 여래심인당을, 이듬해엔 서면 남양에 선원심인당을 세웠다. 이후 대종사 생가터는 금강원이라는 이름의 성지로 가꿔졌다. 이곳엔 대종사의 영정을 모신 종조전과 사리를 모신 오륜탑, 일대기를 담은 종조비 등이 있다. 현재 울릉도엔 진각종 사찰 3곳을 포함해 모두 11곳의 불교 사찰이 있다.

기독교·불교와 달리 천주교는 1950년대 초반까지 침체기였다. 19세기 말 울릉도 이주민 중엔 박해를 피해 들어온 천주교 신자가 있었지만 구심점이 없었던 탓이었다.

울릉군지 등에 따르면 본격적인 울릉도 천주교 역사는 1955년 시작됐다. 그해 12월 현석문(가롤로) 성인의 막냇동생 후손인 현재룡 씨가 서정길 대주교에게 울릉도 전교를 자원하면서부터다. 울릉중앙천주교회 창립준비위원회가 만들어졌고 이듬해 7월엔 600여 명의 신자가 참석한 가운데 대구가톨릭대 학장인 전석재 신부 주례로 울릉도 첫 미사가 열렸다. 1957년엔 신상도·김규태 신부가 울릉도에서 10일 동안 영세식을 진행했고 1천403명이 영세를 받았다.

울릉도엔 울릉읍 도동과 북면 천부에 각각 성당이 있다. 2곳 모두 1960년대에 지어졌다. 1977년 울릉도 출신 첫 사제(정춘석 신부, 2003년 선종)가 탄생한 이후 지금까지 모두 5명의 사제가 나왔다.

◆근대 신흥종교 보천교 유입되기도

일제강점기였던 1920년을 전후해 한반도에선 여러 신흥종교가 생겨났다. 탁지일 부산장신대 교수는 "나라의 독립이라는 민족적 문제에 대한 답을 종교에서 찾고자 한 민중의 요구는 컸던 반면, 기성 종교는 그 해답을 제시하지 못했다. 당시 신흥종교 중엔 반사회적 단체도 있었지만 민족성과 윤리성을 지닌 항일 민족종교 단체도 여럿 있었다"고 설명했다.

1921년 전북 정읍의 동학군 접주 아들 차경석이 창시한 보천교도 그중 하나였다. 보천교는 민족주의적 색채가 강했고, 독립운동에도 직간접적으로 관여했다. 같은 해 4월 26일 자 동아일보 기사다.

"차경석을 교주로 삼아 은밀히 국권 회복을 도모하되 교도가 5만5천 명에 달하며 일제히 독립운동을 일으키고자 하는 일종의 비밀음모단체로 주모자는 조선 전국을 돌아다니며 교도 모집에 분주하여…."

실제로 1924년 11월 26일 일본 외무성 기록에 따르면 보천교는 그해 군자금 2만원을 김좌진 장군에게 전달하고 상해 임시정부 설립자금 5만원을 지원했다.

반면, 당시 조선총독부는 불교, 기독교, 신도(일본 전통 종교)만 종교로 인정했다. 나머지는 유사종교이자 반일민족단체로 규정하고 경무총감부(지금의 경찰청)가 관리했다. 1936년 교주 차경석이 사망하고 '유사종교 해산령'이 내려지면서 보천교는 강제 해산된다.

일제강점기 보천교 신도가 울릉도에 있었던 것은 분명한 사실이지만, 언제 어떻게 유입됐는지에 대한 기록은 없다. 신도 중 일부가 "동해 한가운데 있는 환상의 섬 간산도(干山島)를 찾아 울릉도로 왔다"고 한 이야기가 '울릉군지' 등에 남아 있다. 간산도는 '우'(于) 자를 '간'(干)자로 잘못 읽은 데서 비롯됐고, 간산도는 결국 독도의 다른 이름인 우산도란 것이다. 보천교 신도들이 간산도를 찾아 울릉도에 들어왔고 간산도가 독도라는 것을 알고 무리하게 독도로 가다 조난을 당하기도 했다는 이야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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