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시윤 수필가
날이 맑아 시야가 멀어지고, 때로는 한 치 앞도 사라지는 안개의 날이 반복되는 계절이다. 집 안에 있으면 어떤 허허로움이랄까, 이유 모를 감정의 기복이 불안처럼 잠식한다. 불면의 밤이 찾아오고, 그 밤 한가운데서 어디로 가야 할지도 모를 앞날을 걱정한다. 소란한 주변을 싫어했으나 불안은 종종 나를 인파 속으로 몰고 간다. 어떤 강연을 찾아 나서고 무기력하게 앉아 강연이 끝나기를 기다리고, "행복하십니까?"라는 강연자의 질문에 나도 모르게 "예"라고 대답하고는, 그것이 곧 행복을 세뇌당하며 살아온 자의 무의식의 대답 같은 것이었다는 것을 느꼈을 때, 강연 내내 씁쓸함을 감출 수 없었다.
중견 화가의 전시회에서 그림을 감상하는 동안, 나는 몹시 쓸쓸했다. 우울함과 쓸쓸함의 극치에서도 나는 왜 그토록 그런 느낌들에 강한 동질감과 희열을 느꼈을까. 우리는 왜 마음껏 쓸쓸하면 안 되는지, 우리는 왜 마음껏 외로워하면 안 되는지. 어떤 불경스러운 마음을 가진 것처럼.
거리는 온통 쓸쓸함뿐이고, 어떤 고독들은 꿈을 꾼 것처럼 일순간 밀려왔다 밀려난다. 지나가다 들은 말은 쉽게 상처가 되고, 상처가 아물기까지는 너무 더딘 시간이 필요하다. 매일 몸서리치도록 어떤 인연을 증오해 보았거나, 어떤 사람을 외면해 보았거나, 어떤 사랑을 훔쳐보았거나, 자학의 날들이 많아지거나. 마치 나는 그렇지 않은 사람처럼 아무렇지 않게 미소 지을 때, 나는 내 안의 차갑디차가운 이중성에 놀라곤 한다. 그러면서도 나는 정갈한 듯 아무렇지도 않게 어떻게든 매일 인연을 엮고 있다는 것이다.
돋아나는 마음들은 늘 새싹 같아서 또 다가서고 다가서는 것이다. 한번 베인 상처가 아물기도 전에 또 누군가와 인연을 엮고, 머지않아 미련 없이 서로 흩어져버리는 것이다. 어느 날, 저 메마른 씨방이 열리고 씨앗들이 와르르 쏟아져 다음 생을 또 잇겠지만 메마른 현실을 부정하지는 않는다. 씨앗을 틔워 하얀 아스타가 피고, 하얀 쑥부쟁이가 피고, 하얀 개망초, 하얀 프록스, 하얀 코스모스, 하얀 부추꽃이 노지에 마구마구 피는데, 쓸쓸한 마음들은 저 하얗디하얀 꽃밭에서도 그저 쓸쓸함만 보는 것이다. 나는 이 아름다운 계절에서 왜 과잉된 열정을 누르지 못하고 환멸, 권태, 좌절, 절망의 단어들을 떠올리는 것일까.
목화같이 따뜻하게 풀어진 억새 숲에서 마지막 힘을 다해 씨앗을 날려 보내는 열정의 노래를 들으며 쓸쓸함 또한 곧 사라질 감정이라는 걸 세뇌하는 중이다.
비워진 들판에 이제 곧 긴 겨울이 닥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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