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영재의 대구음악유사]태권 수녀(修女)

입력 2018-10-23 19:36:15

전 대구적십자병원 원장

희망원 경내에 정신과 전문병원을 만들며 소피아 수녀를 알게 되었다. 환우들이 동산에서 운동하고 놀이하며 야외치료를 받았는데 정신과 전문복지사가 드문 때여서 이런 치료를 지도를 해 줄 전문가가 없었다. 이 때 아마추어 봉사자로 소피아 수녀가 나타났다.

원래의 보직은 희망원 주방 책임자였는데 밥만 해주는 게 아니었다. 퇴비더미에 대량으로 지렁이를 길러 몸이 쇠약한 원생들에게 토룡탕을 끓여주었다. 토끼도 사육해 보신탕을 만들어 원생들을 먹이기도 했다. 성격이 무어 하나 그냥 보아 넘지 못하는 소피아 수녀는 우리들의 야외치료에도 계속 참여하여 노래와 춤을 가르쳤다. 어느 날 환자들이 수녀님도 노래와 춤을 추라고 졸라 대었다. 소피아 수녀가 "학교 종이 땡땡 어서 모이자."라고 동요를 부르자. 옳은 노래(?)를 부르라고 난리가 났다.

오래 조르지도 않았는데 노래가 나왔다. "연분홍 치마가 봄바람에 휘날리더라. 오늘도 옷고름 씹어 가며 산 제비 넘나드는 성황당 길에. 꽃이 피면 같이 웃고 꽃이 지면 같이 울던. 알뜰한 그 맹세에 봄날은 간다." 모두들 놀라서 멍하게 쳐다보고 있었다. 2절이 이어졌다." 열아홉 시절은 황혼 속에 슬퍼지더라. 오늘도 앙가슴 두드리며 뜬 구름 흘러가는 신작로 길에. 새가 날면 따라 웃고 새가 울면 따라 울던. 얄궂은 그 노래에 봄날은 간다."- 손노원 작사, 박시춘 작곡. 백설희 노래.

남자보다 더 남자 같던 소피아 수녀의 입에서 간드러진 유행가가 흘러나오자 환우들은 마치 하늘에서 하나님이 강림이라도 한듯 모두들 일어서서 박수를 치며 함께 노래를 불렀다. 1953년 대구에서 탄생한 유니버설 레코사가 발표한 작품이어서 대구 사람들이 특히 좋아 하던 노래였다. 환자들의 예상을 깨트리고 춤추며 유행가를 불러 놀라게 했던 소피아수녀의 특유의 행동은 계속되었다.

몇 년 뒤 희망원을 나와 교동시장에 '요셉의 집'을 개설하여 배고픈 이들에게 매일 무료급식을 했다. 일정한 수입은 없고 그날 그날 찬조 받은 쌀과 부식으로 식당을 꾸려 나가자니 애간장이 다 녹는 나날이었다.

하루는 내일 밥할 쌀이 없었다. 어디에 부탁할 곳도 마땅치 않아 하릴없이 기도만 하고 있었는데 한 밤중 문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나가보니 어떤 낯모르는 이가 쌀을 한가마니 내려주고 갔다고 했다. 이런 저런 고생 끝에 요셉의 집이 안정되자 소피아 수녀는 성주로 떠났다. 술 중독을 앓는 이들과 함께'평화의 계곡'이라는 공동체를 만들어 살았다. 읍내 심부름 보내면 돈을 속여 술을 마시고 귀원한 원생들이 소피아 수녀에게 욕과 함께 주먹으로 맞고 이단옆차기로 차였다. 그들은 '성질 더러운 엄마' '깡패 할마시'혹은 '태권 수녀'라고 불렀다.

몇 년 전 마산 진동면 황량한 바닷가에서 정신지체, 술 중독, 만성정신병 환자들과 함께 살고 있는 소피아 수녀를 만났다. 많이 늙었고 너무 약해져 있었다. 봄날을 간다를 부르며 춤추고 술주정뱅이들을 두들겨 패던 깡패는 아니었다. 착하고 순해진 수도자 모습이었다. 그 게 그녀의 본 모습이 아니라는 것을 아는 사람들은 가슴이 아팠다. 무언가 고장이 난 것이다.

지금은 수녀원에서 경영하는 요양원에 입원중이다. 사람도 잘 못 알아보고 일상생활도 스스로 잘못하는 치매 상태로 지낸다고 했다. 마더 데레사 수녀가 희망원에 왔을 때 한 방에 자며 "노벨상은 당신이 받았어야 해."라고 했던 소피아 수녀. 이제 태권도를 할 수가 없다.

전 대구적십자병원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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