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한국이 비록 국력은 약하나 삼천리에 퍼져 살고 2천만명이 4천년 역사를 지내 왔으며 우리 국사를 담당할 힘이 없지 아니할 것이거늘 어찌 이웃 나라의 다스림을 받으리오.'
경북지역의 3·1운동이 다른 지역과 다른 점은 '파리장서 의거'에서 찾을 수 있다. 파리장서는 3·1운동 직후 일부 유림 등이 앞장 서 파리에서 열린 '강화회의'(혹은 평화회의)에 한국을 독립시켜 달라고 요구하는 내용을 담아 보낸 긴 편지(독립청원서)다.
땅이 있고, 역사와 민족이 있고, 나랏일을 감당할 수 있는 민족적 역량이 있음을 강조하면서 일제의 강점과 강제적 주권 찬탈의 부당함을 세계 만방에 알려 조선의 독립문제를 국제사회에 청원한 것이다.

◆파리장서, 일제 만행 폭로와 한국독립 정당성 주장
파리장서의 요지는 일제가 저지른 명성황후와 고종황제의 시해 사실, 한국 주권의 침탈과정을 폭로하면서 한국독립의 정당성과 당위성을 주장한 것이다.
파리장서의 제출은 제1차 세계대전의 뒤처리를 위해 열리는 파리강화회의에 한국의 독립문제를 상정시키려는 노력의 하나였다.
당시 일제는 한국이 일본의 도움으로 급속히 성장하고 있고, 한국인들이 일본의 통치에 크게 만족하고 있어 파리강화회의에서 한국 문제를 주제로 삼을 필요가 없다고 주장하고 있었다.
그런데 한국인들은 3·1운동을 일으켜 전 민족이 한목소리로 독립을 주장하고 나섰고, 여기에 유림도 일제의 주장과는 정반대로 한국의 독립을 국제사회에 청원하고 나선 것이다.
파리장서는 이렇게 한국민의 독립의지를 강력하게 밝힌 문서로 파리강화회의 의장에게 우송됐다. 이 자체만으로도 파리장서는 파리에서 열린 국제평화회의에 제출된 독립청원서로서의 기능을 했지만, 일제에 대해서는 한국의 독립을 선언한 독립선언서의 의미가 있는 것이다.
또한 파리장서는 유림 층의 세계관이 변했다는 것을 보여 주고 있다. 조선의 유림은 중국 중심의 세계관을 가졌던 데 비해, 이 장서에서는 세계 각국을 평등하게 인식하는 세계관을 드러냈다.
파리장서의 내용 중에는 "제위가 모여 평화회의를 개최한다 함을 들은 후부터 우리 국민은 모두 용기를 내어 진실로 만국이 평화롭다 할진대 우리 한국도 만방의 하나이니, 마땅히 평화로워야 할 것"이라고 주장한 데에서 잘 나타난다.
특히 "차라리 몸을 묶이어 죽음으로 나갈지언정 맹세코 일본의 노예는 되지 아니하리라"고 강조, 독립에 대한 유림 층의 단호하고도 결연한 의지를 극명하게 밝혔다.

◆경북 유림에 의해 추진된 파리장서
파리장서운동은 유림 세력 가운데서 경남 산청 곽종석을 중심으로 하는 영남유림 계열과 김복한을 중심으로 하는 호서의 기호유림 계열에서 각각 독자적으로 비밀리에 추진됐다.
영남유림 계열에서는 곽종석의 지시를 받은 성주의 김창숙이 활동의 중심 인물이었고, 기호유림 계열에서는 김복한의 지시를 받은 임경호가 그 중심에 있었다.
영남유림의 종장 곽종석은 1910년 이후 망국의 죄인을 자처하고 오직 후진 양성에만 몰두했다. 1919년 2월 19일 윤충하가 서울서 내려와 서울에서 일어난 여러 가지 소식을 스승 곽종석에게 전했다.
특히, 윤충하는 파리강화회의를 앞두고 유림 대표 김윤식과 이용직의 이름으로 '우리 민족은 독립을 원하지 않는다'는 내용의 '독립불원서'를 일본 측에 제출한 것을 정면으로 반박해 "우리 유림은 그렇지 않다"는 진정한 뜻을 알리려 노력했다.
이 같은 일본 측의 일부 유림을 이용한 독립불원서의 부정함을 알리기 위해서라도 파리강화회의에 탄원서를 제출해야 한다는 서울 유림의 동향을 전하면서 이러한 중대한 일을 스승인 곽종석이 맡아서 이끌어 줄 것을 간청했다.
곽종석의 조카 곽윤과 제자 김황은 곽종석을 대신해서 2월 26일 거창을 떠나 서울로 가서 28일 윤충하를 만났다. 그리고 이들은 3월 1일 서울 만세운동을 보았고, 고종 장례식에 참가하고자 상경한 김창숙을 만났다.
김창숙은 3월 5일 곽종석이 직접 서울에 보낸 김황과 곽윤 일행을 만나 독립청원서에 관한 일을 논의했다. 그는 "이 일이 본래 곽종석이 주인이 된 것으로 말미암은 것이니 김황은 즉시 돌아가서 말씀드리고 하나의 문서를 준비해 기다림이 옳겠다"고 고 말하며 김황과 곽윤을 다시 거창으로 보내 '파리장서'를 준비하도록 했다.
김황 일행은 돌아와 곽종석에게 독립청원서의 작성을 위촉한다는 말을 전했다. 김창숙은 김황 일행을 거창으로 내려 보내고 남은 인사들과 함께 전국 유림을 규합하기로 하고 각 지역을 나누어 맡기로 했다.
기암 이중업(안동)은 강원·충북을, 해사 김정호(성주)는 충남·충북을, 벽서 성태영(김천)은 경기·황해를, 우록 류준근(충남 보령)은 전남·전북을, 만송 윤중수(경남 합천)는 함남·함북을, 백은 유진태(충북 괴산)는 평남·평북을, 심산 김창숙(경북 성주)은 경북·경남을 각각 담당하기로 했다.
각 지방으로 내려갔던 재경유림은 3월 중순경 약속대로 다시 서울에 모였다. 이때 김창숙은 이미 파리장서를 간직하고 있었다. 김창숙이 거창으로 가서 곽종석으로부터 파리장서를 전달받아 올라올 때 스승 곽종석은 지팡이를 짚고 동구까지 나와 그를 전송했다고 한다.

◆영남·기호 유림의 합작품, '파리장서의 작성'
지금까지 밝혀진 파리장서는 아홉 장 정도다. 그 가운데는 똑같은 내용의 문서도 있지만, 글자나 내용에 차이가 있는 경우도 있다.
이렇게 된 이유는 파리장서가 초안본이 작성될 때부터 최종본으로 완성될 때까지 여러 복잡한 과정을 거쳤기 때문이다.
파리장서의 원본은 아쉽게도 발견되지 않았다. 하지만 원본에 가장 가까운 것이 '곽종석본'과 '최종본'이다.

파리장서의 문안 작성은 영남유림의 큰 선비 면우 곽종석에게 위임됐다. 곽종석은 파리장서의 문안 작성을 요청받고, 그 초안을 주변 사람들에게 부탁했다. 첫 초안본은 곽종석이 한주 이진상의 문하이자 동료인 회당 장석영에게 부탁해 지은 것이다. 둘째 초안본은 곽종석의 제자 김황이 스승의 지시를 받고 지은 것이다.
기호유림에서는 김복한의 제자 임경호가 지산 김복한을 수석 서명자로 하는 파리장서 '김복한본'을 가지고 상경했다. 임경호는 1919년 호서유림들이 파리평화회의에 제출할 목적으로 일제의 죄상을 폭로하고 조선독립의 열망을 담은 파리장서를 작성하자 발송책임을 져 준비하던 중이었다.
김창숙도 곽종석본과 서명자 명단까지 준비해 파리로 출발하려던 중 양측은 서로 계획이 같음을 알고 단일안을 만들기로 합의했다.
영남유림과 기호유림은 각기 소지한 '장서'를 비교한 뒤 시일이 급박하므로 김창숙이 가져간 '곽종석본(영남본)'이 '매우 선명하고 충실'하다고 판단해 이를 채택하기로 했다.
기호유림의 대표 임경호도 이에 따랐다. 그리고 여기에 양쪽의 서명자 명단을 하나로 통합해 한국유림단대표 곽종석·김복한 등 137명의 명단을 확정 지었다.
이 명단 137명을 '기미유림단'(己未儒林團)이라고 명명했다. 이렇게 채택된 곽종석본은 한 차례 더 수정이 이루어진 뒤 파리강화회의에 제출됐다.

댓글 많은 뉴스
구미 '탄반 집회' 뜨거운 열기…전한길 "민주당, 삼족 멸할 범죄 저질러"
尹 대통령 탄핵재판 핵심축 무너져…탄핵 각하 주장 설득력 얻어
계명대에서도 울려펴진 '탄핵 반대' 목소리…"국가 존립 위기 맞았다"
이낙연 "'줄탄핵·줄기각' 이재명 책임…민주당 사과없이 뭉개는 것 문화돼"
尹 대통령 탄핵 심판 선고 임박…여의도 가득 메운 '탄핵 반대' 목소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