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른들은 모르는 그녀의 직업. '인플루엔서'

입력 2018-10-09 09:43:31

- 전문. 뺀질이의 직업

쟁쟁한 스펙 사이에 공부를 못하는 사촌이 하나 있었다. 그녀의 별명은 뺀질이. 명절이 되면 어른들은 뺀질이에게 "너는 커서 뭐가 될래?" 진부한 얘기를 귀에 닳도록 늘어놓았다. 공부에 흥미가 없는 뺀질이가 화장이나 예쁜 옷에 관심을 가질 때면 '겉멋만 들었다.'는 핀잔이 날아왔다.

올해 추석 명절, 온 가족이 모인 자리, 여러 사촌들 사이에서 가장 당당한 사람은 대기업에서 과장으로 승진한 사촌 형도, 2년 차 공무원인 누나도 아닌 뺀질이다. 어른들은 뺀질이가 정확히 무슨 일은 하는지 알 수 없지만 그녀가 매달 부모님께 용돈을 드리는 잘나가는 딸이란 걸 익히 들었다. 물론 사촌들은 그녀의 직업에 대해 잘 알고 있다. 그녀의 직업은 '인플루엔서'. 뺀질이는 소위 요즘 사람들이 동경하는 인스타그램 스타로, 억대 연봉을 받으며 살고 있다. 수년 전 그녀는 취미로 여행 사진을 인터넷에 올리기 시작했는데 남다른 패션 감각을 인정받았고, 지금은 패션브랜드가 협찬하는 옷을 입고 월급을 받으며 여행하는 직업을 갖게 됐다.

◆인플루엔서? 영향력이 있는 사람?(인터뷰)

임채일(29) 씨는 17만 팔로워를 가진 지역의 손꼽히는 인플루엔서(Influencer. '영향력이 있는 사람'이라는 뜻의 신조어)이다. 미술학원을 차리는 꿈을 가진 그림 학도인 그는 인스타그램을 시작하면서 생각지도 못한 인플루엔서라는 직업을 갖게 되었다. 미술학원 선생님으로 일하던 4년 전 즐겨 입는 옷이나 좋아하는 그림 사진을 찍어 올리기 시작한 어느 날 '좋은 로션을 보내줄 테니 사용 후기를 써 달라'는 제안을 받았다. 이후 소액을 원고료를 주겠다는 업체들이 생겨났고 지금은 먹고 입는 데는 지출 없이 살 정도로 많은 협찬이 줄을 잇는다.

Q. 인플루엔서(인스타그램 스타)라니 생소하다. 무엇을 하는 일인가?

A. 쉽게 말해 광고주가 제공하는 물건이나 서비스를 내 사이트에 올려 홍보해 주는 일을 하는 사람이다. 예전엔 블로그가 그 역할을 했고 요즘엔 인스타그램이나 유튜브가 대세다. 온라인상에서 인지도가 높은 사람들이 인플루엔서가 되는 경우가 많다.

Q. 유명해지고 싶은 사람들이 너무 많다. 그만큼 장점이 많다는 얘길 텐데.

A. 사실 지역에서 손꼽히는 팔로워 수를 확보한 건 맞지만 전국 단위에서 보면 나 같은 사람은 너무 많다. 내게도 기회가 오는 걸 보면 온라인 광고효과가 크다는 걸 증명하는 것 같다. 통 큰 협찬이 기억에 남는다. 국내 자동차 브랜드 광고였는데 1회 촬영에 어지간한 중소기업 월급 수준의 페이(Pay)를 받았다. 연예인들은 얼마나 많은 돈을 벌까 생각해보게 되더라. 한 수입차의 해외 이벤트에도 초대된 적이 있는데 업체는 비즈니스석 항공권과 현지 여행 경비도 모두 부담했다. 인플루엔서가 아니라면 쉽게 경험할 수 없는 일이다.

Q. 유행을 타는 직업이라 3년 이상 유지하기가 쉽지 않았을 텐데.

A. 연예인들이 하는 얘기가 있지 않나. 직업이 불안정해 언제 생계가 끊길지 모른다는 말. 나도 지금은 인스타그램과는 별도로 다른 일을 하고 있고 언젠가는 개인 작업실을 열어 그림 그리는 작가로 활동하고 싶다. 어린 데다 잘생기고 사진까지 잘 찍는 친구들이 너무 많다. 협찬은 언제든 끊길 수 있다.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은 아니지만 경쟁이 심한 편이다. 개인적으로 3년 이상 인플루엔서를 할 수 있었던 건 시간이나 체력적인 면에서 노력을 많이 하기 때문이다. 제품에 맞는 배경 장소를 찾거나 광고주들이 어떤 이미지를 원할지에 대해 연구하고 시도해 보는 편이다. 연예인이 아니라 내가 일반인이란 걸 자각하는 것도 중요하다.

Q. 또래에 구직자나 사회 초년생이 많을 텐데 수입이나 근무 환경이 훨씬 나아 보인다.

A. 사진만 찍어 올리면 쉽게 돈을 벌 수 있는 일이라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런데 직업이라기보다 일에 가깝다. 트렌드 잡(Job)이기에 '좀 더 어린 나이에 시작했으면'이 아니라 '지금 내가 더 어렸더라면'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예전에는 없었던 일이고 언제 사라질지 모르는 일을 하고 있는 셈이다. 물론 수입도 좋고 일하는 시간이 자유롭다는 부분에선 만족스럽다.

Q. 얼마나 인플루엔서 일을 할 수 있을 거라 생각하나?

A. 당장 내일부터 일이 없을 수도 있다. 이미 사진에서 동영상으로 채널이 이동 중이다. 단순히 영상을 잘 찍는다고 해서 잘된다는 보장이 없다. 콘텐츠도 좋아야 하고, 유행을 잘 파악하는 어린 사람, 개인적인 감각이 더해져야 한다. 개인적으로 온라인 마케팅 일은 길어야 한두 해 더 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Q. 인플루엔서의 단점은 없나?

A. 근래 1, 2년 간 옷을 사거나 외식을 하는데 거의 돈을 써 본 일이 없다. 당장은 수입이 생기고 즐겁게 할 수 있는 일이기에 놓을 수 없지만 언제 마지막이 될지 모를 일이다. 온라인으로 벌어들이는 수익은 100% 연출에 의한 것이기에 내가 아닌 타인의 삶을 같이 살아야 한다. 직장에서 일하는 사람도 마찬가지겠지만 그런 점에서 인플루엔서 일도 영혼을 파는 일이라 할 수 있겠다.

그리고 남자는 덜한데 상대적으로 여성 인플루엔서들은 인신공격을 당한 일이 빈번하다고 들었다. 상대적으로 여자 인플루엔서나 이용자도 많아 생기는 일이 아닐까 싶다.

◆뺀질이가 인플루엔서를 그만 둔 이유

뺀질이는 결혼 후에도 막강한 인스타 파워를 자랑했다. 그녀의 결혼식도 협찬의 향연이었다. 아름다운 티아라부터 피로연 드레스, 신혼집에도 각종 협찬 물건이 즐비했다. 화려한 싱글에 이어 결혼 생활 그리고 멋진 육아맘 라이프까지 그녀의 모든 일상이 대중의 관심사였고 광고주들은 기회를 놓일 리가 없었다. 길어도 1, 2년이란 온라인 마케터 생활을 뺀질이는 블로그에서 인스타로 그리고 유튜브를 통해 무려 7년이나 지속할 수 있었다. 그녀뿐만 아니라 어린아이도 온라인 세상에서 화제의 중심이었으며 육아용품 완판 스타로 등극했다.

뺀질이가 인플루엔서 생활을 그만 둔 이유는 바로 아이 때문이다. 싱글일 때도 결혼 후에도 자신을 향한 비난 댓글은 꾸준히 있었지만 감당할 수 있었다. 돈이 되니까. 그런데 육아맘 컨셉 이후 말도 못 하는 아들에게 남겨진 악플(악성 댓글)은 참기 힘들었다. '죽어라' '왜 태어났냐?' 이유도 의도도 알 수 없는 가시가 돋친 말에 뺀질이는 모든 온라인 계정에서 탈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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