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하빈의 시와 함께] 귀뚜라미/강문숙(1955~ )  

입력 2018-10-02 14:31:56 수정 2018-10-03 19:35:29

장하빈 시인 · 문학의 집
장하빈 시인 · 문학의 집 '다락헌' 상주작가

귀뚜라미는 날개가 책이어서 매일 밤 가을 읽는데

나는 책 한 권 읽지 못하고 가을을 탕진했다

아찔한 비렁길 걷다가 겨우 돌아와 창을 연다

귀뚜라미 한 마리 죽어 있다

두 다리 쭈욱 뻗은 채, 소슬한 바람에도 몸이 통째로 흔들린다

그는 책을 다 읽기도 전에, 가을이 다 가기도 전에

그만 목숨을 다한 것이다

읽다가 덮어둔 책장을 펼친다, 다시

가을비 부슬부슬 긴 활자를 긋는다

눈이 아파 책장 덮는다, 나는 아직 멀었다

가을을 덮는다

그해 가을은 온통 절벽 같은 문장으로 피칠갑이었다

―시집 『신비한 저녁이 오다』 (만인사, 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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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리의 악사로 불리는 귀뚜라미는 날개를 비벼서 아름다운 소리를 낸다. 짝짓기를 위한 구애의 울음이다. 추야월 연인의 집 창가에서 부르는 소야곡(小夜曲)과 진배없다. 여기에 시인은 "귀뚜라미는 날개가 책이어서" 밤마다 귀뚤귀뚤 가을을 읽는다고 했다. 독서나 독경의 의미다. 따라서 귀뚜라미 날개는 악기인 동시에 책이다. 한데 이를 어찌한담? 가을의 전령사인 귀뚜라미가 가을이 채 끝나기도 전에 가을을 읽다 말고 책장을 덮어 버렸으니….

"책 한 권 읽지 못하고 가을을 탕진했"던 내가 죽은 귀뚜라미를 대신하여, 읽다가 덮어둔 책장을 다시 펼쳐본다. 귀뚜라미를 조문이라도 하듯 가을비가 부슬부슬 활자를 적신다. 아직도 비렁길 위에 놓인 내 마음이 흔들려 책장을 덮는다. 미완의 가을로 남겨둔다. 허허, 이건 또 웬일인가? 시인 자신도 모르게 귀뚜라미 울음을 받아써서 "절벽 같은 문장으로" 이렇게 시 한 편 완성해냈다. 이 가을 못다 채우고 떠난 자들에게 바친다.

시인 · 문학의 집 '다락헌' 상주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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