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시윤 수필가
오래된 나무가 있다. 가파른 둔덕 구석에 서 있는 나무. 요즘은 가던 길 멈추고 나무를 올려다보게 된다. 무질서한 듯 질서를 지키며 뻗은 가지들, 가지들을 따라 질서를 지키며 돋아난 잎들. 더위가 온 도시를 휘덮던 지난여름, 숨통 옥죄는 더위를 이기지 못해 밤낮을 에어컨으로 견딜 때, 나무는 말없이 제 몸만큼의 넓고 깊은 그늘을 만들었다는 것을 나는 미처 알지 못했다.
나무가 거기 서 있다는 것을 알게 된 건 불과 얼마 전이었다. 아이를 데리고 놀이터에 가고 있었다. 노인들이 돗자리를 깔고 장기를 두고 있었다. 고요한 한낮에 딱, 딱, 딱, 장기 두는 소리만 더디게 들렸다. "장 받으시게." 노인의 음성이 제법 격조 있게 들렸다. 돗자리 밖에 가지런히 벗어 놓은 신발과 지팡이들. 다음 날도 그다음 날도 그늘은 놀이터 가는 길목 그 어디쯤에서 나와 마주쳤다.
가을 초입, 그늘 아래 낯선 의자가 하나 놓였다. 하루가 지나니 또 하나의 의자가 더해졌다. 며칠이 지나니 의자는 네댓 개가 되어있었다. 모양도 높이도 모두 제각각이고, 흠집이 나거나 색깔이 벗겨진 오래된 것들이었다. 의자는 거기서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었다. 늘 비어 있는 듯했으나 그늘이 넓어지는 오후 무렵이면 노인들은 성치 않은 걸음으로 의자를 찾아오곤 했다.
오래된 나무 아래 낡은 의자들이 있고, 노인들이 앉아 있다. 살아온 시간을 구경하듯 먼 곳을 바라보는 시선엔 때론 쓸쓸하고 적막함이 묻어 있다. 명절에 다녀간 자식들은 다음 명절이 되어야 온다는 것을 잘 알면서도, 노인은 습관처럼 기다리고 또 기다린다. 아이들이 놀이터로 가는 모습을 보며 내 손자 남의 손자 가리지 않고 그저 "예쁘다, 예쁘다" 할 것이고, "몇 살이니? 밥은 묵었나?" 살펴줄 것이고, "엄마, 아빠, 선생님 말씀 잘 듣고 착한 어린이 되거라" 다독여 주시리라. 바람에 묻어 가는 그 말씀 매일매일 듣고 또 들으며, 내 아이는 그 말씀들 가슴에 품고 저도 모르게 예쁘고 착하게 자라날 것이라 믿는다.
나는 가만히 노인들이 떠난 빈 의자에 앉는다. 스치는 바람은 맑고, 시간은 고요하며, 주변은 적막하며, 그리하여 지나간 기억은 더 또렷해져서 그리워진다. 모든 것은 순간이 아닐까. 시간이 흐르는 동안 내 청춘도 소리 없이 저물 것이고, 언젠가는 내 걸음도 느려지고 둔해지겠지. 걸음이 느려지는 동안 내 모든 것은 또 얼마나 더뎌질까. 시간이 빠르게 흘러간다는 것을 오래된 나무는 알고 있으리. 늙는다는 것은 더디고 낡은 것이 아니라 깊어지고 넓어진다는 것을 이 의자는 알고 있으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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