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주 선생이 쓴 '가족단명첩' 최초 공개… 안동댐 수몰민 기록화 작업 중 발견

입력 2018-09-13 18:32:10

1918년 11월 20일 석주 이상룡 선생이 직접 작성한 것으로 보이는
1918년 11월 20일 석주 이상룡 선생이 직접 작성한 것으로 보이는 '가족단명첩'의 모습. 실체가 공개된 것은 처음이다. 엄재진 기자

석주 이상룡 선생이 국치를 당했던 경술년에 첫 결성한 것으로 알려진 '가족단'의 명첩이 최초 공개됐다.

그동안 가족단명첩은 석주유고와 아들 동구 이준형 선생의 문집에서 언급된 적은 있지만, 실제로 존재가 드러난 것은 처음이다. 이 때문에 독립운동사 연구에 귀중한 자료가 될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가족단명첩은 안동시와 (사)경북기록문화연구원이 지난 5월부터 추진하고 있는 '안동댐 수몰지역 생활사 복원 아카이브 사업' 과정에서 발견됐다.

안동댐 준공으로 마을이 수몰된 안동 도곡동 출신의 고성 이씨 이종기(91) 씨가 보관하고 있던 것이다.

당시 안동 도곡동은 종손인 석주 선생을 비롯한 고성 이씨 일가가 마을의 주를 이뤘지만, 안동댐으로 인한 수몰로 문화재 대부분이 고려대에 기증됐고 현재의 임청각으로 옮겨오게 됐다.

1918년 11월 20일 석주 이상룡 선생이 직접 작성한 것으로 보이는
1918년 11월 20일 석주 이상룡 선생이 직접 작성한 것으로 보이는 '가족단명첩'의 모습. 실체가 공개된 것은 처음이다. 엄재진 기자

이 서책의 표지에는 '가족단명첩'이라는 제목과 함께 1918년 11월 20일이라고 작성일자가 적혀 있다.

총 65명이 수록된 이 명첩의 맨 앞에는 '이상의'라는 이름이 언급돼 있는데 이는 석주 선생이다.

석주 선생은 가족단이 구성된 지 얼마 안 돼 만주로 망명했다. 석주 선생 아들 이준형을 비롯해 가족단 중 3분의 1 가량도 만주로 건너갔다.

남은 사람들은 후방에서 지원 활동을 하면서 문중을 지켰다. 이 가족단은 이준형과 손부 허은 여사 일가가 귀국한 뒤 도곡에 들어와 살게 되면서 1939년에 정식으로 해체됐다.

가족단명첩 본문 중에는 석주 이상룡 선생이 직접 쓴 가족단 취지서도 있는 것으로 확인됐다.

취지문에는 석주 선생이 만주로 떠나면서 종손 부재 시 가족 운영을 당부하는 말, 경술국치로 나라 잃음에 대한 가문과 문중 사람들의 각오, 삶을 당부하는 말이 적혀 있다.

특히 명첩이 1918년 재작성된 것은 독립운동 군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임청각을 매각하고자 안동을 방문했을 때 이뤄진 것으로 짐작된다. 서책 소장자는 추후 임청각을 고성 이씨 문중이 되찾을 수 있었던 것도 이 명첩이 있었기에 가능했을 것으로 추정했다.

독립운동사를 발전시킬 새로운 자료가 등장한 만큼 학계에서는 빠른 공개와 연구가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한준호 경상북도독립운동기념관 학예연구원은 "기존에 석주유고와 동구유고에서 언급만 되던 서책이 발견됐다는 것만 해도 그 가치가 높다"며 "가족단이 국치 과정에서 문중을 보호하려는 차원에서 결성된 것인지 독립운동을 지원하고자 만든 것인지에 대해서는 연구를 해 봐야 밝혀질 것 같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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