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혜영의 근대문학을 읽다] 이효석 '벽공무한'과 신기루를 좇는 젊은이들

입력 2018-09-13 11:12:11 수정 2018-09-13 20:19:49

'벽공무한' 매일신보 1940년 3월5일 자

근대소설 등장인물 중 운이 좋은 순위를 정한다면 대략 이효석 '벽공무한'(1940) 주인공이 최상위를 차지할 것이다. '천일마'라는 독특한 이름의 이 주인공은 재미로 산 복권이 1등에 당첨되어 지금 돈으로 1억 원이 넘는 상금을 받는다. 그리고 심심해서 해 본 경마에서 적지 않은 돈을 딴다. 이 뿐인가. 푸른 눈의 러시아 금발 미인을 아내로 맞아들여 주변의 부러움도 한 몸에 받는다. 채 한 달도 되지 않는 짧은 기간 동안 이 남자는 집 살 돈에 사업자금을 챙긴 것은 물론, 아내까지 얻은 것이다. 행운이 내려퍼부어졌다고 할만하다.

'벽공무한'은 주인공 천일마가 만주국 신경행 열차에 몸을 실으면서 시작된다. 일자리를 얻지 못해 고전하던 중 우연히 모신문사의 하얼빈 교향악단 유치업무를 맡게 되었기 때문이다. 천일마는 업무차 방문한 하얼빈에서 복권당첨, 경마 상금 획득, 금발미인과의 연애 등 모든 행운을 한 손에 거머쥔다. 이 행운에 걸맞게 소설 제목 역시 벽공무한(碧空無限), 푸른 하늘이 끝없이 이어진다는 희망 찬 의미를 띠고 있다. 그러나 푸른 하늘, 맑은 날씨가 계속되는 곳이란 우리가 몸담고 사는 이 세상 그 어디에도 없다.

그런 점에서 벽공무한이란 일종의 신기루이다. 벽공무한이 신기루인 것처럼 천일마가 딛고 선 삶의 기반 역시 너무나 불안정해서 신기루처럼 비현실적이다. 그가 잡은 삶의 기회는 복권, 경마 등 일종의 '한탕주의'로 그냥 운이 좋았을 뿐 능력과는 무관한 것이다. 그래서 그 기회는 언제 어떻게 눈앞에서 갑자기 사라질 것인지 알 수가 없다. 게다가 말이 좋아서 금발의 러시아 미인이지, 폐쇄적 조선 사회에서 한복을 입은 금발미인과의 결혼생활이란 것은 복권이 가져다 준 행운만큼이나 비현실적이고 위험하다.

한탕주의에 빠져있기는 천일마의 친우 유만해 역시 마찬가지다. 그는 경성제대 법학부 졸업이라는 개인적 능력과 부모로부터 물려받은 거액의 재산에도 불구하고 금광에 미쳐서는 몰락의 길을 걷는다. 식민지 조선의 젊은이들은 취업의 기회도, 미래도 기대할 수 없었다. 그래서 그들은 천일마나 유만해처럼 복권이나, 금광, 경마와 같은 일종의 신기루를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능력을 펼칠 기회도, 빛나는 이상을 받아 줄 나라도 없는 상황에서 신기루에 마음을 기대는 것, 그 이외 그들이 무엇을 할 수 있었을까.

희망 없고, 암울했던 식민지 현실에서 벗어난 지 칠 십 년도 더 지났다. 그러나 우리의 젊은이들은 여전히 한탕주의의 신기루에 매달려 있는 듯하다. 최근 대학생들이 '갭투자'라는 방식으로 서울 아파트 투기에 나서고 있다고 한다. 취업은 어렵고 미래는 불투명한 한국 현실이 신기루를 향해 뛰어가도록 그들을 몰아대고 있는 것이다. '벽공무한'이란 어느 곳에도 존재하지 않는 것이며, 인생이란 맑은 날보다 흐린 날이 많으니 성실하게 천천히 발걸음을 옮기면 언젠가는 맑은 날을 만나게 될 것이라는 충고 따위를 받아들일 여유가 그들에게는 없다. 지금의 우리 사회는 젊은 세대의 이 깊은 절망감과 무력감 위에 서 있다. 보이지 않는 미래를 어떻게 열어갈 것인가 우리 모두 생각해볼 때이다.

경북북부연구원 연구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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