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소드 연기, 배우가 거머쥔 양날의 검
극중 캐릭터와 완벽하다 싶을 정도로 일치된 상태에서 보여주는 배우들의 열연을 두고 흔히 '메소드 연기'라는 말을 쓴다. 배우가 캐릭터 그 자체가 된 상태를 말 하는데 러시아의 연극배우이자 연출가인 콘스탄틴 스타니슬라프스키의 이론 '스타니슬라프스키 시스템'에서 유래된 용어다. 호흡이나 발성 등 기술적인 면이 부각되는 기존 연기방식과 상반된 것으로 극의 완성도를 높이고 관객의 몰입도를 높이기 위해 배우로 하여금 극중 인물에 동화되길 주문한다. 캐릭터를 입체적으로 표현하고 캐릭터의 감정을 있는 그대로 보여주니 제대로 표현하기만 하면 배우 스스로 만족감을 높이고 관객의 찬사를 끌어내기에도 적합하다. 그래서 많은 배우들이 메소드 연기를 시도하지만 사실 캐릭터와 동화된 상태를 유지한다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니다. 그나마 밝은 캐릭터라면 배우도 좋은 컨디션을 유지하는데 도움이 되겠지만 혹 어두운 인물을 표현해야하는 상황이라면 괴로운 상태가 지속될 수밖에 없다. 결국 메소드 연기를 지향한다는 것은 배우 본인이 그로 인해 동반되는 리스크를 고스란히 감수해야만 한다는 말이다.

# '시간' 김정현, 메소드 연기의 부작용
최근 MBC 수목극 '시간'의 주연배우 김정현이 촬영이 진행되고 있는 상황에 돌연 하차를 선언하는 일이 발생했다. 시한부 선고를 받은 재벌가 2세 역의 김정현은 드라마 시작 전부터 캐릭터와 자신을 동일시하며 스스로 바짝 날을 세웠다. 심지어 드라마를 알리는 제작발표회 무대에 올라 시종일관 무표정으로 일관하며 현장에 있던 동료배우들과 관계자, 또 기자들을 당황하게 만들었다. 동료배우들과의 사진촬영이 이뤄질 때도 혼자서 먼 곳을 바라보며 넋이 나간 것 처럼 표정을 짓다가 그 이유를 묻는 질문에 "촬영이 있을 때나 없을 때나 극중 인물처럼 살기 위해 노력 중"이라고 대답했다. 시한부 인생을 연기하기 위해 그 캐릭터에 빠져 현실과 연기를 구분하지 못하는 단계까지 와 버린 셈이다. 드라마 제작발표회에서 주연배우는 작업을 함께 하는 모든 이들을 대표해 무대에 오르게 되는데 이날 김정현은 주연으로 작품을 홍보한 게 아니라 행사를 망쳐버린 주범이 돼 질타를 받아야했다.

다행히 드라마가 방영된 후 김정현은 연기 자체만으로 면죄부를 받았다. 중요한 행사 따위 아랑곳하지 않고 메소드 연기에 집착한 만큼 그에 걸맞은 멋진 연기로 캐릭터를 잘 살려내 드라마의 몰입도를 높였다. 일단 그렇게 보이긴 했다.

하지만 문제가 발생했다. 캐릭터에 몰입하느라 식이장애와 수면장애를 겪고 있던 김정현은 "더 이상 버티지 못하겠다"고 호소하며 돌연 하차를 선언했다. 주인공을 연기하고 있던 배우가 심지어 극이 진행되고 있는 도중에 그만두겠다고 자리를 털고 일어났으니 참 이례적인 사건이다. 경험치가 부족한 배우가 능력을 맹신하고 폭주하다 스스로를 망치고 자신의 주연 작에 폐를 끼치게 된 셈이다. 정신과 신체의 건강 이슈인 만큼 제작진 입장에서도 차마 김정현을 잡지 못했을 터. 결과적으로 이 어린 배우의 욕심은 '열정'이 아닌 '객기'와 '치기'로 해석할 수밖에 없다. 세 편의 드라마를 거치며 네 번째 작품에서 제대로 주목받을 수 있는 위치에 오르게 된 김정현은 당분간 치료에 전념하겠다는 입장을 밝혔다. 김정현 스스로가 자신의 좋은 흐름을 끊어버려 안타깝다.

#극찬과 고통 사이, 배우는 감정노동자
배우는 '감정노동자'다. 매번 새로운 캐릭터를 만나 극중 인물의 삶을 살아야하는 것 뿐 아니라 톱스타를 제외하고는 대부분 타인의 선택을 통해 일거리를 제공받아야한다. 정신적 스트레스가 심할 수밖에 없다. 좋은 작품에 캐스팅이 됐을 경우 자신의 역량을 최대한 발휘해 긍정적인 평가를 얻어야만 차기작이 확보된다. 안정적으로 인기를 유지하며 꾸준히 작품을 확보하며 사는 배우는, 특히 자신이 직접 작품을 고를 수 있는 배우는 사실상 이 직업군의 상위 1%에 불과하다. 그 1%도 한 발 삐끗하면 순간 나락으로 떨어진다. 배우라는 직업이 그렇다.

상황이 이렇다보니 배우는 자신에게 주어진 기회를 살리기 위해 최선의 노력을 할 수 밖에 없고, 혹 굳이 이런 직업적 차원의 문제가 아니라고 하더라도 연기를 하는 이들이라면 그 직업적 특징과 성향에 따라 캐릭터에 빠져들 수밖에 없다. 그리고 프로페셔널이라면 그렇게 캐릭터에 빠져드는 것이 당연한 일이다.
문제는 그 '빠져듦'의 정도다. 연기력으로 국내 최정상급이라고 할 수 있는 배우 최민식 역시 캐릭터로 인해 힘들었던 시기에 대해 말했던 적이 있다. 대표적인 예가 김지운 감독의 영화 '악마를 보았다'에 출연할 때다. 최민식이 맡은 역할은 사이코패스 연쇄살인마. 최민식의 연기 인생에 처음 만난 캐릭터이기도 하다. 이 영화를 마친 후 최민식은 캐릭터 때문에 실제로 성격이 과격해지고 예민해져 스스로 섬뜩한 느낌이 들었다며 "다시는 살인마 연기를 하지 않겠다"고 말했다. 이건 '명량'에서 고뇌하는 이순신을 연기하는 거나 '파이란'의 3류 건달인생을 표현하며 잠시 그 인물로 살아보는 것과 결이 다른 얘기다. 최민식 정도 되는 배우도 캐릭터에 빠져드는 자신의 감정 상태를 컨트롤하는 것이 쉽지 않았다는 말이다.
김명민의 메소드 연기도 한때 크게 화제였다. 메소드 연기로 가장 주목받았던 작품은 영화 '내 사랑 내 곁에'. 루게릭병 환자를 표현하기 위해 무려 20kg을 감량하는 초강수를 뒀다. 앙상하게 마른 몸은 물론이고 심적으로도 나약해진 인물을 섬세하게 표현해 개봉 당시 크게 화제가 됐다. 연기를 대하는 배우 김명민의 자세에 대해서도 극찬이 쏟아졌다. 다만, 배우의 건강은 별개의 문제였다. 김명민은 감량한 체중을 유지하기 위해 촬영 기간 내내 제대로 된 식사를 하지 못한 채 지냈는데 그 이후 급격히 건강이 악화돼 장기간 고생했다.
최민수 역시 캐릭터에 따라 실생활에서도 말투와 행동패턴이 달라지는 배우다. 거칠고 무게 있는 캐릭터를 연기할 때는 옆 사람들까지 불편하게 만들 정도로 인물과 동화된 채 살아가고, 순박한 인물을 표현해야할 때는 '이 사람이 원래 저랬나'라는 생각이 들게 할 만큼 확 달라진 모습을 보이곤 한다. 핵잠수함 속에서 벌어지는 일을 그린 영화 '유령'을 찍을 당시에는 배역에 몰입해 잠수함 세트에서 거의 숙식을 해결하며 지냈다는 일화가 있다.
해외에도 이런 예가 있다. 고 히스 레저는 '다크 나이트' 촬영 당시 조커 캐릭터를 표현하기 위해 혼자 방에 틀어박혀 광기 어린 글을 쓰며 스스로 조커에 동화되는 작업을 했다. 그리고 개봉 후 히스 레저의 조커는 전 세계 관객의 박수를 끌어내며 최고의 연기로 극찬을 받았다. 크리스찬 베일이나 다니엘 데이 루이스도 메소드 연기로 화제가 되곤 했다.
배우가 캐릭터에 동화되는 작업은 굳이 메소드 연기를 지향하든 그렇지 않든 어쨌든 연기하는 과정에 있어 필수적으로 동반되는 작업이다. 다만, 앞서 나열한 베테랑급 명배우들도 캐릭터와 일치된 후 다시 빠져나오는 데에 꽤 시간이 걸리거나 심적으로 힘들어했던 경험을 털어놓곤 했다. 배우는 연기를 떠나 배우 본인의 삶을 살아야하는 '사람'이고 그러니 문제는 결국 얼마나 기술적으로 잘 몰입하고 또 잘 빠져나올 수 있는지가 관건이다. 능력 면에서 최고로 인정받는 배우들마저 힘들어했던 패턴을 아직 덜 여문 배우가 구사했을 때 어떤 부작용이 생기는지, 드라마 '시간'의 김정현이 여실히 보여줬다. 캐릭터에 빠져들어 좋은 연기를 보여주고 다시 빠져나와 일상으로 돌아왔다 또 다른 캐릭터를 만나는 것. 쉽지 않겠지만 이런 순환 속에서 대중에 어필하는 연기를 보여줘야 하는 것이 배우의 숙명이다. 이 순환을 순조롭게 이뤄내는 것 역시 배우의 능력이다.
정달해(대중문화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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