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원대 교수
얼마 전 가까운 친구의 아버지가 세상을 떠났습니다. 친구는 아버지를, 가족밖에 몰랐던 자상하고 따뜻한 남자로 기억했습니다. 그런 아버지가 3년 전 아내를 잃고 홀로 남아 한 번도 경험해보지 못했을 외로움과 싸우며 견디며, 얼마나 힘들었을 지를 생각하면 자식이면서도 아무 것도 해주지 못한 자신이 죄인이라며 눈물을 멈추지 않았습니다.
세상을 떠난 부모가 있으면 느끼시지요? 세상을 떠난 후에 오히려 더 가깝게 느끼게 되는 존재가 바로 어머니요, 아버지라는 사실 말입니다. 지금 우리가 매혹되는 별빛이 이미 죽은 별일 수 있는 이치와 같을까요? 살아생전 받고 또 받았으면서도 해준 것이 뭐가 있냐며 불만만 돌려주었던 자식도 부모가 돌아가시고 나면 값을 수 없는 빚, 생명의 빚의 무거움을 알게 됩니다.
이번 주에는 음력 7월 15일, 백중이 있네요. 백중의 전설, 목련존자와 그 어머니 이야기를 아시나요? 처음으로 그 이야기를 들었을 때 나는 높디높은 존자에게 그런 한심한 어머니가 있다는 사실이 낯설면서도 친근했습니다.
백석의 시 중에 '흰 바람벽이 있어'라는 시가 있습니다. 백석의 시는 입으로 읊으면 훨씬 좋습니다. "하늘이 이 세상을 내일 적에 그가 가장 귀해 하고/ 사랑하는 것들은 모두/ 가난하고 외롭고 높고 쓸쓸하니/ 그리고 언제나 넘치는 사랑과 슬픔 속에 살도록 한 것이다."
내게 존자는 바로 가난하고 외롭고 높고 쓸쓸한 존재였습니다. 그런데 그 존자를 낳아주고 길러준 어머니가 부자였지만 베풀 줄 모르고, 살생을 즐겨 뒷마당에서는 늘 짐승을 잡아 피를 보고, 남에 대해서는 의심이 많고, 심술 맞고, 거짓말 잘 하는 기막힌 존재였다는 것, 아니겠습니까?
좋은 것, 맛있는 것을 아무리 잘 먹여도 우리 몸은 끝이 있고, 많은 하인을 거느린 채 좋은 집에서 명품 옷 휘감고 살아도 목숨은 마침이 있습니다. 잘 먹고 잘 입으며 인색하게 살면서 혹여 자기 것을 누가 가져갈까 의심하고 감시하고 화만 냈던 청제부인도 마침내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녀는 어디로 갔을까요? 그녀가 아무리 좋은 아들을 뒀다 해도 천국에 갔을 리 없지요? 그녀는 지옥에 갔습니다. 지옥으로 간 어머니를 두고 수행하는 아들의 심정은 어떤 것일까요?

원효스님이 말했습니다. 자기의 죄를 벗지 못하면 결코 남의 죄를 풀어줄 수 없다(自罪 未脫, 他罪 不贖)고. 그 문장을 가만히 들여다봅니다. 그것은 역으로 남의 죄를 풀어줄 수 있는 경지가 있다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중요한 것은 자기의 죄를 벗어버리며 자기를 풀어주는 힘을 기르는 것이겠습니다. 자기를 풀어준 자, 남을 풀어줄 수 있는 힘이 있을 것입니다. 어머니가 지옥에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목련은 망설임 없이 어머니를 찾아 지옥으로 걸어들어 갑니다.
그런데 지옥은 왜 그리 한량이 없는 지요. 움직일 때마다 칼날이 상처를 입히는 검수지옥, 먹고 또 먹어도 결코 배고픔이 채워지지 않는 아귀지옥, 피와 살이 맷돌에 갈리는 석합지옥, 잠시도 쉬지 못한 채 잿물 속에 쓸려 다니는 회하지옥, 펄펄 끓는 물에 삶기는 화탕지옥, 머리에 불을 인 채로 죽지도 못하는 화분지옥, 지옥, 지옥 … . 뜨겁거나 차갑거나 가혹하거나 비참하거나 괴롭기 그지없는 지옥은 끝이 보이지를 않습니다.
이야기의 전개방식으로 보아 목련존자는 어머니 청제부인을 지옥에서 구해냈겠지요? 그 과정에서 내게는 재미있기도 하고 무섭기도 한 포인트가 있었습니다. 무엇보다도 지옥에서 만난 어머니의 몰골이었습니다. 어머니라 하니 어머니지 한번도 본 적이 없는 몰골이었습니다. 부자였고, 존경받는 집안의 여주인으로서 명령과 지시에 익숙하던 시절은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머리에 불을 인 채 새까맣게 타들어가며 살려달라고, 고함만 치는 참혹한 존재만 남은 겁니다.
삼국유사에서 불국사와 석굴암은 한 사람의 서원으로 지어입니다. 바로 김대성이지요. 그가는 현세의 부모를 위해 불국사를 짓고, 전생의 부모를 위해 석굴암을 짓습니다. 삼국유사의 나오는 그 짧은 이야기를 읽으며 나는 절을 짓는 정신이 바로 우리들의 모든 어머니, 아버지를 위한 것이 아닌가, 했습니다. 어쩌면 일연스님은 그 이야기를 통해 냉정하거나 뜨겁거나 기막히거나 시끄럽거나 한 고통의 바다에서 정신을 잃고 악다구니를 쓰고 사는 중생들이 어쩌면 우리들의 어머니, 아버지일 수 있다는 이야기까지 하고 싶어 한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했습니다.
목련은 살려 달라, 고함치는 어머니의 고통을 두고 볼 수 없어 옥리에게 대신 지옥에 들어가 어머니의 죄값을 갚겠다고 합니다. 존자가 어찌 어머니의 죄를 대신할 수 없다는 것을 몰랐겠습니까? 다만 지옥의 고통에 머리가 타고, 몸이 타고, 마음이 타고, 타고 또 타는데 물 한 방울 삼키지 못하는 어머니에 다한 안타까움인 거지요. 그 자비의 마음이 부처를 움직이고, 세상을 움직이고, 염라대왕을 움직이고, 마침내 어머니를 조금씩조금씩 움직입니다.
목련존자는 어머니로 인해 깊은 슬픔을 경험했지만, 바로 그 경험을 통해 깊은 자비의 실천을 시작합니다. 목련존자의 지옥구제가 시작되는 거지요? '나'를 낳아준, 생명 빚의 어머니를 들끓는 지옥 속에 둘 수 없어 구하러 가는 데서 시작한 지옥행은 지옥을 공부하는 치열한 만행의 시간이기도 하지 않았을까요? 한 사람을 구하려는 지옥행이 지옥의 중생들을 건져야겠다는 서원으로 성장한 것입니다. 부모를 통해 나온 우리는 부모를 통해 지옥을 경험하고 지옥을 충분히 경험한 후에 천국을 만드는 힘을 갖게 되나 봅니다.
지옥의 중생들을 위해 이 땅을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 경전을 읽어 마음에 새기고, 살생을 하지 않고, '나'와 다른 생명을 아끼고, 마음공부를 하는 이들에게 공양을 올리는 일이라면서요? 그러다 보면 겸손을 배우고, 화를 낼 일이 줄고, 욕심을 다스릴 수 있는 힘이 생기겠지요? 원효대사가 말했습니다.
아무도 막지 않는 천국에 이르는 이가 적은 것은 탐욕과 분노와 어리석음이라는 삼독 번뇌로 자기 삶의 살림을 삼기 때문이고, 아무도 유혹하지 않는 악도에 들어서는 이가 많은 것은 4대(지·수·화·풍) 색신, 오욕락(재물·색·먹는 일·명예·수명)으로 허망한 마음의 보배를 삼기 때문(無妨天堂 少往至者 三毒煩惱 爲自家財, 無誘惡道 多往入者이 四蛇五欲 爲妄心寶)이라고.
이번 백중엔 무슨 계획이 있으신가요? 꼭 절에 가거나 하지 않더라도 어머니, 아버지와 식사를 하거나 혹은 어머니, 아버지를 모시듯 주변의 어른들에게 시원한 콩국수 한 그릇 대접하는 건 어떨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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