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병철 삼성 창업주가 1982년 봄 미국을 찾았다. 미국의 추락을 목도한 그는 '호암자전'에 이렇게 썼다. "일본의 철강이나 자동차가 미국 시장을 휩쓸고 있었다. 전통산업뿐만 아니었다. 미국이 설계한 생산 설비를 도입, 대량생산 체제를 갖춘 일본은 반도체마저 미국 시장을 침식하고 있었다. 미국은 일본 반도체 제품의 대량 공세에 밀려 경영난을 겪고 있었다."
반도체에 미래가 있다고 판단한 그는 1983년 2월 8일 일본 도쿄에서 대규모 반도체 설비투자를 지시했다. 2·8 도쿄 선언이었다. 곧바로 삼성은 경기도 기흥에 반도체공장 건설 공사를 시작했고 1984년 3월 완공했다. 세계 세 번째로 한국이 반도체 생산국으로 이름을 올리게 된 것이다.
2·8 도쿄 선언이 한국 경제에 가장 큰 영향을 준 순간 1위로 꼽혔다. 한국CCO(최고홍보책임자)클럽이 국내 국책·민간연구소 11곳의 최고경영자(CEO)를 대상으로 설문 조사한 결과다. 11곳 연구소 CEO 모두가 이병철의 삼성 반도체 진출 선언을 선택했다. 정주영의 현대차 포니 첫 생산, 포항종합제철 준공, 금성사 국산 첫 라디오 생산, 정주영의 거북선 그림으로 유조선 수주 등이 같이 선정됐다.
대한민국이 세계 12위 경제 대국이 된 것은 이병철 정주영 박태준 구인회 같은 거인(巨人)들 덕분이었다. 단순히 큰 부(富)를 이뤘다고 이들을 거인이라고 부르는 게 아니다. 거인들이 결단한 순간순간에 도전 열정 헌신 애국 창조 혁신 등이 녹아들어 있기 때문이다. 거인들이 활동하던 시대와 지금은 상황이 다르다고 할 수 있겠지만 거인들이 남긴 교훈은 내일의 나침반으로 삼을 만하다.
반도체 외에 뚜렷한 미래 먹을거리를 마련하지 못한 상황에서, 그 반도체마저 중국에 추월당하기 직전인 순간에서 한국 경제에 거인이 있는가를 묻지 않을 수 없다. 자식들이 물의를 일으켜 아니면 본인 잘못으로 사법기관에 툭하면 불려나오는 기업 총수들이 미래를 설계할 수 있을까. 현금을 쌓아두고 보신에 치중하거나 동네 골목상권까지 잡아먹으려 혈안인 기업주들에게 무엇을 기대할 수 있다는 말인가. 거인을 찾기 어려운 한국 경제, 미래가 어둡기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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