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말 몽골에 맞서 개혁정책, 왕권강화 펼쳤던 공민왕
13세기 동북아의 정치세력으로 성장해가던 고려왕조가 대제국 몽골과 맞닥뜨린건 중세 한반도 역사에서 가장 큰 비극이었다.
1231년 몽골의 침입부터 1270년 개경으로 환도한 이후 공민왕대까지 약 1백년 동안 고려는 몽골의 가혹한 정치적 간섭과 지배를 받았다. 양국은 '부마국(駙馬國) 체제'라는 매우 독특한 방식으로 관계를 유지해갔다. 이런 종속, 식민관계에 이상 조짐이 나타난 건 1356년. 공민왕은 교서를 발표하면서 원의 연호를 정지해버렸다. 제국과의 사대 관계를 중단하겠다는 조치였다. 이렇게 '반원 개혁' 기치를 높였던 공민왕의 고려왕조는 그가 죽은 후 20년이 채못돼 쇠퇴의 길을 걷다 이성계에게 왕조를 넘겨주고 만다. 격동의 고려말 공민왕 시대 속으로 들어가 보자.
◆몽골에 맞서 과감한 반원, 개혁 정책
이 책은 공민왕의 즉위 과정에 대한 설명부터 시작된다. 공민왕은 27대 충숙왕의 차남이었다. 장남 충혜왕이 정치에 손 놓고 여색을 탐하다가 원나라 관리들에게 체포돼 끌려갔다가 유배도중 비명횡사하고 말았다. 그후 그의 아들들이 왕위에 올랐으나 어린 왕들의 정치적 리더십에는 한계가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속국을 안정시키고자 하는 원나라의 대안이 강릉대군, 즉 공민왕이었다.
그러나 어렵게 왕위에 오른 공민왕은 그무렵 원나라의 쇠퇴를 간파한다. 대륙에 원명교체 움직임이 일고있었기 때문이다. 공민왕은 원나라의 기대를 저버리고 과감한 반원 개혁 정책을 편다. 친원파들을 숙청하고 원나라의 연호 폐지를 선언하며 탈원(脫元) 정책을 몰아갔다. 고려는 서북 국경지대서 군사행동(쌍성총관부 공격)을 하면서 원과 대립하기도 했다. 자극 받은 원나라가 대군을 몰아 고려를 치겠다고 협박하자, 왕은 자신의 명령에 충실히 따랐던 심복들을 숙청하며 원의 눈치를 봤다.
여기서 저자는 공민왕의 '불안 코드'를 읽어낸다. 명(明)시조 주원장이 부상하고 있었지만 세계를 지배했던 몽골의 위세는 여전했고, 조정에 친원파들은 막강한 권력을 행사하고 있었다. 공민왕은 친원파들을 무찌르고서도 원으로부터 용기 있게 벗어나지 못했던 것이다.

◆정적, 라이벌 제거하며 왕권강화 집중
역사서에서 공민왕은 의심과 두려움이 많은 인물로 그려진다. 어느 누구에게도 권력이 집중되는 것을 싫어하여 아무리 가까운 측근이라도 눈 밖에 나면 바로 축출하거나 심지어 가혹한 제거도 불사하는 냉혹한 책략가였다. 이런 왕의 심리를 잘 아는 측근에서는 이를 역이용하여 정적이나 라이벌을 모함에 빠뜨리고 죽음으로 몰아가기도 했다.
그는 원 간섭기 부원(附元) 세력을 장악하지 못했던 선대 왕들의 이야기를 듣고 자라온 인물이다. 실제로 그의 집권기에 반정(反正), 쿠테타 모의가 많이 빚어졌다. 게다가 후사가 없는 자신의 위치로 인해 언제든 왕위에서 쫓겨날 수도 있다는 불안감을 느끼고 있었다. 권세가에게 집중된 토지와 농민을 되찾아주는 전민변정도감(田民辨整都監)은 백성을 위한다는 명분이었지만 한편으로는 권문세족의 힘을 빼는 작업이었다. 신돈을 등용하고, 신하들끼리 모함을 눈감아 주는 등 용인술을 펼친 것도 누구 하나 두드러지는 인물을 키우면 자신이 위험해질 수도 있다는 계산에서 나왔다. 결국 공민왕은 가장 가까운 심복이었던 신돈도 죽이고 만다. 그가 모반을 도모한다는 고발을 듣고 바로 참수해버린 것이다.

◆실패로 끝난 개혁, 고려 왕조 몰락 단초
공민왕의 개혁 정책은 오래 가지 못했다. 중국의 반란 세력인 홍건적이 두 차례나 고려에 쳐들어오고, 김용 등이 그를 시해하려는 흥왕사의 변란을 일으키면서 왕권이 크게 위축됐기 때문이다. 기황후 측에서 공민왕을 폐위시키고 새로운 국왕을 세우려는 공작까지 벌이자 그는 반원 정치를 지속하기 어려웠다.
불안하게 지속되던 공민왕의 통치는 노국공주가 죽자 실의에 빠져 국정을 놔버리고 결국 심복들에게 살해되고 만다. 이로써 비운의 왕 공민왕은 역사에서 사라진다.
한편으로 원의 간섭기 시기를 긍정적으로 평가한 부분도 눈에 띈다. 즉, 몽골 제국이라는 세계 제국의 가장 가까운 변방으로서 이 무렵 고려 왕조는 세계화 시대의 물결과 세례를 정면으로 받았다는 것이다. 몽골 제국의 수도였던 대도(북경)에는 한창 때 고려인 수만 명이 거주했고, 요양과 심양 지역에는 그 이전부터 고려 유민들이 집단으로 거주하고 있었다. 저자는 이 시기 고려인의 활발한 대륙 진출은 오늘날 미국을 비롯해서 해외로 진출하는 한국인과 비교해도 양적으로 결코 뒤지지 않는다고 분석했다.
이 책은 사료를 바탕으로 공민왕 시대에 벌어진 사건들을 시간 순으로 밀도 있게 기록하고 여기에 개인적 의견을 덧붙여 독자들의 이해를 돕는다. 도구화된 사서(史書)나 박제화된 역사에서 벗어나 명쾌하게 펼쳐지는 필법을 따라가다 보면 고독한 군주였던 공민왕의 실체와 함께 고려말 급변하는 동북아 정세가 한 흐름으로 정리된다. 555쪽, 2만5천원.
◆저자 이승한은=전남대 사학과 박사과정을 수료한 이승한은 시오노 나나미의 '로마인 이야기'에 자극을 받아 '읽히는 역사'를 꿈꿨다. '민족'을 앞세운 도구화된 역사, 단편적 사실로만 이어진 박제화된 역사에서 벗어나 생동감 넘치고 사료에 근거한 역사 서술을 시도해왔다.
주요 저서로는 고려시대 무인정권을 다룬 '고려 무인 이야기'(전4권)와 '쿠빌라이 칸의 일본 원정과 충렬왕'(몽골 제국과 고려 1), '혼혈 왕 충선왕, 그 경계인의 삶과 시대'(몽골 제국과 고려 2), '고려 왕조의 위기, 혹은 세계화 시대'(몽골 제국과 고려 3)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