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강산에서 제21차 이산가족 상봉 앞둔 금문자 씨의 사연

"오빠는 참 재능 넘치는 사람이었어요. 오죽하면 별명이 '챠푸링'(찰리 채플린의 일본식 발음)이었을까요."
65년 만에 접한 그리운 오빠의 소식. 수십년 기다림의 끝은 영원한 이별이지만 금문자(81) 씨는 벅찬 눈물을 흘렸다. "사는 곳은 커녕 생사도 몰랐는데…. 오빠의 혈육을 만날 수 있다니 정말 기쁩니다."
7남매 중 셋째인 금 씨는 장남인 오빠 고 금동일(1931~1998) 씨를 유독 따랐다. 그가 기억하는 오빠는 꿈이 많은 사나이였다. 화학과 물리 등에 관심이 많던 오빠는 중학교 시절 '흰 비누'를 만드는 화학 수업 과제를 누구보다 빨리 끝냈다. 금 씨는 "워낙 똑똑하고 다방면에 관심이 많은 사람이었다"고 회상했다.
"오빠는 유머 감각도 뛰어났어요. 어느 비 오는 날 운동화에 구멍이 났다고 했더니 '구멍을 하나 더 내서 물이 새게 하라'고 말해 한참을 웃었던 기억이 나요. 아버지를 닮은 그런 유머 감각 덕분에 챠푸링이라고 불렸어요."고 말했다.
금 씨에겐 1949년 크리스마스 무렵 오빠가 보내준 선물이 가장 선명한 기억으로 남아있다. 서울 경동중학교에 다니던 오빠는 '어린이나라 소년세계'라는 잡지와 성탄절 카드를 대구의 동생들에게 보내왔다.
잡지에 실린 박목월 시인의 싯구에 감명받은 금 씨는 그때부터 교사의 꿈을 키웠다. 그는 "유쾌하고 문학적이던 오빠를 존경하고 사랑했다"고 되뇌였다.
그러나 6·25전쟁은 애틋했던 남매를 갈라놨다. 오빠는 전쟁이 발발한 뒤 소식이 뚝 끊겼다. 금 씨 가족은 얼마 후 통역관으로 일하던 친지를 통해 '부산의 서면 포로수용소에 동일이가 있다'는 소식을 들었다.
금 씨는 "죽은 줄 알았던 오빠 소식을 듣고 정말 기뻤다"면서 "수용소로 오빠를 면회갔던 부모님은 오빠와 탁구를 치기도 했다"고 회상했다.
1953년 7월 정전협정과 함께 영천에서 포로들이 석방된다는 소식도 들렸다. 그러나 부리나케 영천으로 향한 부모는 끝내 아들을 만나지 못했다. 아들을 볼 수 있을 것이라는 믿음이 깨진 금 씨의 어머니는 피를 토하기도 했다.
금 씨는 서울대를 졸업하고 중·고등학교에서 아이들을 가르쳤다. "오빠가 보내준 잡지에 나오는 이야기를 풀어놓으면 산만하던 아이들의 눈이 반짝반짝 빛났다"고 했다.
그는 지푸라기를 잡는 심정으로 10년 전 이산가족 상봉 신청을 했고, 오랜 기다림 끝에 올케 박춘봉(86) 씨와 조카 금현철(50) 씨가 생존해 있다는 소식을 들었다.
금 씨는 금강산에서 올케와 조카를 만날 날을 손꼽아 기다리고 있다. 건강 관리를 하며 내의와 학용품, 양말 등 선물도 잔뜩 마련했다. 올케에게 줄 금반지는 2박3일 동안 모두 전할 수 없는 마음 대신해 준비한 선물이다.
"오빠가 내 얘기는 안했는지, 어떤 남편이었는지, 물어볼 것이 너무 많아요. 그런데 막상 만나면 말문이 막힐 것 같아요." 금 씨의 눈에 다시 눈물이 고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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