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장] 대한민국 첫 번째 사람

입력 2018-08-09 13:48:06 수정 2018-10-16 10:58:33

권은태 (사)대구콘텐츠플레폼 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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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화도조약이 체결되었다. 일본은 조선의 해안을 탐사하고 항구를 사용할 권리를 얻었다. 조선은 부단히 노력하여 '일본을 황제의 나라로 명기하지 않는 것'을 얻어냈다. 조선의 관리는 '일이 타당하게 되었다'고 했고 조선의 조정은 그들이 무엇을 잃게 되었는지조차 알지 못했다. 조선이 그렇게 저물고 있었다.

그해 1876년 여름, 황해도 해주의 한 가난한 부부가 어렵게 아들을 얻었다. 난산이었고 젖조차 마음껏 물릴 형편이 못 되었다. 그래도 아이는 자못 굳세었다. 서너 살 무렵엔 천연두를 이겨냈고 예닐곱에 이르자 둘도 없는 개구쟁이가 되었다. 하루는 부러진 숟가락을 가져오면 엿을 준다는 엿장수의 말을 곧이곧대로 듣고선 아버지의 멀쩡한 숟가락을 부러뜨려 꾸중을 들었다. 그리고 어느 여름날엔 장맛비로 마당에 작은 도랑 두 개가 생겨나자 집에 있던 염색 통 두 개를 꺼내와 통째로 들이부었다. 그리고 물길이 합쳐지는 곳에서 붉은색과 푸른색이 서로 만나는 장관을 즐기다 어머니에게 끌려가 매를 맞기도 했다. 돌아보면 누구나 그렇듯 아름다운 시절이었다.

그러나 좋은 날들은 거기까지였다. 집 안은 반상의 차별에 짓눌렸고 나라는 외세의 침탈에 허덕였다. 아이는 일찍 철이 들었고 어린 나이에 세상으로 들어갔다. 뜻을 세워 맹렬하게 공부했으며 사람을 대할 땐 진심을 다했다. 옳은 일을 하려 애썼고 나라를 바로 세우려 분투했다. 그러나 번번이 뜻을 이루지 못했다. 신산한 삶이 계속되고 아이는 소년이, 소년은 어른이 되었다. 그동안 나라는 끝없이 기울다 기어이 일제의 손에 넘어가고 말았다.

그때부터였다. 빼앗긴 나라를 되찾기 위한 긴긴 싸움이 시작되었다. 세 차례의 투옥과 무수한 형벌, 그리고 모진 고문으로 온몸이 찢기고 부서지기를 반복했고 망명 생활 27년 동안 갖은 풍파와 시련을 겪어야 했다. 가족도 온전하지 못했다. 하나뿐인 딸아이가 일곱 살 나이로 눈을 감을 때 그는 형무소에 갇혀 있었다. 타국을 전전하다 아내를 잃었고 아들마저 그를 따르다 병을 얻어 세상을 떠났다. 그렇게 몸과 마음이 하루도 성할 날이 없었다. 하지만 일본 헌병에 끌려가 밤새 매달려 매질을 당하면서도 '나는 이들처럼 밤을 새워가며 독립운동을 했던가?'라고 자문할 만큼 늘 스스로를 다잡았다.

일제가 패망하고 몇 달 뒤, 그는 꿈에 그리던 고국으로 돌아왔지만 여전히 편할 날이 없었다. 미처 빼내지 못한 총탄과 온갖 상흔을 몸에 지닌 채 조국이 남북으로 동강나는 것을 막으려 동분서주하다 끝내 흉탄에 쓰러지고 말았다. 그가 죽자 흰옷 입은 사람들이 길마다 거리마다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백만의 상주가 상여를 따랐고 걸음걸음 사람들이 애달피 울고 또 울었다. 노산 선생이 조사를 지었다.

"어허 여기 발 구르며 우는 소리/ 지금 저기 아우성치며 우는 소리/ 하늘도 울고 땅도 울고/ 이 겨레 이 강산이 미친 듯 우는 소리를/ 임이여 듣습니까?/ 임이여 듣습니까?"

그는 바위처럼 단단하고 햇살처럼 따스했다. 평생을 배우고 또 가르치며 해방된 조국 대한민국이 문화가 꽃피는 나라,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나라가 되기를 원했다. 그는 첫 번째 대한민국 사람, '백범 김구'였다. 다시 광복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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