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안보통학교생 뒷산 시위 도화선…23일간 21번 "독립만세"
의성군의 만세 시위는 3월 12일 비안면 서부리 비안공립보통학교 뒷산에서 학생들의 시위가 시발점이 됐다. 그후 4월 3일까지 23일 동안 18개 면 가운데 7개 면에서 총 21번의 독립만세 시위가 일어났다.
의성군 비안면 쌍계리와 안평면 대사리의 3·1 만세 시위는 예수교인들이 주도 면밀하게 기획했다는 점이 특징이다.
◆의성군 비안면 쌍계리 만세 시위
의성군 비안면 쌍계리 만세 시위는 안평면 괴산교회 김원휘 조사와 대구 계성학교 재학생인 박상동(쌍계교회 박영화 목사 아들) 주도로 이뤄졌다.
김원휘 조사는 평양신학교에 등록하기 위해 평양에 갔다가 경성과 평양의 만세 시위 상황을 접하고 돌아와 비안면 쌍계교회 박영화 목사에게 이 사실을 전했다.
박상동 또한 3월 8일 대구 서문시장에서 전개된 독립만세 시위에 참여한 뒤 독립선언서를 가지고 쌍계리로 돌아와 아버지 박영화 목사에게 대구 시위 소식을 알린 것이 비안면 쌍계리 만세 시위의 도화선이 됐다.
안평면 괴산리 괴산교회 박우완 영수가 대구 성경학교에 갔다가 3월 10일 남문 밖 만세 시위를 확인하고 돌아와 대구 시위의 열기를 전한 것 또한 비안면 쌍계리 만세 시위에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다.
안평면 괴산교회 김원휘 조사와 쌍계교회 박영화 목사, 대구 계성학교 학생 박상동과 박우완 등은 쌍계교회에서 만나 교회 간부들과 밀의 끝에 13일 만세 시위에 나서기로 결정했다.
이 때 박영화 목사는 "나는 일찍부터 한국 독립을 희망하고 있었는데, 지금 경성과 평양, 대구에서 한국 독립 운동을 하고 있다는 소식을 들으니 조선인으로서 묵시할 수 없다"며 교인들에게 참여할 것을 권유했다.
이에 배도근, 이일만, 김명출, 박세길 등이 만세 시위에 가담키로 했고, 3월 12일 박영신은 자신의 집에서 교인인 배달근, 배중엽 등과 함께 한지에 물감을 사용해 태극기 200장 정도를 만들었다.
그러나 거사일 하루 전인 12일 오전에 예상치 못한 일이 벌어졌다. 비안공립보통학교 학생들이 일본인 교장과 교사들의 만류를 뿌리치고 오전 11시 학교 뒷산에서 독만세 시위를 전개한 것이다
그러자 쌍계교회 교인들과 마을 주민들이 잠시 술렁이기는 했으나, 낮 12시쯤 학생들이 쌍계리로 들어오자 마을에 모여 있던 교인들과 주민들이 학생들을 맞이하고 곧바로 만세 시위에 들어갔다.
박영화 목사와 배중엽은 박영신의 집 앞 도로에 모인 마을 사람들에게 태극기를 나눠 줬고 태극기를 든 학생들과 마을 주민 200여 명은 마을을 돌아다니며 만세를 힘차게 불렸다. 그러고는 마을 뒷산까지 올라가 만세를 부른 후 해산했다.
이날 오후 4시쯤 쌍계리에는 의성경찰서 경부와 순사부장 1명 그리고 비안주재소 순사가 만세 시위 주동자 검거에 나서 이일만을 비롯한 5명이 검거됐다. 잠시 몸을 피한 박영화 목사는 나중에 스스로 찾아가서 독립 만세 시위의 정당성을 역설하기도 했다.
이날 시위로 모두 18명이 재판에 넘겨졌는데 박영화 목사, 김원휘 조사 등 교인이 10명 이상이었다.
학생들도 50명 정도 만세 시위에 참여했는데 이들은 재판에 넘겨지지 않았다. 이는 학생들의 연령이 16세가 넘지 않았기 때문으로 보인다.
13일에는 비안면 동부리와 서부리에서 김석근 등이 12일 쌍계리 만세 시위에 자극받아 시장에서 만세 시위에 나섰다. 이에 주민 등 100여 명이 동참했고 늦은 밤까지 이어진 시위는 김석근이 검거 되면서 시위대는 흩어지고 말았다.
한편 3월 12일 오전 11시 비안공립보통학교 학생들의 학교 뒷산에서의 3·1 만세 시위는 의성군 만세 시위의 시발점이자 도화선이 됐다.

◆안평면 대사리 만세 시위
1919년 만세 시위가 전국적으로 확산되는 가운데 비안면 쌍계교회의 만세 시위 소식을 접한 안평면 대사교회 교인들은 3월 15일 예배를 마친 후 박영화 목사(쌍계교회와 겸임) 등이 모여 만세 시위를 모의했다.
이날 교회에서 이호출 영수가, "다른 지방에서도 만세를 부르고, 시위 운동을 하고 있으니 우리도 실행하자"고 제의 했다. 참석한 모두가 찬성한 가운데 시위를 교인과 마을 주민에게 알리고 태극기를 수백장 만들었다.
안평면 대사리 1차 만세 시위는 3월 15일 오후 7시쯤 교인들과 마을 주민 60~70명이 합세해 대사2리 마을 뒷산에서 만세를 불렀다.
그리고 마을 곳곳을 누비며 태극기를 흔들었다. 그러고는 오후 10시쯤 자진 해산했는데 이날의 시위는 일본 경찰에 알려지지 않아 경찰은 출동하지 않았다.
2차 만세 시위는 3월 16일 오후 8시쯤 마을 앞에서 김길도와 최상근 등이 교인과 주민 50, 60명이 참여한 가운데 전날과 같이 만세 시위를 벌였다.
시위대는 마을 출발해 마전리와 기도리 등을 지나 면소재지인 창길리까지 행진한 다음 해산했다.
1차 시위는 마을에서 이루어졌지만 2차 시위는 마을에서 4km 정도 떨어져 있는 안평면소재지까지 행진이 이어졌다. 경찰의 제지를 받지 않고 시위를 계속 이어갈 수 있었다.
3차 시위인 3월17일 오후 8시쯤 1, 2차 시위에 참여했던 대다수 사람들이 중심이 된 가운데 150여 명이 우리골에 모여 만세 시위를 했다.
전날과 같이 마을을 떠난 시위대는 마전, 기도, 괴산리를 돌면서 교인들과 마을 사람들이 합세해 시위대는 400여 명으로 크게 늘어났다.
고무된 시위대는 마침내 창길리 안평면 주재소 앞에서 태극기를 흔들며 만세를 힘차게 외쳤다.
이날의 시위대는 창길리를 지나 30리나 되는 하령리에서 해산했으며 일부는 삼춘리까지 행진한 후에 해산했다. 이날 만세 시위도 영수 이호출과 집사 이원춘 등이 주도했다.
그러나 의성경찰서가 순사부장 외에 2명을 보내 안평주재소 순사와 함께 주동자 검거에 나서면서 12명이나 검거됐다.
4차 만세 시위는 전날 12명 체포 됐음에도 불구하고 18일 밤에도 시위는 계속됐다.
이호출 영수 등이 이끈 300여 명의 시위대는 기세가 크게올라 하늘을 찌를 듯 한 가운데 일본인 순사부장과 한인 순사 이창복, 이백영 외에 군청 직원들도 시위대의 기세에 눌러 함께 만세를 부르는 이변을 낳기도 했다,
안평면 대사리 만세 시위는 날이 갈수록 수그러들지 않았고 시위 범위도 점차 넓혀가고 기세도 충만했다.
3월 19일 5차 만세 시위에는 안평면을 벗어나 도리원 주재소를 포위해 공격했고 군경이 발포해 권해문이 총상을 입고 순국하는 등 사상자를 낳는 대규모의 만세 시위로 기록되고 있다.
안평면 대사교회 교인들이 주도한 안평면에서의 5일간의 만세 시위는 대구에 있는 일본 군경까지 동원해 시위를 막을 정도로 강했다.
이와 같이 의성의 만세 시위가 대구 서문시장과 포항 죽도시장에 이어 경북에서 3번째로 기록되는 것은 선조들로부터 이어져 내려오는 의성이 '의와 예의 고장' 임을 스스로 각인 시키는 것이다.
의성은 조선시대 임진왜란 때도 의병을 일으켰다. 직접 전투에 참여한 의병 62명 중 23명이 전사했다. 의성에서의 전투 지역으로는 건마산성 전투, 봉양면 덕은동 전투, 단밀 전투지 등이 기록으로 남아 있다. 당시 의성의 의병은 의성은 물론 군위와 안동, 경주, 팔공산, 화왕산성 등지 전투로 원정을 가기도 했다.
이와 관련, 김홍배 의성문화원 향토사연구소장은 "의성군에서 첫 3·1 만세 시위는 비안공립보통학교 학생들이 주도했으나 비안면 쌍계리와 안평면 대사리 만세 시위는 교회 교인들이 주도했다"고 말했다.
김 향토사연구소장은 또 "의성에서의 3·1 만세 시위는 경북도 내 다른 지역에 비해 횟수도 월등히 많고 주재소 습격 등 매우 격렬했다"면서"이 때문에 독립유공자 수도 경북에서는 안동(357명), 영덕(205명) 다음으로 의성(168명)이 많다"고 강조했다.
※참고 문헌=의성의 독립운동사, 의성문화원 경북선비아카데미 교양 과정, 항일독립운동 의성군 자료집, 3·1운동과 기독교, 의성교회 100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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