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 매일시니어문학상] 논픽션 당선작-민윤숙 '아니야, 안 돼, 안 돼.'

입력 2018-07-25 14:00:29 수정 2018-07-25 15:25:01

남편이 출근하고 한 시간 쯤 지났을까? 전화벨이 울렸다. 남편의 친구인데 지금 그사람이 병원에 있으니 가보라는 것이었다. 어리둥절해 하는 내게 친구가 말 헸다.

"수첩에 있는 내 전화번호를 보고 전화 한 것 같은데 교통사고라고 합니다."

"네? 교통사고요?"

놀라는 내게 친구는

"시내에서의 사곤데 큰일이야 있겠습니까? 그럼."

친구는 전화를 끊었고, 친구의 말대로 무슨 큰일이야 났을라고. 안이하게 생각 하며 응급실로 들어섰다. 빠른 시선으로 남편을 살펴보았다. 아무 곳에도 상처하나 없이, 편안하게 누워 있다. 그러면 그렇지! 무슨 큰 일이 있을라고. 그런데 저 혈관마다 꽂아 놓은 링거 줄은 다 무엇이지? 또 저 많은 의사들은 왜 빙 둘러서서 심각한 얼굴들을 하고, 인공호흡기의 게이지를 바라보고 있는지? 나도 그들의 시선을 따라 인공호흡기를 바라보았다. 게이지의 선들은 위, 아래로 올랐다. 내렸다. 미친 듯이 춤을 춘다. 의사들은 교대로 가슴에 손을 얹고, 힘껏 눌렀다, 떼었다. 를 반복하며 심폐소생술을 한다. 의사들은 최선을 다한다. 그러나 게이지의 초록색 선들은 위로도 아래로도 움직이지 않고 일직선을 죽— 긋고 제로 콤마. 이제 그 선은 저 세상과 이 세상을 갈라놓는 듯 싸늘하기만 하다.

싸한 바람이 가슴을 훑어 구멍이 뻥 뚫린 듯하다. 머릿속이 하얗게 비어버린다. 전신에 힘이 쏙 빠진다. 다리에 힘이 빠져 서 있을 수가 없다. 무너져 내려 앉아 숨을 헐떡인다. 숨을 쉴 수가 없다. 이 엄청난 일이 내 일이란 말인가? 아니야. 아니야. 그건 아니야. 절대 아니야. 그의 처음 이전에 그를 계획하셨던 이의 창조 목적이 겨우 이것이었단 말인가? 아니야, 안 돼, 안 돼. 그건 아니야, 절대로 그건 아니야.

'저희는 육체뿐이라, 가고 다시 오지 못하는 바람과 같도다.'

라고 한 다윗의 말과 같이 한 번 가면 다시 오지 못하는 인생, 이생에서 그가 아직도 할 일이 얼마나 많은데... 그를 데려가시면 나는 어쩌란 말입니까? 이건 정말 잘 못 된 일인거야.

'하나님! 죽은 사람도 살리신 하나님이신데, 어떻게 이럴 수가, 절대로 아니다. 하나님의 사랑하는 딸인 내가 이렇게 간청하는데 설마 하나님께서 들어주시지 않을 리가 없지,' 확신을 가지고 계속 기도하고, 간청해 본다.

그러나, 머리 위부터 발끝까지 하얀 시트를 덮은 남편은 영안실이라는 곳으로 끌려 가 버리고 말았다. 조그마한 흠집 한 군데도 없이, 괴로운 표정도 전혀 없이, 그냥 자는 듯이 편안한 모습으로 그냥 그렇게 가 버리고 말았다.

남편 출근 시간이 어느 학교 졸업식 시간과 맞물려, 졸업식 시간에 늦은 사람이 급하게 운전을 하다가 사고를 낸 것이라고 들었다. 차는 급정거를 했고, 남편은 앞으로 쏠려 가슴을 찧어 갈비뼈가 부러지고......, 아! 끔찍해서 더 이상 말 하고 싶지 않다.

나는 죽지도 않은 사람을 냉동실에 넣어서 꼭 얼어 죽을 것만 같아, 다시 데려오라고 계속 악을 쓴다. 아들은 몇 번이고 나의 말대로 갔다 왔다. 를 되풀이 한다. 그러나 그는 다시는 나오지 않았다.

출근 한다고 나간 사람이 죽어 버렸다니, 정말 말도 안 되는 소리다. 참으로 순식간의 일이었다.

인간의 감정이란 섬세하고 예민하여 어떠한 표현이라도 다 할 수 있는 것으로 생각했었는데, 그래서 그렇듯, 아름다운 예술 세계를 그려 낼 수 있는 줄 알았는데, 어떤 극한 상황에서는 그 감정이 작동을 멈추어 버리는가 보다. 슬프다거나 절망스럽다든가 하는 낱말들은 한낱 사치스러운 형용사 일 뿐이다. 다만 그때, 내게 억지로라도 표현해 보라고 한다면 아니야, 안 돼, 안 돼, 이 두 마디뿐이었다. 그리고 다 귀찮다. 자신하고는 상관도 없는 교통사고, 죽음, 영안실, 이런 낱말들이 수 없이 오가는 이곳에는 더 있고 싶지 않을 뿐이다. 그만 집으로 가고 싶을 뿐이다. 집은 사랑하는 남편, 아이들, 안식, 이런 것들이 있는 곳이라는 잠재의식 때문인지, 집으로 가고만 싶을 뿐이다.

하지만 입고 간 빨간 티셔츠가 벗겨지고 죄수도 아닌데 죄수들의 수의 같은 상복으로 갈아 입혀지고, 원치도 않은 그 곳에 앉혀지고, 참으로 한 순간의 일이었다.

나는 그 때부터 골똘히 생각하고 또 생각해 본다. 자신이 무슨 죄를 지었기에 이렇듯 큰 고통을 하나님은 자신에게 주시는가를, 그러나 쉽게 해답이 나와지지를 않는다. 온 가족이 열심히 성수주일도 했고, 교회 봉사도 열심히 했고, 십일조도 꼭 바쳤고, 십계명도 나름 지켰고…….

그런데 그 때, 머리를 꽝 하고 치는 소리가 들렸다. '넌 계명도 지켰다고 했는데 '네 부모를 공경하라'는 제 5 계명은? 넌 네 어머니에게 어떻게 했나, 를 생각 해 봐!' 엄마에게? 아! 그래, 여자를 얻어 이중생활을 하는 아버지 편에 서서 어머니의 속을 무던히도 썩게 했고, 나중에는 그 어머니와 사이가 더욱 안 좋아져서 집을 나간 일이 있었지……. 그 때 어머니가 얼마나 속을 끓이셨을까? 혼기에 찬 딸의 가출이라니!

나는 숙식이 해결되는 어느 고아원에 교사로 일단은 취직을 했었고, 원장의 지나친 친절과 관심이 원장 사모의 질투심을 유발해, 사모의 고발로 나는 집으로 무사히 돌아왔었다.

그러나 집으로 돌아 왔다고 내 죄과가 없어지는 것은 아니다. 며칠 동안의 어머니의 고통이 하늘에 전달되었으면 나는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 마땅하다. '네 부모를 공경하라' 는 제 5계명을 어겼으니, 그러나 아무리 생각해도 그 이상은 아무 죄도 짓지 않은 것 같은데, 아! 아무리 그렇다고, 자신에게 왜 이러시는지, 해답이 나와지지를 않는다. 아무 생각도 할 수가 없고 다만 남편과 자신이 손을 잡고 어디인가를 가기로 약속하고 길을 떠났는데 어디쯤에서인지 남편은 내 손을 슬그머니 놓고 없어져 버린 것만 같았다.

나는 흰 눈으로 뒤덮인 공동묘지 산기슭을 누군가에게 의지하여 기어오르다가 땅에 주저앉고 말았다. 그리고 누구 에 겐지도 모를 대상에게 절규했다. '이건 너무 한 것 아니냐고, 이렇게까지 할 건 없지 않느냐'고. 눈 덮인 땅을 두 주먹으로 꽝꽝 내리치며 울부짖었다. 자신이 살아온 짧지 않은 세월들이 잠깐처럼 느껴지기도 했다가, 또 긴긴 영원의 영겁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앞으로 자신이 살아낼 세월 앞에, 숨겨진 불행의 함정이 어딘가에 또 예비 되어 있다면 이생을 더 살아내고 싶지 않다고 절규했다.

사랑하는 이를 이름 모를 이들의 곁에 누이고, 공동 같은 집으로 돌아오니 어디선가 똑 똑 소리를 내며 물이 샌다. 화장실로 가 잠그려고 비튼다. 잘 되지 않는다. 아이 모르겠다. 나중에 아빠 오시면 고치라고 해야지. 하고 허리를 펴고 일어서는 순간 아! 이제 아빠는 돌아오지 않는다. 영원히 돌아오지 않는다. 이제, 모든 것은 혼자 스스로 해 나가야 한다. 행복했던 그 날들은 다시 돌아오지 않을 것이다. 방으로 돌아와 쭈그리고 앉은 채 어둠이 짖게 깔릴 때까지 꼼짝도 않고 앉아 깊은 생각에 빠진다.

나의 존재의 근원이 어디로부터 출발하여 이 세상에 오게 되었는지? 또 누구의 계획한 섭리로서 이 세상을 살다가, 누구의 주제로 저 세상으로 가게 되는 것인지?

인간의 주제자라고 생각했던 신이란 정말 있는 존재일까? 있다면 그렇도록 신을 숭배하고 뜻대로 살기를 노력했던 나에게 이런 혹독한 시련은 주지 않았을 것이라고 생각하니 불쌍하고 가련한 나의 영혼, 이제까지의 나의 삶이 참으로 허무하고 허무했다.

사람의 일생을 대체적으로 4 단계쯤으로 나누어 본다면, 1단계는 요람에서 25세까지로 부모에게서 양육 받고, 교육 받고, 2단계는 25세에서 45세까지인데, 직장을 가지며, 결혼하고 자녀를 낳아 키우고, 3단계는 45세에서 65세까지인데, 자녀를 훌륭히 교육시켜 짝을 잘 찾아 주고, 자신들의 노후를 대비하고, 4단계는 65세에서 죽음까지인데, 자신들이 키운 아이들에게서 위로 받고, 평생 몸 바쳐 일 해 온 직장에서 보상 받는 것, 쯤으로 나눈다면, 이렇게 4단계로 나누어진 일생을 3단계 말쯤 왔다고 생각되는 이 중요한 시기, '자녀를 훌륭히 공부시켜 짝을 잘 찾아주는'일이 남은 이 중요한 시기에 남편은 슬그머니 가 버린 것이다. 일생에서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되는 이 시기에, 그는 말 한마디 없이 그야말로 몆 시간 만에 훌쩍 가 버린 것이다. 둘이 함께 4단계까지 다 가서 일생을 마쳤다면 행복했던 노인들이라고 말들 하겠지만 이제 이쯤에서 나는 방향전환을 해야 한다. '자녀의 교육을 훌륭히 끝 마쳐 주고, 짝을 잘 찾아 주는 일'이 내게 남아 있는 것이다.

나는 엉겁결에 떠밀려 남편이 경영하던 기업체에 대표가 되었다. 이제까지 사회활동이라고는 한 번도 해 보지 않았던 자신이 기업을 어떻게 이끌어 나가란 말 인가고, 말도 안 된다고 떼를 썼지만 형제들은 합심하여 내 등을 떠밀었다.

"전문 경영인에게 맡기면 백 원을 벌고, 누나가 직접 하면 오십 원 밖에 못 번다고 해도, 나중 일을 생각해서 하도록 하세요. 하다 보면 지혜가 생길 거예요. 우선은 치료라고 생각 하고 하세요. 기반도 꽉 잡힌 회사니까 잘 될 거예요. 또 내가 힘닿는 데까지 도울게요. 대표가 자리를 비운지가 벌써 일주일째에요. 또 곧 구정 연휴에요 삼오도 지났으니, 오늘은 출근을 해야 합니다."

형제들에게 등 떠밀려 첫 출근을 했다. 남편 회사에 몇 번 가보기는 했어도 현장에는 들어가 보지 않았었다. 공장 안으로 들어선 나는 엄청난 크기의 기계들에 놀라 어안이 벙벙했다. 플라스틱을 성형하서 사출해 내는 집채만 한 크기의 사출기들, 철판을 원하는 모양대로 잘라내는 프레스기계들, 찍어낸 플라스틱에 윤기를 내는 후끼 시설, 철판에 반짝반짝하게 광을 내는 메끼 시설들, 기계가 내는 엄청난 소리들에 놀라 어리벙벙한데, 공원들은 각자의 기계 앞에 서서 열심히 일하고 있고, 완성된 제품들을 컨테이너에 싣느라고 소란스럽다. 이들은 사람이 죽어 없어졌는데도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일을 계속하고 있다. 배신감 같은 싸한 바람이 가슴에 인다.

대충 인사소개를 마친 후 여직원의 안내로 사장실로 들어갔다. 직원은 의자를 뒤에서 빼 주며 앉기를 기다린다. 그리고 책상 앞으로 와서 공손히 인사를 하며 자신은 사장님의 비서직을 맡고 있는 미스 권이라고 자기소개를 하고 차 한 잔을 책상 위에 놓고 나갔다.

미스권이 나가고 곧 이어 남자 직원이 파일을 옆구리에 끼고 들어와 인사를 한 후에 자신은 경리부장인데, 무역금융을 열어야 하니, 결재 해 달라고 한다. '무역금융? 무역회사도 아닌데 무슨 무역금융?'무슨 말인지조차 이해가 안 가 한 참을 생각한다. 공연히 아무것도 모르고, 아무 곳에나 도장을 찍어 주었다, 큰일 나는 것은 아닐까?

아이들이 어렸을 때를 생각해본다. 학년이 높아 갈수록 아리송한 문제들을 물을 때가 가끔 있었다. 모른다고 하면 엄마 체면이 말이 아닐 것 같고, 그렇다고 대충 가르친다면 틀린 답을 영원히 머릿속에 기억 해 둘 것이다. 그것은 더욱 큰일이라고 생각되어 나는 꾀를 내어서 말했다.

"그래, 엄마하고 같이 풀어보자."

문제를 풀어 가면, 문제는 저절로 풀렸다. 안도의 숨을 내 쉬기를 몇 번, 그러나 차츰 아이들은 엄마가 모른다는 것을 이미 눈치 채고, 묻기를 끝냈다. 그 때 일을 떠 올리고 솔직하게 말하기로 생각하고, 앞에 선 사람의 명찰을 보니 박씨다.

"박부장님, 제가 이런 일은 처음이라 잘 몰라요, 상식적으로 아는 것과 실무적인 것은 많이 틀릴 것 같으니, 내게 자세히 설명 해 주세요."

"네 알겠습니다. 저희 회사는 원재료를 수입해서 쓰고 있는데, 수입을 하려면 먼저 거래 은행에 원재료 대금을 예치 해 놓고, 신용장을 개설해야 합니다. 그 대금을 오늘 결재 해 주셔야 합니다."

박부장의 말을 다 이해한 것은 아니지만 대충 넘기고, 결재 금액이 얼마인가, 만을 기억에 꼭 챙기고, 박부장은 나갔다.

하루 종일 이사, 영업부장, 생산부상, 공장장, 다 헤아리지도 못할 사람들이 들어왔다, 나갔다, 하고 하루해가 다 갔다.

퇴근을 하려고 출입문을 향해 걸어 나가는데 누군가 문 앞에 서 있다. 퇴근 시간인데 누가 또 오는가? 머리가 희끗한 초라한 노인이 다가온다. 어깨는 처져 있고, 걸음걸이에는 힘이 하나도 없다. 앞으로 차츰 다가온다. 나는 너무 놀라 그 자리에 우뚝 멈춰 선다. 출입문 앞에 걸린 거울에 내가 마주 서 있는 것이었다. 나는 마리앙트아네트가 하룻밤 사이에 백발이 되었다는 이야기가 퍼뜩 머리에 떠올랐다. '어쩜, 저 모습이 내 꼴이란 말인가?'

엘리베이터를 내려 집을 향해 걸어가는데 문 앞에 상자 두 개가 놓인 것이 보였다. 사장님이 세상 뜬 것을 모르는 사람의 구정 선물인가? 그 생각과 동시에 낮에 '구정이라 기사 편에 선물 조금 보냈다'는 동서와 여동생의 전화 생각이 났다. 현관으로 끌어 들여 놓고, 옷도 벗지 못하고. 저녁도 굶은 채, 침대에 엎드러졌다. 자다, 깨다를 반복하다, 아침 늦은 시간에 일어났다. 정말 꼼짝도 못하겠다. 회사에 가지 말까? 그러나 겨우 회사 나간 지, 이틀째인데다 오늘은 구정 연휴 종무식이란다. 준비를 마치고 현관으로 갔다. 현관 바닥이 질척하다. 또 어디서 물이 샌 걸까? 이리 저리 살펴본다. 어제 받아서 현관에 그대로 둔 상자에서 물이 새어나오고 있다. 출근시간도 늦은데다 곧 도우미가 출근 할 시간이라 그대로 두고 나갔다.

회사는 구정 연휴 준비로 안 밖이 소란하다. 공원들은 고향으로 갈 생각에 희색이 만면하여 몸들을 날렵하게 움직이고, 직원들은 아직 처리 못한 일들을 하느라 바쁘다. 점심 식사 후, 종무식을 끝내고, 공원들은 커다란 쇼핑 빽과 상자들을 지고, 메고, 들고, 꽁지가 빠지게 흩어져 나간다. 누구, 누구를 생각하고 샀을 선물들이 몸뚱이가 보이지 않을 만큼 커다랗다. 그들은 다 행복해 보인다, 나도 그들의 뒤를 따라 퇴근했다.

집으로 들어서자 도우미가 "사모님 퇴근 하셨네요. 근데 현관에 있던 상자 안 열어 보셨지요. 아이구, 어떤 몰상식한 인간이 냉동고기를 선물로 보냈네요. 아무리 씻고, 씻고, 또 씻어도 상한 냄새가 가시질 않아요. 저번 날 장보라고 주신 돈으로 설 쇨 장을 이미 다 보아서, 냉장고에는 더 드려 놓을 자리도 없고, 장조림이나 짜게 해서 밖에 내 놓을까도 생각해 보았지만, 그것도 안 될 것 같고, 아무래도 버려야 할 것 같아요. 누가 추석에 받은 선물을 냉동고에 쳐 넣어 놓았다가 설에 선물이 또 들어오니까, 그 냉동고에 들어 있던 걸 꺼내서 보냈나 봐요. 그것도 꺼낸 지 한 참 된 것을 보냈나 봐요. 버려 버릴게요."

그녀는 고기를 비닐에 싸 가지고 쓰레기 통으로 간다. 나는 주방으로 들어가 쓰레기통을 마주 바라보고 있는 주방 창문을 열었다. 그녀가 쓰레기통 투입구를 열고, 킹킹 대며 그 큰 덩어리를 쑤셔 넣는 모양을 지켜보고 있다. 동서와 여동생의 얼굴이 떠오른다. 올해 초에 대 기업 사장이 된 시동생과, 동시에 올 해 초 장군이 된 여동생 남편의 얼굴도 오버랩 된다. 그리고 14층에서 아래로 떨어지는 그 소리가 육중하게 '쿵' 하고 들릴 때, 자신의 자존감도 '쿵'하고 떨어짐을 전신으로 느끼고, 자신의 작아진 모습을 도우미에게 보이고 싶지 않아 방으로 들어가 버렸다.

나는 일과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는 즉시, 눈물 행사 의례로 그 날을 마감한다. 남편이 간 것이 슬퍼서? 혼자 살아낼 일이 걱정 되어서? 아니면 그리워서? 그도 아니면 미망인이라는 호칭이 자존심이 상해서 우는 걸까? 울고 있으면, 돌아올까? 그러면 일생을 울고 있을 것인데…….

그런데 장례식에 온 문상객 중 어느 분이 '평균 수명은 살다 갔구먼, 뭘, 그리, 애통해 할 것도 없는 일이지. 며느리, 손자 다 보고 갔으니, 복 받은 사람이지. 인간은 누구나 언젠가는 다 가는 것을…….'라고 한 말이 문득 생각났다. 그 말이 큰 위로가 되어 일주일쯤 지난 후 부터는 눈물을 거두었다. 더구나 내일 모래가 구정인데 십남매의 맏며느리인 자신은 차례도 지내야 하고, 손님맞이 준비도 해야 하는데, 울고만 있을 수는 없는 일이다. 남편이 없다고 그 일을 포기할 수는 없는 일이다. 나의 장남이 그 가문의 장손이기 때문에, 그, 대를 잘 이어가게 해야 하는 것이 나의 의무라고 생각했다.

남편은 2남 8녀, 십남매다. 남편은 그 중 여섯 번째로 장남이고, 바로 밑이 남동생이다. 사람들은 내 부모들에게 어쩌다가 딸을, 시누이가 여덟인 집으로 시집보냈느냐. 고 들 한다. 정말 어쩌다가 그리 됐을까?

시댁은 이조 조에, 임금의 스승을 두 대에 걸쳐 한 집안으로, 양반 중의 양반 이라고 했다. 시아버지는 훌륭한 교육자시다. 신랑은 공대를 나와 국영기업체에 다니니, 평생 밥은 굶기지 않을 것이라고 시집을 보냈다는데,

5.16 군사혁명으로 군 미필자인 신랑은 해고를 당해 평생은커녕 결혼 이년 반 만에 밥을 굶게 생겨, 공대고, 국영기업체고 다 무효가 되어 버리고 말았다. 시댁은 조선에서 두 번째 가라면 서러울 양반 댁인데, 맏아들 장가보내고 삯 월 세 방 한 칸도 얻어주지 못한, 가난하고 가난한 집이다. 훌륭한 교육자이신 시아버지는 내가 결혼해서 가보니, 재혼 한 지 일 년 쯤 됐는데, 여덟 번째 딸이 백일 전이고, 시아버지는 20년 연하의 부인과 갓난쟁이 딸에게 온 심혈을 기울이느라 아들이고, 며느리고, 딸이고, 안중에도 없다. 그런 시아버지라 화초 부인은 집에 모셔 놓고, 명절 차례와 기제사, 자신의 생일까지 모든 행사를 장남의 집에서 한다.

아침에는 시 동생네, 다섯 식구와 우리 식구 다섯과 열 명이 차례를 모신다. 그 후 점심때 쯤 시아버지가 오고, 서울에 사는 친척들과 딸들이 줄줄이 아이들을 데리고 세배를 온다. 그 많은 식구가, 아침에 온 사람들까지 모두 함께 점심을 먹고 놀다 가고 나면, 저녁에는 회사 직원들이 세배를 온다. 다녀간 사람들을 세어보면 백 명도 넘는다. 모든 행사를 마치고 밤에 자리에 누우면 사지 육신을 사방에서 묶어 놓고, 사방에서 끌어 잡아당기는 것 같이 아프다. 그래도 30년 동안, 그 일을 열심히 해 냈는데, 남편이 죽고 없다고 그 일을 안 할 수는 없다.

지금도 그 모든 일을 맏며느리에게만 맡기는 시아버지의 멘탈은 교육자시라 그럴까?

구정 연휴가 지난 며칠 후, 시동생이 회사로 찾아왔다. 그는 꽤나 큰 동 뭉치를 내 놓으면서 '이번, 형님 초상 때, 부의금하고, 교통사고 보험금인데, 은행에 잘 예금 해 놓으라.'고 했다. 대 기업 사장인 시동생은 어떻게 명까지 길게 태어났을까? 경이의 눈빛으로 시동생을 바라본다.

나는 은행에 거의 가 본 일이 없다. 월급봉투를 받으면 뜯어보지도 않고 아내에게 주던 남편이었다. 그것으로 한 달, 넉넉히 살던 때여서, 은행에 갈 일이 없었다. 남편이 잘 벌고 있으니, 아껴서 예금을 따로 할 일도 없었다.

시동생이 준 돈을 들고 은행에 갔다. 어디로 가야 할지, 막막해서 문 앞에서 서성인다. 직원이 앞으로 와서 어떻게 왔느냐고 묻는다. 예금을 하려고 한다니까 창구로 안내 해 주었다. 내가 내 놓은 많은 돈을 보고 깜짝 놀라던 직원이 내 머리에 꼬친 흰 리본을 한동안 바라보더니 말했다.

"실례지만 상을 당하신 것 같은데 부모님 상입니까?"

나는 망설이다 말했다.

"남편이 고통사고로……. 보상금이에요."

직원은 한 동안 무슨 생각인지에 잠겨 있더니 말 했다.

"이 돈을 예금하시면 금리가 얼마 안돼요. 지금이 마침, 상장을 하지 못한 많은 회사들이 상장을 하느라, 은행 고액 예금자들을 주주로 끌어들이고 있는 중이예요. 이 돈이면, 두 회사 주주는 되실 것 같은데요. 상장이 끝나고, 한 달쯤 후에는, 배당 받은 주식이 배씩 올라 있어요. 은행이 책임지는 것이라 안심하고 하실 수 있으니까 한 번 해 보세요. 지금이 마침 좋은 기회입니다."

나는 직원을 믿고 그의 말대로 했다. 한 달 후에 정말 두 배의 돈이 나왔다. 두 배의 돈을 가지고 또 네 회사의 주식을 샀다. 한 달 후에 여덟 배가 되었다. 그리고 열여섯 배, 신나게 돈이 불어났다. 이런 식으로 돈이 계속 불어난다면 큰 부자가 될 것인데, 그것도 어느 시기가 되니까 끝나버렸다. 1980년대, 상장을 못하고 미루었던 많은 회사들의 상장이 거의 끝난 것이다.

사람이 일생을 살아내는 동안, 예기치 못한 일들이 일어난다는 것을, 또 한 번 실감하게 된 계기였다. 남편이 가고 얼마동안은 하나님에 대한 원망으로 기도에도 소원했던 나는 다시 하나님께 감사 기도를 드렸다.

'빚 진자처럼 더욱 풍성히 주시는 좋으신 하나님, 많은 물질 주신 것 감사드립니다. 그리고 죄송했습니다. 사람은 다 제 명대로 살다 가는 것을, 하나님이 그를 데려 가셨다고 하나님을 원망했었습니다. 그 후, 제 믿음이 소원 했던 점 하나님께 고백합니다. 그런데 이 사악한 인간은 또 많은 물질을 주셨다고 감사 기도를 드리고 있습니다. 그러한 죄인이 당신을 내 안에 어찌 다시 모실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주님 내 안에 계시옵소서. 이렇듯 얕은 신앙을 가지고 하나님의 사랑만을 갈구하는 이 사악한 인간을 용서해 주시옵소서. 우상을 섬겼다고 벌 내리신 이스라엘 백성을 다시 사랑하셔서 포로 되었던 바벨론에서 풀어주신 하나님! 다시 그들을 품어 주심 같이 이 죄인 이렇듯 많은 축복 내려주신 것 감사 감사드립니다.'

회사도 아무 문제없이 잘 되고, 돈도 잘 불어나고, 아이들도 원상으로 회복되고, 나 자신도 평정을 찾고, 십 여 년이 흘러갔다.

1997년도, IMF, 신문과 방송에서 연일 '한국 IMF 외환위기'에 대해 대서특필하고 있다. 제품의 90%가 수출 물량이고, 원재료는 모두 수입품이다. 세계금융 대란으로 수출이 막히니 본사가 제대로 돌아갈 리가 없고, 따라서 자연 수주가 없다.

우리 공장은 대 기업에 TV, 오디오, 레디오등의 케이스를 사출하여 납품하는 대기업 외주 가공 업체이다. 동종 업체가 13개사인데, 13개 회사가 24시간, 밤낮 없이 찍어내도 납기를 맞추지 못해 허둥대든 호경기였었다.

IMF로 수출이 안 되니 일거리가 없고, 일을 안했으니 납품을 못하고, 납품을 못했으니 수금을 할 수 없고, 받은 어음이 부도가 나고, 지급어음 만기가 돌아오고, 나는 아무 정신도 없고, 어떻게 해야 할지, 까마득했다, 아침에 출근 하면 어떤 회사가, 부도가 났다는 말과, 생산 할 물량이 없으니 몇 호기, 가동을 중지 해야겠다는 말과 받은 어음이 부도가 났으니, 그 대금을 대납해야 한다는 말과, 지급 어음을 막아야 한다는 말 밖에는 할 말도, 들을 말도, 없었다. 사지 육신이 오그라 들것 같이 초조하고 불안 하다. 이러다가 부도가 난다면? 아! 안돼, 안돼.

나는 다급한 마음에 또 하나님을 불렀다.

'하나님, 이 죄인 용서해 주시옵소서. 많은 돈을 주시고, 공장도 잘 되게 해 주신 하나님, 저는 그 돈을 나와 내 자식들만을 위해서 썼습니다. 하나님과 수직적인 사랑만을 해 온 저는 입만 열면 항상 '주시옵소서. 주시옵소서.' 만 했습니다. 수직과 수평적인 사랑, 즉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시는 말씀은 저 깊은 곳에 숨겨두고, 꺼내 볼 생각도 안했습니다. 예수를 믿고 따른 다는 사람이 어찌 '십자가의 도'를 잊을 수가 있었을까요? 성수주일 열심히 했고, 십일조 잘 바쳤고, 교회봉사도 잘 했고, 십계명도 나름 잘 지켰고, 그만 했으면 잘 믿는다고 자부심을 가졌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시는 '십자가의 도'를 실행치 않았습니다. 하나님, 용서 해 주시옵소서. 이제 앞으로는 정말 '수평과 수직의 사랑'을 실천 하겠습니다. 하나님 이 위기를 어떻게 넘겨야 할지, 저는 아무것도 모르겠습니다. 아! 하나님 도와주시옵소서.

숨 넘어 갈 듯, 심각한 얼마의 시간이 지난 어느 아침, 그런데 오늘은 영업부장이 희색이 면면하여 말했다. 신흥 정공이 부도가 나서, 그 회사에서 하던 물량을 우리 회사에 다 맡겼다고 한다. 세계금융대란으로 수출은 거의 줄었어도 내수와 또 어느 정도의 수출은 있었으니, 물량이 올 스톱 한 것은 아니다. 자금력이 약한 회사가 하나씩, 둘씩, 도산 하게 되니, 조금씩의 물량이지만 그 회사들의 일을 우리 회사가 다 맡게 된 것이다. 그들 회사에게는 미안한 일이지만 IMF 때, 오히려 평소보다 더 많은 수익을 냈고, 회사는 완전 제 궤도에 올랐다.

나는 모처럼 현장에 내려가 보았다. 나는 현장에 잘 내려가지 않는다. 외부인이 공장 내로 들어서면, 공원들의 열중하던 시선들이 분산되어, 돌아가는 기계에 차질이 생기고, 그러면 공원들의 손이 기계에 말려들어가 다치기 쉽다. 그래서도 잘 내려가 보지 않고, 또 시끄러운 소리에 정신이 없어서 이기도 하다.

공장 안으로 들어섰다. 그런데 기계 앞에서 한 아이가 몸을 버둥거리며 사지를 틀고 있다. 너무 놀라 그 자리에 우둑 서서 사방을 둘러본다. 그때, 그 옆을 무심히 지나가는 공장장을 보고 소리를 질렀다.

"공장장님, 이 아이 안 보여요. 왜 그냥 지나가요. 얼른 119 불러요."

"아! 사장님, 내려 오셨습니까? 아, 성휴, 괜찮아요. 조금 있으면 일어나요."

"아니, 그게 무슨 소리예요. 아이가 아픈데."

"네, 성휴가 간질병이 있어서 가끔 발작을 해요, 그러다 조금 있으면 자신이 스스로 일어나요, 발작 중에는 일으켜도 안 그쳐요. 처음에는 모르고 일으켰지만, 소용없어요. 잠시면 끝나요."

대화 도중에 성휴는 일어났고, 눈치를 보며 기계 앞에 다시 선다.

"그런데 병원에는 다니나요?"

"저 병은 평생 못 고친다고 해요."

나는 우울한 마음으로 다시 사무실로 돌아와 생각했다.

외부에서 봉사할 일을 찾을 것이 아니라 내 회사 내에서 먼저 아픈 사람을 돕기로 하고 성휴를 불렀다.

"성휴야, 너 그 병이 언제부터였니?"

"어렸을 때부터라고 해요."

"병원에는 가 보았니?"

"아니요. 이 병은 못 고친대요."

"못 고치는 병이 어디 있어. 너 비번일 때, 나하고 병원에 한 번 가보자. 의사의 말이나 한 번 들어보자."

구로동 고대 부속병원 신경정신과에 예약한 날, 성휴를 데리고 병원으로 갔다.

설명을 다 듣고 난 의사가 말했다.

"말씀드리기 난감한데, 이 병이, 완치는 없습니다. 다만 발작을 하지 않게는 할 수 있는데, 일생 약을 복용해야 합니다."

약을 먹은 후로 성휴는 발작을 하지 않는다고 들었다. 가끔씩 그의 안부를 묻는 것으로 그 일은 일 단락 되었다. 나는 공장장을 불러 또 병이 있는 아이가 있는지 알아보라고 했다. 그 말에 공장장이 말했다.

"10대 후반에서 20대 초반의 아이들이라 다 건강합니다. 요즈음은 보험 공단에서 일 년에 한 번, 건강검진을 해 주고, 병이 있는 아이는 다 치료를 해 줍니다. 대학을 못 가 공장에 들어 왔지만, 옛날 같이 형제가 많은 것도 아니고, 식구도 몇 안 됩니다. 옛날 같지 않습니다. 다 잘들 삽니다. 염려하지 마십시오."

공원들은 그렇다, 치고, 그러면 일반 사원은? 하나, 대기업 외주 가공업체라 사무직은 몇 안 된다. 공장장, 이사, 영업부장, 경리부장, 생산부장 등등은 삼 사 십대, 한창 나이라 모두 건강해 보인다. 그러면 그들의 자녀 교육 문제는 어떤가? 미스 권에게 알아보라고 했다.

박부장의 딸이 올해 대학에 합격했는데, 대학은 포기하고 취직을 한다. 고, 하는 말을 들었다고 한다. 나는 박부장을 불렀다.

" 박부장님, 따님이 공부를 잘 했나 봐요. 대학에 합격했다면서요."

" 아! 예. 그런데 취직을 한다고 합니다."

" 왜요? 그 어려운 대학에 합격을 했는데, 취직은 왜요?"

" 집안 형편이 그 애, 대학 보낼 형편이 아닌데, 공연히 시험을 봐서……."

" 집안 형편이 어떠신데요?"

" 주책없이 아이를 많이 낳은 데다, 부모님이 아직 생존해 계신데, 두 분 다 병원에 계셔서 형편이 안 됩니다."

나는 박부장을 내 보내면서 말했다.

" 따님, 내일 쯤, 회사에 한 번 오라고 하세요. 내가 좀 보고 싶네요."

다음날, 박부장의 딸이 왔다. 예쁘고 똘똘하게 생긴 아이는 활발했다.

"사장님, 처음 뵙겠습니다. 아버지께 말씀 많이 들었어요.

" 이름이?"

" 박현아입니다."

" 아! 현아양, 대학 합격 축하해요."

" 네 감사합니다. 그런데 저 학교 안가요."

" 왜요?"

" 그냥, 돈 벌고 싶어서요."

" 학비 때문이 아니고?"

" ……."

" 학비 때문이라면 현아양의 4년을 내가 책임져 주고 싶은데요."

" 정말요. 사장님, 감사합니다. 저, 정말 공부하고 싶어요. 열심히 하겠습니다."

박부장의 딸이 가고 난 뒤, 나는 마음이 뿌듯했다. 정말 이제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 하라' 시는 주의 도를 지킨 듯하여, 그리고 그 일을 시작 한 듯하여, 감사 기도를 드렸다.

출근하여 사무실에 들어서자 미스 권이 책상 앞에 와서 말한다.

" 사장님, 지난밤에 김현수가 약을 먹고 자살을 시도 했대요."

" 아니, 왜, 약을 먹었대? 김현수가 누구지?"

" 얼굴이 하얗고, 눈 섶이 짙은 애요. 키가 크고 잘 생긴 애 있잖아요. 꼭 대학생 같은 애요."

지난 가을엔가? 초겨울엔가? 미스 권에게서 설명 들은, 애 인 듯한, 현수를 처음 본 기억이 난다. 낙옆이 우수수 떨어지는 녹지에 쓸쓸히 혼자 앉아, 무슨 생각인지에 골똘히 빠져 있는 듯 했던 그는, 미스 권의 말대로, 하얀 얼굴에 눈 섶이 짙은, 꽤나 인상적인 아이였었다. 그리고는 그를 잊었었다. 그런데 그 아이가 자살을 했단다. 나는 후회 했다. 그때, 그 아이의 거동이 좀 수상쩍었던 것을 기억 해 내고, 그 때, 그 아이와 대화를 했었어야 했는데, 후회가 되었다. 무슨 사연이 있기에 젊은, 아니. 아직 아이티도 못 벗은 아이가 자살을 했을까?

나는 대충 결재할 것만 처리 해 놓고, 그가 입원해 있다는 강남 시립병원으로 가 입원실로 들어갔다. 현수는 눈을 감고 누워 있다. 나는 가만히 그 애 곁으로 다가가 손을 잡아주고, 아무 말 없이 눈을 감고 기도를 드렸다.

'하나님 이 어린 영혼이 어떤 상처로 하여 생을 마감하려고 했는지. 저는 모릅니다. 하나님 위로 되어 주시옵고, 이 어린 영혼을 지켜 주시옵소서.' 기도가 끝나고도 그대로,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손을 꼭 쥔 채, 가만히 그를 바라보고만 있었다. 현수도 천정을 바라 본채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대로 한 시간쯤이 지났다. 나는 현수를 불렀다.

"현수야, 밥은 먹을 수 있니?"

"아니요, 아직은 아무 것도 못 먹어요,"

"그래, 그렇구나, 그럼 내일 또 올게, 아무 생각 말고 쉬어라."

매일 아침, 출근 하면서 한 번씩 둘러보았다. 며칠이 지난 후부터 죽은 먹여도 된다고 해서 아침마다 죽을 끓여다 주고, 죽을 먹는 것만 지켜보다가 아무 말 없이 병실을 나오기까지, 한 십 여일이 되었다. 현수가 말문을 열었다.

"사장님 죄송해요. 문제를 일으켜서. 전 정말 살고 싶지가 않았어요. 살 수가 없었어요."

"지금은 어떠냐? 살아난 것이 다행이라고 생각하니? 죽지 못한 것이 분하고 억울하다고 생각하니?"

"살아나서 다행이라고 생각해요. 만일 제가 죽었다면 엄마도 살지 못할 거예요. 아빠가 사업에 실패해서, 고등학교 졸업을 며칠 남겨둔, 저만 집에 두고, 잠적 해 버렸어요. 빗 때문에요. 며칠 후, 집은 경매에 넘어갔고, 저는 친구 집을 전전하다가 졸업 후, 공장에 취직을 한 거예요. 그러나 공장일이 제게는 너무 힘에 겨워 견딜 수가 없었어요."

"그랬구나. 조금 전에, 현수가 죽었다면 어머니도 살지 못 할 거라고 했지. 내용은 조금 다르지만, 아들을 잃은 엄마의 이야기인데, 한 번 들어 볼래

'타이타닉' 이란 영화 이야기야. 한 번 들어봐, 뉴욕으로 가던 타이타닉호가 침몰을 해서 하바드 출신, 유능한 인재가 아버지와 함께 죽고, 어머니만 홀로 남았어. 슬픔에 빠져 있던 어머니는 울고만 있을 수는 없다고 생각하고, 아들의 이름으로 하바드에 도서관을 세워 기증하고, 아들이 즐겨 먹던 아이스크림을 학교 앞을 지나는 어린이들에게 나누어 주며, 아들을 기렸다고 하는 이야기인데, 고교 졸업을 며칠 앞둔 아들을 홀로 남겨두고 가신 부모님은 현수의 앞날의 교육을 위해서, 얼마나 피 나는 노력을 하시겠니, 돌아왔을 때 현수가 없어졌다고 생각해봐. 정말 어머니는 살고 싶은 마음이 있으시겠니?"

현수는 울고 있다. 나는 그가 마음껏 다 울기를 기다려 주었다.

"현수야. 그간, 한 열흘 동안 많은 생각을 했겠지. 내가 한 번 들어보고 싶은데."

"네, 지금으로서는 숙식이 제공되는 공장에 다니면서, 우선은 돈을 모으고, 돈이 좀 모이면, 학원에 다니면서, 수능 준비를 해서, 대학에 들어가고 싶어요. 몇 년이 걸릴지는 모르지만 해 보겠어요."

"그래, 잘 생각했다. 우선은 건강해야 뭘 하든 할 것이니까, 건강 회복에 힘쓰도록 해라."

현수가 퇴원을 하고 공장으로 돌아왔다. 사무실로 인사 하러 온 현수에게 내가 말했다.

"현수, 건강해 보이네. 이제, 그런 못된 생각은 절대로 하지 말고, 열심히 살기다. 너무 조급하게 생각하지 말고, 올 해 안 되면, 내 년에 하면 된다. 이제 겨우 수무 살인데, 뭐가 급해. 삼십이 넘어서 대학 가는 사람도 많은데,"

"네, 알겠습니다. 열심히 살겠습니다."

"현수야, 퇴원하기 전, 병원에서 네가 한 말, 잘 지킬 수 있지. 지금 내가 너를 도와 학원에도 보내 주고, 숙식도 제공해 준다면, 넌 부모님 밑에 있을 때랑 아무 것도 달라진 것이 없이, 부잣집 도련님 행동을 그대로 하게 될 거야, 남의 도움이란 것이 기약이 있는 것이 아니니까, 네 스스로 강인한 체력과 정신력을 키워야 해, 네 말대로 일 년, 공장에서 숙식을 제공 받고, 일 해서, 월급 받아서, 학원비 내고, 그리고 수능은 작년에 준비 했으니. 정리만 하면 될 것 같고, 실력에 맞춰서 대학 가면, 그 때는 내가 입주가정교사 자리 알아봐 주고, 등록금도 줄 것이니까, 죽었소, 하고 하는 거야, 그것을 못 견디면 넌 영원히 낙오자가 되는 거야, 부모님이 재기를 하신다고 해도 그리 빨리는 안 될 것이니, 몇 년 후, 돌아오셔서 네가 폐물이 되어 있다면, 그 일을 어쩔 거야. 알아들었지."

가끔 미스 권에게 현수의 소식을 듣는다. 열심히 근무하고 있다고 한다. 아무 희망이 없었을 때는 어려웠던 일도 희망이 생기니, 어렵지 않게 해 나가는 것을 보고, 모든 일은 마음먹기에 달렸다는 것을 새삼 깨닫는다. 공장안의 모든 직원들의 건강문제, 교육문제, 등등을 내 식구 같이 챙기니, 공원들은 모두 최선을 다한다. 불량도 안 내고, 수량도 훨씬 많이 뽑는다.

성휴는 발작을 하지 않은지 오래되었다. 성휴 어머니가 전라도에서 이것저것 선물을 싸 가지고 사무실로 찾아왔다. 눈물을 흘리며 감사하다고 말한 뒤, 성휴가 고향에서 결혼을 한다고, 사장님이 다녀가셨으면 좋겠다고 말 한다. 그러나 그것은 너무 번거로울 것 같아 축하와 축의금만 전하고 그 일은 끝냈다.

박부장 딸은 대학을 졸업하고 대기업에 취직을 했다고 회사로 찾아 왔다. 활짝 핀 꽃 같이 예뿐 현아를 보고 "곧 시집을 가야 할 것 같다"고 했더니 부끄럼도 타지 않고 "사장님 좋은 신랑감 있으면 소개 해 주세요." 한다. 요즘 애들이란.......,

현수는 6년 만에 대학을 졸업했다. 그 해에 부모님과 연락이 닿았다. 그러나 그 애의 부모들은 아직 회생을 못하고 어렵게 지내고 있었다. 나는 생각 끝에 현수 아버지를 우리 회사에 취직시키면 어떨까? 하고 이상무에게 말했다. 현수 아버지를 면담하고 난 이상무가 말했다. 그 사람은 폐인이 다 되어서 회사에서는 할 일이 없을 것 같다고 했다. 궁리 끝에 현수 어머니를 회사 식당에 취직시키기로 했다. 현수 어머니는 야무지고 다부져서 일을 잘 해내었다. 모자가 벌어서 동생들 공부시키고 열심히 살아가고 있다.

남편이 내 겉을 떠난 지 30년, 이제 세월이 흘러 내 나이 83살의 노인이 되었다. 세월이 자기만 흘러간 것이 아니고, 내게는 나이를 한 살씩 얹어주고 갔다, 남편이 가고 처음에는 지구의 종말이 온 것 같은 절망감과 고립무원, 세상에는 아무도 없고, 단지 홀로 선 느낌으로, 자식도, 형제도, 친구도, 이웃도 나와는 아무 상관없는 사람들로 여겨졌다. 그러나 형제들의 도움으로 회사를 혼자의 힘으로 잘 이끌어 나가, 지금은 완전히 자리를 잡았다.

자식들은 모두 무사히 공부를 끝마치고. 결혼해서 열심히 살아가고 있다.

자식들의 공부를 끝 마쳐 주고, 짝을 찾아주는 일을 꼭 부부가 함께 해야 되고, 노년에는 그 자식들에게 위로 받고, 일 해온 직장에서 보상 받으며, 노후를 보내야 행복한 노인이라고 생각했던 때도 있었었다, 그러나 나는 지금 혼자라도 충분히 행복하다.

하나님은 노후에 내게 참으로 아름다운 집을 주셨다. 아침에 침대에서 일어나, 서너 발짝만 가면 화장실이다. 거기서 또 서너 발짝이면, 현관이다. 또 서너 발짝이면, 주방, 씽크 대 앞이다, 아이들이 해다, 넣어, 놓은 반찬 몇 가지를 꺼내, 쟁반에 받쳐 들고 돌아서서 두 세 발짝이면 식탁이다. 주부들의 하루 동 선이 십리는 된다고 하는데, 나의 하루 동 선은 수백 미터에 불과하다. 노인의 노동력으로 적당한 동 선이다.

그보다 더욱 축복은 거실 앞 전면이 통유리다. 3층, 그, 창 앞에 서면 전면 6미터 도로 앞에 있는 작은 공원이 내 집 정원 같이 펼쳐진다. 봄, 여름, 가을, 겨울, 가지각색의 풍경들은 나를 행복하게 한다.

지금은 남편이 나를 혼자 두고 눈 덮인 산골짜기로 떠났던 그 겨울 같이, 눈이 많이 내린 겨울이다. 잎을 다 떨군 나뭇가지에 흰 눈이 소복소복 쌓여 있다. 솜 웃을 입은 것 같은 나뭇가지들은 정감을 불러일으킨다. 포근한 마음이 되어 공원의 여기저기를 한동안 둘러보다가 머리를 40도 각도로 돌리면, 집에서 2분 거리에 있는, 서울에서는 제일 크다는, 교인 수가 사만명이라는 교회의 십자가 탑이 '예수구원'이라는 구원의 말씀을 걸고 눈앞에 다가온다. 그러면 경건한 마음으로 두 손을 모으고 아침 기도를 드린다.

'하나님, 지난밤도 깊은 잠에 두셨다가 오늘 또 이렇게 하루를 허락하시니 감사합니다, 오늘도 온가족이 당신을 경외하며, 당신의 법도를 지키며, 당신의 계명을 지켜, 당신의 사랑 받고, 보호 받고, 인도 받는 모두가 되게 해 주셔서 당신께는 영광, 저희들에게는 평화의 하루가 되게 해 주시옵소서. 주신 사명 잘 감당하며, 최선을 다 하는 오늘 하루가 되게 해 주시고, 이 악한 세태 속에서 빛과 소금의 직분을 다 하는 하루가 되게 해 주시옵소서. 온 가족이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십자가의 도를 잘 지켜 이 가정을 믿음의 반석 위에 든든히 세우게 해 주시옵소서......,

아침 시간이 끝나면, 하루 일과가 시작된다. 월, 수, 금, 세 번, 오전에는 은행에 가거나, 장보기를 하거나, 병원을 가고, 오후에는 피티니스에 가서 운동을 한다. 월, 수, 금요일에 바깥 볼 일은 다 마무리한다.

화, 목, 토 삼일은 일절 바깥출입을 하지 않고, 성경 필사를 하거나, 책을 읽거나, 글을 쓴다

주일 날은 온 가족이 다 함께 한 교회에 가서 예배를 드리고, 맛 잇는 점심을 함께 먹으며, 한 주일 동안 있었던 이야기로 오후 한 때를 함께 보낸다. 난 행복한 노인이다.

나는 23살에 결혼을 했고, 53살에 혼자가 되었다. 그리고 지금 내 나이 83살이다. 내가 대입 고시를 치른 때가 6.25 전쟁 직후였다. 많은 형제에 맏딸인 나는, 대학 국문과에 합격은 했으나, 대학진학을 포기해야 했다. 바로 위에 오빠가 의용군에 갔다 온 관계로 대학입학이 늦어졌다. 그러므로 나와 같은 해에 입학을 하게 되었으니, 내가 양보를 해야 했고, 밑에 동생이 다섯 명이나 있으니 대학은 꿈도 꾸지 못할 집안 형편이었다.

일찍 결혼을 했다. 곧 아이 셋을 낳고 기르느라 작가의 꿈은 꾸지도 못했고, 또 남편 사업을 대신하느라 문학에 대한 열망은 접어 두었었다. 회사 일이 어느 정도 안정되자, 나는 늦은 나이에도 공부를 시작했다. 문화센타에서 시 공부를 시작했다. 다음은 수필반에서 수필 공부를 했다.

그리고 본격적으로 중앙대학교 문예 창작과에 입학을 했다. 단편을 여러 편 썼다. 6년이라는 긴 세월동안 열심히 썼다. 교수님이 이번에는 장편을 한 번 써 보도록 하자고 했다.

장편,

첯페이지, 마지막 페이지, 가장 감명 깊은 장면, 이렇게 세장을 써 오라고 했다. 나는 정말 심혈을 기울여서 썼다. 다음 시간 선생님은 이 많은 작품 중 소설이 될 만한 작품은 내 작품 하나뿐이라고 했다.

나는 그 날부터 2년에 걸쳐 작품을 썼다. 칠십이 넘은 나이에 밤을 새우면서 썼다. 선생님의 칭찬 한마디에 고무되어 용기를 얻고, 힘을 내어 열심히 썼다. 쓰면서 문우들과 선생님의 합평을 토대로 개작을 해 가면서 썼다. 그리고 문학상 공모전에 응모하기를 아홉 번째, 제 7회 혼불 문학상 응모 전에 응모했다.

평소와 같이 운동을 끝내고 핸드폰을 열어 보았다. 누가 급한 문자라도 남기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해서다. 핸드폰 문자에 혼불 문학상에서 문자가 왔다. 혼불에서? 혼불에서? 이것은 분명 보통 일이 아니다. 급하고 다급한 마음에 손이 벌벌 떨리고, 가슴이 두근거려 숨도 제대로 못 쉴 지경이다. 힘겹게 열어본 화면에는 '혼불 문학상 수상작 발표' 라는 글귀가 적혀 있다. 내게 이런 문자가? 내가? 아! 하나님 감사합니다. 눈물이 앞을 가려 화면을 볼 수가 없다. 잠시 진정하고 다시 자세히 읽어 보았다. 282명 중 수상은 하지 못했지만, 예선 17편 안에 들었다고 한다. 아! 하나님 감사합니다. 이제 내가 대가들의 인정을 받았다. 이만하면 족하다. 이제 나도 작가라고 생각하니 너무 기뻐서 피티니스에서 집에 올 때까지 하나님 감사합니다. 를 중얼거리며 울면서 왔다.

내가 처음 글을 써서 칭찬을 받은 것은 6.25 전쟁이 나기 전, 중학교에 입학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였다. 그 때는 좌익 우익이 딱 갈라진 시대가 아니었다. 프롤레타리아의 이상론에 심취되어 부자는 부자대로 가난한 사람은 가난한대로 유토파아를 꿈꾸면서 그 이론에 매료되어 있던 사람들도 많은 때였었다. 당국과 학교에서 반공표어를 써 오라고 자주 숙제를 내 주었다. 국민들의 사고를 각성시키기 위해서 반공 표어를 길에도 많이 걸어 놓던 시대였었다.

하얀 칼라에 귀 밑 일 센치 미터의 머리를 찰랑거리면서 한참 폼을 재던 나는 당당하게 학교 현관 정문으로 들어섰다. 정문 중앙 맞은편에

"무궁화를 좀 먹는 붉은 벌레 없애자."라는 표어가 붙어 있었다. "아니, 저건 내가 쓴 표어잖아" 그 순간 커다란 붓 글씨로 벽면을 가득 채운 내 표어 앞에서 경직된 모습으로 한참을 서 있었다. 그리고 그 감격은 아침마다 학교 현관을 들어설 때마다 더 해 갔었다. 아마도 내게 문학에 대한 열망의 씨앗이 심겨진 때는 그 때가 아닌가 싶다.

그리고 두 번째는 부산 피난시절, 피난민 학생들은 거주지에 속한 학교에 편입 되었다. 나는 동대신동 구덕산 밑에 위치한 부산여중으로 갔다. 천막으로 교실을 만들고 피난 학생들은 천막교실에서 공부를 했다. 다닥다닥 붙어 앉아서 무릎 위에 책을 놓고 수업을 했다.

얼마 후, 당국에서는 나름대로 부산으로 피난 온 선생님들을 중심으로 학교를 시작하라고 했다. 모두 본교로 돌아 왔다. 하지만 30~40평의 일본식 건물에 전교생이 다 들어가야 했으니, 전교생이라야 몇 십 명 되지도 않았지만, 비좁기가 이루 말 할 수가 없었다. 집은 집대로 단칸방에서 온 식구가 살았으니. 집에서나 학교에서나 그 답답함은 무어라고 표현할 길이 없었다.

그러던 차에 진해로 소풍을 갔다. 답답했던 모든 것을 다 털어내고 마냥 즐거워서 학교로 돌아왔고, 감상문을 썼다.

월요일 아침 조회 시간에 전교생이 다 모인 자리에서 최우수 작품 낭송이 있었다. 나는 떨리는 목소리로 내 작품을 또박또박 읽어나가며, 그 때 내 마음에 자긍심을 심게 되었다. 그리고 아마도 그 때가 문학에 대한 나의 열망의 씨앗이 발아된 시기가 아니었나 생각되는데......,

이제, 아이를 키울 일도 없고, 사업을 해서 돈을 벌어야 되는 일도 내게는 없다, 다만 나는 나만을 위해서 내가 하고 싶은 일들을 하며 내 삶을 꾸려 나가면 된다.

보고 싶은 책 읽으며, 쓰고 싶은 것, 쓰고, 다정한 친구들과 아름다운 곳으로 여행 다니며, 내 마지막 삶을 즐기면서 살기를 바랄 뿐인데, 하나님께 빌기는 너무 오래 살아 아이들에게 폐 키치는 일 없게 되기를 빌 뿐이다.

당선소감

민윤숙
민윤숙

오늘도 여전히 기운이 없다. 나만 그런 것이 아니다. 피트니스에서 만나는 회원들 중, 80살이 넘은 회원들은 거의 다 그렇다. 만나기만 하면 기운 없다는 말이 인사다. 그래도 운동은 해야 된다는 생각에 힘을 내서 집을 나섰다. 지하철을 타려면 12분을 걸어야 한다. 왕복 12분이면 합해서 24분이다. 야박하게도 그것을 운동 한 것이라고 친다. 그래서 걷는 운동은 그것으로 때우고, 체육관에서 이것저것 한 시간쯤 시간을 보내다가 사우나를 하고 나오면 그 날 책임양은 다 하는 것으로 된다. 나는 원래 운동을 싫어해서 억지로, 조금씩 하는 것으로 큰 생색을 낸다.

피티니스에 도착하여 신발장 앞에서 신을 벗는데, 핸드폰이 울렸다. 폰을 받으니 "아니야, 안돼, 안돼" 여자의 가냘핀 음성이 멀리서 들린다. 나는 '뭐가 안 된다는 거야, 웃겨, 누구지?' 생각하는데 "아니야, 안돼, 안돼,"가 시니어 문학상을 받게 되었다고 한다. 그제야 어슴프레 말귀를 알아들은 나는 "? 지금 뭐라고 하셨어요?" 내 귀를 의심하며 다시 물었다. "시니어문학상을 받게 되셨는데, 본인 확인 차 전화 드렸습니다. 문자로 자세한 것 보내 드리겠습니다" ! 이게 무슨 일이람, 내가 상을? 너무나 감격하여 가슴이 두방망이질을 해 대고, 말문이 막히고, 숨이 차서 그 자리에 멍청히 앉아 있었다. 정신이 나가버렸다. 그 때 마침 딸에게서 전화가 왔다. 그런데 나도 의식하지 못한 순간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왜 딸의 전화를 받은 순간 눈물이 터졌는지, 나도 모르겠다. 엄마에게 의존하던 이 노녀는 모르는 사이 이제 딸을 많이 의존하나보다. 딸이 내게 전화 한 용건은 묻지도 않고, 내가 상을 탔다고 말 하는 순간 눈물이 터져서 흑흑 흐느끼며 울었다. 내가 컴퓨터로 글을 쓰기까지 딸도 많은 고생을 했다.

나는 원래가 기계치다. 처음 TV가 나왔을 때, 나는 TV도 켜지 못했었다. 식구들이 켜 놓은 후에야 슬그머니 끼어 앉는다. 집에 있는 모든 가전제품 만지기를 싫어했던, 그런 나에게 컴퓨터를 가르친 것은 딸이다. 딸은 못된 엄마에게 무던히도 구박을 받은 선생이다. 기계에 대한 기본적인 지식이 없으니, 모든 것은 일회 학습으로 앞뒤가 연결이 안 된다. 말귀를 알아듣지 못하는 엄마를 그래도 열심히 가르쳐, 세월이 지나니 그 실력으로 장편도 쓰고, 단편도 쓰고, 수필도 쓰고, 시도 쓰고, 성경 필사도 하고.....이제 매경 시니어 문학상에 당선되어, 논픽션과 수필, 두 부문에서 상을 타게 되었단다.

그런데 무엇이 나를 그토록 눈물 나게 했을까? 처음에는 너무나 기뻐서 눈물이 쏟아졌는데, 차츰 그 것은 슬픔으로 변해 서럽게 흐느꼈다. 그 서러움의 실체는 무엇이었을까? 곰곰이 생각한다. 대학 국문과에 들어가 문학을 전공하고, 신문기자가 되어, 마감 사간을 맞추기 위하여 가방을 둘러메고, 긴 머리를 휘날리며, 이리 뛰고 저리 뛰는 유능한 기자의 모습을 꿈꾸었었는데, 그 꿈은 사라지고, 나이 80이 넘은 나이에 이제 문학상을 받게 된데 대한 회한이었을까? 아니면. 기쁨이나 슬픔의 감정은 같은 맥락의 것인가? 한참을 울고 난 뒤 개운해진 마음으로 체육관으로 들어갔다.

그런데 참으로 신기한 일이다. 조금 전까지 힘이 하나도 없다고 생각했었는데, 내가 작가가 되었다고 생각하니 기운이 넘친다. 체육관에서는 운동기구를 마구 휘둘러 쾅쾅 소리를 내고, 탕에서도 힘껏 문질러 피부가 빨갛게 되고, 사우나실로, 샤워실로 훨훨 날아다닌다. 몸을 움직이기 싫을 만큼 기운이 없었던 것이, 몸에 기운이 빠진 것이 아니라, 정신적인 나태함이 였나? 사람의 모든 행사는 마음먹기에 달렸다는 것을 새삼 느낀다.

집으로 돌아와 당선 소감을 썼다. 준비도 없이, 흥분상태에서 갑자기 글을 쓰려니 잘 되지 않는다. 그래도 써야 하니 썼다. 밤을 새웠다. 잠은 멀리 달아나고 눈은 초롱초롱하다.

나도 이제부터 시작이야!!! 이제 작가로 인정받았으니 열심히 쓰면 된다. 2013년도 노벨 문학상 여성 수상자, 앨리스 먼로, 그녀도 나와 동갑인 83세다. 늦었다고 생각할 때가 가장 이른 때라는 말도 있다. 하면 된다. 하면 된다. 파이팅!!! 민윤숙.

최신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