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선중 (70)
수제 양복점에서
일생을 행사로 끌고 왔거나
끌고 갔거나 하는 일들로 의복들은 다 헤졌다.
갈수록 허물어지던 누추를
한 벌 정장으로 지탱해왔던 것이다.
수제 양복점에서 양복을 맞췄다.
그 어떤 의식도 없는
무료한 양복 한벌을 맞췄다.
자꾸 색상에서 버려진 듯
또는 신세진 듯
주변의 색과 나는 점점 구별된다.
이것은 철저한 소임인 듯
은폐술이거나 소외의 풍이다.
단추들은 인심이 후하게 바뀌었다.
주머니는 그 어떤 일탈의 비상금도
필요 없음으로 형식적이어도 무방하다.
등판은 여분의 치수를
조금 앞쪽으로 구부려야 할 것이다.
그에 맞춰 어깨는 더 이상의 상승의 힘을
주문하지 않기로 한다.
왼쪽 젖 가슴 위의 견장들,
이젠 흙냄새 좀 맡으라고
바지통을 널찍하게 잡았다.
잘 삭힌 몸, 녹이 많이 슨 몸
가봉(假縫)이 끝나고
잘 맞춤된 옷은 관(棺)을 닮았다.
당선인 소감
- 폐정(廢井)이 될 때 까지

우물을 파려면 한 우물을 파야 한다는 말을 듣고 한 우물을 파는데 반세기 동안 삽질을 하였지만 늘 푸석거린 먼지 뿐이었다. 내가 파는 우물은 원래 물이 없고 이렇게 먼지만 나는 곳인가 보다라고 생각하고 지내 왔다. 그래도 한 우물을 파는 일을 시지프스의 산을 오르는 사람과 같은 마음으로 해 왔다.
그동안 갈등이 많았다. 괜히 헛고생하는 것 아닌가 하는 회의감이 들 때가 많았고, 여기 저기에서 다른 사람이 보이는 눈총이 곱지 않아 자포자기하는 날도 많았다. 그래도 다음 날 눈을 뜨면 삽을 들고 마당으로 가는 것이 습관이 되어서 오늘도 마당으로 나가서 삽질을 하는데 물기가 보인 것이었다. 마중물이 슬쩍 비친 것이다. 내가 잘못 본 것은 아닌가 어리둥절하였다. 이제까지 먼지만 나는 곳을 파왔는데 이게 어떻게 된 일일까 두렵기도 하였다. 그동안 마중물 없는 삽질의 일들이 아스라이 머리에 주마등처럼 지나갔다.
참 고생이 많았다, 하는 마음도 들었다. 어떻게 하든 이제 문턱에 이르렀다. 그러나 이것은 하나의 작은 시작에 불과하다는 생각이 든다. 왜 내 마음 속에 그동안의 앙금과 응어리를 풀어 주는 오솔길의 입구에 드는 것을 가지고 호들갑을 떨면서 먼길을 보지 못한 우(遇)를 범해서는 안된다는 생각이기 때문이다. 다른 사람의 아픈 마음을 같이 아파해주고 보듬어 주는 곡비(哭婢)의 길로 이길을 가야 한다는 순수한 마음의 길이 옳을 것 같아서이다. 여하튼 지난 일들은 나의 앞 여정에 밑거름의 역할을 하면서 더 고된 삽질의 일들이 앞에 놓여 있다고 생각한다. 지금은 첫 마중물이어서 구정물도 많고 엉성한 삽자국이 많이 있음에도 선택을 해주신 심사위원님께 넙죽 큰절을 올리고 싶다.
그리고, 옆에서 뒤에서 때로는 앞에서 지켜 봐 주신 분들께도 같은 절을 올리고 싶다. 늘 투덜거리지만 뒤로는 밀어 준 아내, 아빠는 영원한 우상이라고 믿는 큰딸 선영 작은 딸 선경 아들 선범이 모두가 나의 디딤돌이었다. 때로는 구박을 하고 눈총을 주고 무시를 할 때는 서운한 마음도 들었었는데 오늘부로 그런 마음들을 모두 씻어 버리고 그런 것이 모두 나의 밑거름이었다 정말 감사하다라고 다시 절을 올리고 싶다. 이제는 이 과정은 그냥 작은 통과의례이다. 처음에 먹었던 정말 먼지만 있는 우물파기의 마음을 한 순간도 버리지 않고 나의 우물파기에 진력할 일만 남았다. 그리고, 파여진 우물을 늘 관리하고 손질을 하면서 항상 맑은 물이 넘치는 우물이 되도록 노력할 일만 남았다.
이제 시작이다. 조금은 늦은 나이지만 그 때가 제일 빠른 때이라는 말이 있듯이, 정말 일찍 시작한 것이다라는 마음으로 삽질을 할 것이다. 다른 사람이 너무 늦어버린 때에 그렇게 어려운 길을 가려고 하느냐고 물으면 나는 말할 것이다. 마지막 그날까지 나의 삽을 놓지 않을 명분이 생겼는데 어떻게 하라는 말이냐 하고 되물을 것이다. 아마 내가 삽을 놓는 날은 세상을 바꾸어 타는 날일 것이다. 그때 가서는, 내가 팠던 우물은 폐정이 될 것이다. 그런 길을 가기 위해서는 서둘지 않을 것이다.
지금부터 먼 길을 갈 수 있는 기초공사를 차근차근 잘하여 아무리 험하고 어려운 길이라도 헤쳐 나갈 수 있게 하여 탄탄한 삽질 길이 되게 할 것이다. 다시 한번 마중물 역할을 해주신 심사위원님들께 감사의 말씀을 드리고, 그분들의 바램에 무색하지 않는 삽질 작가가 될 것이라고 스스로 다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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