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의 영산, 후지산(富士山)에 이르는 자전거길

저 멀리서 바라만 볼 때 멋있는 산이 있고, 실제로 올라보면 낭만이 깨지는 산이 있다. 마치 추억속의 첫사랑을 오랜만에 다시 보면 실망하는 것과 같은 이치다. 후지산은 딱 그런 산 이었다. 그냥 먼발치에서 눈으로만 감상하는 것으로 족해야 했다. 멀리서 보면 좌우 대칭이 잘 잡혀있고 만년설이 이마자락에도 늘 걸쳐져 있어 잘 생겨 보인다. 하지만 정작 산속에 들어서면 지루함, 무미건조, 힘듦, 딱 이 세 마디만 남는다. 활화산이라 그런지 그 흔한 계곡도 없고 물도 흐르지 않는다. 새소리도 드물다. 숲들도 밋밋하다. 그래도 소영웅 심리 탓에 일본인들이 신성시한다는 후지산을 자전거로 오르기로 한다.
마치 큰 숙제를 해치우는 사명감이랄까. 3,776m 등산길은 애당초 무리이고, 자동차도로가 닦여져 있는 2,305m 오합목(五合目)까지 오르는 것이다. 후지산에 이르는 길은 후지노미야(富士宮])/ 고텐바(御殿場)/ 스바시리(須走)/ 요시다(吉田) 코스 등 4개의 등산로가 있는데 어느 쪽을 선택하나 본격적인 등산로의 초입인 오합목까지는 이동해야한다. 자전거로 오합목에 이르는 길은 크게 두 가지로 시즈오카현(静岡県), 카와구치코(河口湖)호수에서 시작하는 경우와 하코네(箱根)에서 고텐바(御殿場)를 거쳐서 오르는 두 가지의 경우다. 어디서 가나 후지산에 이르는 과정은 쉽지 않다.

고생 덩어리 아타미(熱海)-하코네(箱根)-고텐바(御殿場)-자전거 루트.
항공으로 나리타공항 도착 후, 요코하마(横浜), 가마쿠라(鎌倉), 아타미(熱海), 하코네(箱根)를 거쳐 고텐바로 들어가는 루트로 정했다. 정말이지 쉽지 않은 여정이었다. 끝도 없이 이어지는 업힐과 지루함은 지치기에 딱 좋았다. 나중에 안 일이지만 나리타공항에서 카와구치호수로 직행하는 리무진으로 이동 후 자전거 루트를 진행했어야 했는데, 죽을 만큼 고생 끝에 "아! 이렇게 가면 안되는구나" 라는 값진 교훈을 얻었다. 값비싼 댓가를 치른 후유증이랄까. 후지산을 다녀 온지 얼마간의 시간이 흘렀지만 아직도 고개가 절레절레 흔들어진다.

잘 생긴 항구도시, 요코하마(横浜), 역사휴양도시 가마쿠라(鎌倉).
나리타공항에서 대중교통으로 항구도시 요코하마로 향했다. 열차뿐만 아니라 버스도 자주 다닌다. 1859년 미·일통상수교 이후 근대화의 발판이 된 요코하마는 밤이 아름다운 도시다. '이시다 아유미'는 아직도 우리 귀에 익숙한 "Blue right YOKOHAMA" 라는 곡으로 요코하마의 낭만과 밤을 노래했다. 자전거로 역사도시 '가마쿠라'로 향한다.

가마쿠라는 역사, 불교, 바다로 집약되는 도시이다. 12세기 약150년 동안 일본 막부의 수도였다. 교토와 비교할 정도는 아니지만 역사적인 자취가 도시 곳곳에 숨겨져 있다. 도쿄에서 불과 50km 남짓 떨어져 있지만 고도(古都)의 소박함을 고스란히 지니고 있다. 13세기 무렵에 오늘날 일본 불교의 중요한 줄기인 니치렌종도 여기서 태동했다. 가마쿠라는 깜짝 놀랄 정도로 아름다운 바닷길을 선사한다. 촌스러운 가마쿠라역에서 불과 500m 정도만 벗어나면 눈부신 태평양 바닷길로 이어진다. 6월 하순 따사로운 햇살을 맞으러 나온 인파는 무시무시하다. 마치 휴가 절정기에 동해안 7번 국도에 온 듯 한 착각을 일으킬 정도로 즐비한 사람들과 꼬리를 물고 이어지는 차량들의 행렬이 현기증이 날 지경이다. 이 해변 길을 약70km 달려 오늘의 목적지인 아타미까지 향해야 하므로 낭만은 제쳐두고 라이딩 속도를 높인다.
자전거는 차량들과 인파에 밀려 계속 멈칫멈칫한다. 저 멀리 가마쿠라 경치 중 최고로 꼽히는 '에노시마(江の島)'로 이르는 대교가 보인다. 마치 미야자키의 '아오시마(青島)'를 연상시킨다. 3월의 비 내리는 아오시마는 적막했지만 모든 것이 그림엽서였다.
쉼없이 달렸다. 저물어 가는 해도 뉘엿뉘엿 댄다. 아타미까지는 약10km 남짓 남았다. 지금부터는 깎아지른 듯 한 지그재그 암벽길이다. 업다운도 이어지고 터널도 몇 개씩 통과한다. 여유가 있다면 보다 천천히 이 해안도로를 즐겨야 했는데 어둑해져 마음만 급해진다. 가파른 언덕도로를 얼마나 올랐을까. 아타미 시가지의 전경이 한눈에 내려다뵈는 전망대에 올라섰다. 힘겹게 산언덕에 올라 목적지를 휙 조망하듯 둘러보는 쾌감이란! 아타미시의 흐릿한 야경이 멋스럽다.

이즈반도의 정취를 품고있는 온천도시, 아타미시(熱海市).
호반의 도시, 하코네(箱根)를 간다.
아타미는 이즈반도의 절벽 위 깎아지른 듯 한 해안선을 따라 발달된 도시이다. 오래된 온천 지대이기도 하다. 하코네로 이르는 통로이다. 도시 전체를 큰 구릉지가 감싸고 있어서 대부분의 건물들이 언덕위에 있다. 늦은 저녁 언덕 위 빼곡한 미로 속을 20분 이상 헤매고서야 예약해둔 숙소에 도착했다. 천천히 이즈반도의 절경을 감상하며 아타미시를 즐길 기회를 놓친게 아쉬웠다. 샤워후 저녁식당을 찾아 헤맸지만 죄다 문을 닫은 후였다. 도리 없이 편의점에서 라면이랑 김밥 한 줄을 샀다. 갑자기 처량한 생각이 몰려들었다. 새벽녘 한국을 출발하여 이 먼 곳까지 7시간여 페달링하며 고생스레 왔는데 고작 김밥과 라면 만찬이라니! 그런 생각도 잠시뿐. 내일 하코네를 거쳐 고텐바의 언덕길을 생각하면 부지런히 쉬어두어야 했다.

다음날, 빵과 커피 한잔으로 아침을 떼우고 이른 출발을 했다. 하코네를 거쳐 고텐바 까지는 약50km에 불과하지만 단단한 결심이 필요했다. 아타미에서 하코네에 접어드는 길은 숨 쉴틈도 없이 곧장 업힐이다. 경치는 고사하고 밑만 바라보고 페달링을 해야만 한다. 아! 정말 끝도 없는 오르막이다. 몸도 점점 지쳐간다. 얼마나 올랐을까. 약2시간여 오르막 끝에 큰 쉼터가 보인다. 여기서 하코네의 자랑거리인 아시호수가 한눈에 들어온다. 일본은 동네마다 소프트 아이스크림이 특산물처럼 명성이 높다. 가는곳마다 아이스크림을 사먹지 않으면 무언가 뒤쳐지는 느낌을 받는다. 이곳 휴게소의 하코네 아이스크림 코너 앞에도 여지없이 사람들이 줄지어 서있다. 뒤질 새라 땀을 삐질삐질 흘리면서도 아이스크림 하나를 얻어 건졌다. 어린애 마냥 흘러내리는 크림을 쭉쭉 빨면서 하코네의 본격적인 경치 감상에 빠져든다. 언덕 아래로 '아시호수'가 푸르듯 펼쳐져있다. 하코네는 아시호수 주변을 따라 발달된 호반도시이다. 호수주변 어디서나 인파들은 넘쳐난다. 힘겹게 올라 왔지만 시원스런 아시호수가 힘듦을 잠시 잊게 해 주었다. 장어 덮밥으로 점심을 해결하고 아울렛으로 유명한 고텐바를 향한다. 끊임없는 오르막 내리막이다. 소위, 낙타 등처럼 이어지는 업다운 코스는 지치기 십상이다. 아타미, 하코네, 고텐바 코스는 솔직하게 두 번 다시 시도 하고픈 생각이 조금도 없다. 이 모든 것이 '후지산"을 가기위한 노동의 과정일 뿐이었다. 고텐바 시가지의 큰 언덕에 들어서자 저 먼발치에서 구름속의 후지산이 그 위용을 드러낸다. 마치 큰 숙제를 앞에둔 듯 전율이 몰려왔다. 후지산 2,305m 라이딩을 위해서 최상의 컨디션을 유지해야만 한다. 서둘러 휴식처에 들었다.
내일 후지산의 모습은 어떨까. 얼마나 힘들까. 걱정 반 기대 반으로 꿈속으로 빠져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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