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달 동안 네 곳에서 여덟 차례 만세시위
칠곡군의 3·1운동은 1919년 3월 12일 인동면 진평동(1978년 구미시로 편입)을 시작으로 4월 10일 석적면 성곡동까지 한 달 동안 네 곳에서 여덟 차례 일어났다. 하지만 약목면 약목시장 독립만세는 기획단계에서 좌절되고 말았다.
인동면 진평동 독립만세는 3월 12일부터 3일 동안 네 차례에 걸쳐 마을 뒷산에서 펼쳐졌다. 규모가 작게는 20~30명, 많을 때는 약 200명이었다. 4월 9일에는 약목면 평복동과 석적면 중동에서 마을 청년들이 독립만세를 불렀다. 마지막으로 석적면 성곡동에선 4월 9일과 10일 이틀에 걸쳐 마을 인근 밭에서 전개됐다.
칠곡지역 3·1운동은 기독교 측 인사들과 유림들이 주도했다. 이들은 인근 지역인 대구나 성주·선산은 물론 3월 1일 이후 전국에서 3·1운동이 일어나고 있다는 소식을 접하게 되면서 독립만세운동(이하 독립만세)을 계획했다. 특히 3월 8일 대구 서문시장 독립만세에 참가했던 이영식과 안도수는 이 지역의 독립만세를 끌어내는 촉매 역할을 했다.
◆인동면 진평동 만세시위

이곳의 독립만세는 대구 계성학교 학생 이영식이 인동교회 목사 이상백을 만나면서 시작됐다. 이영식은 3월 7일 독립선언서 20장을 들고 이내성과 함께 진평동 이상백의 집으로 찾아갔다.
그리고, 그 자리에서 독립선언서를 보이며 전국적으로 독립만세가 일어나고 있으니 이곳에서도 일으킬 것을 촉구했다.
이들은 더 많은 사람을 참여시키고자 같은 동네에 사는 진평교회 목사 권영해와 이영래·임점석·임용섭·박명언·허도언 등에게 독립선언서를 보이며 동참해 줄 것을 요구했다. 이렇게 동지를 모은 이들은 3월 12일을 거사일로 정하고 본격적인 준비에 들어갔다.
거사일이 돌아오자 이들은 필사해 둔 독립선언서를 곳곳에 붙이는 한편, 동네를 다니면서 사람들을 모아 마을 뒷산으로 올라갔다. 약속 시간인 오후 8시가 가까워지고 200여 명이 모이자 이상백과 이영식은 민족자결주의 원칙에 따라 독립될 것이라고 연설하고 독립만세를 선창했다.
이에 사람들이 태극기를 휘날리며 독립만세를 소리 높여 외쳤다. 이들의 독립을 향한 열기는 다음날에도 이어져 약 20~30명이 3월 13일 오후 4시와 9시에 같은 곳에 모여 다시 독립만세를 외쳤다.
이 일로 1919년 4월 25일 대구지방법원에서 이상백은 징역 2년, 이내성은 징역 1년 6월, 이영래·임점석·임용섭은 각각 징역 1년, 박명언·권영해는 각각 징역 10월, 서천수·박순석·장주서·이윤약·서기옥·박근술·임삼선·장상건은 각각 징역 6월을 받았다.
6월 14일 대구복심법원에서 이상백은 징역 1년 6월로, 이영래·임점석·임용섭은 징역 8월로, 박명언과 권영해는 징역 6월로 형이 감형됐다.
한편, 이영식과 같은 계성학교 학생인 김도길은 자신의 고향인 진평동에 들어와 독립만세를 이어 나갔다. 그는 동네에 사는 박봉술과 김성윤 등을 만나 독립만세를 협의했다.
이후 3월 14일 오후 9시 200여 명을 이끌고 뒷산에 올라 독립만세를 불렀다. 이로 인해 1919년 4월 25일 대구지방법원에서 박봉술은 징역 1년, 김성윤·박삼봉·박명출·장영직·김삼용·권경보·장준현은 각각 징역 6월을 받았다. 그리고 김도길은 1919년 8월 28일 대구지방법원에서 징역 6월을 받았다.
이 외에도 임동석이 3월 14일 밤 진평동 길에서 허도봉 등 여러 사람과 함과 함께 독립만세를 외쳤다. 이 일로 1919년 5월 8일 대구지방법원에서 징역 6월을 받았다가 6월 6일 대구복심법원에서 태형 90(대)으로 감형됐다.

◆약목면 평복동 만세시위
3월 14일 계획됐던 약목시장 독립만세는 실패로 돌아갔지만 독립을 향한 열기는 4월 9일 약목면 평복동에서 다시 일어났다. 이곳의 독립만세는 지하수에 의해 마을 동쪽 산에서 펼쳐졌다.
지하수는 3월 1일 이후 전국적으로 독립을 요구하는 3·1운동이 점점 치열해지고 4월에 들어와서는 이웃 성주군에서 활발하게 펼쳐지자 평복동 독립만세를 결심하게 됐다.
이에 몇몇 사람들을 만나 논의한 후 4월 9일 저녁 마을 청년들을 권군필 집에 모이게 했다. 김동술·박수병·장상흠·박수환·김봉근 등 12명이 모이자 지하수는 독립만세를 부르는 것은 독립국이 되기 위한 것이니 만세를 부르자고 했다.
권성수도 나서서 다른 사람들에게 다 같이 부르자며 적극 권유했다. 이들은 바로 실행하기로 하고 마을 동쪽 산에 올라 독립만세를 불렀다. 이 일로 주도자 여섯 사람이 체포돼 재판을 받았다.
지하수는 나중에 체포돼 1919년 11월 27일 대구지방법원에서 징역 6월을 받고 12월 13일 대구복심법원에서 형이 확정돼 옥고를 치렀다. 나머지 다섯 사람인 김동술·박수병·장상흠·박수환·김봉근은 5월 8일 대구지방법원에서 징역 6월을 받았다가 5월 30일 태형 90으로 형이 바뀌었다.
◆석적면 중동 만세시위
석적면 독립만세는 중동에 사는 양반 장지희·장영창·장도식에 의해 주도됐다. 평소 일제강점에 대해 분개하며 국권회복을 염원하고 있던 이들은 3·1운동이 전국적으로 확대돼 4월 8일에는 성주와 선산군에서 크게 일어날 것이라는 소식을 듣고 이곳에서도 독립만세를 펼쳐야겠다고 결심했다.
이들은 4월 9일 장지희의 형 장철희 집에 모여 이날 밤 마을 뒷산에서 실행한다는 구체적인 계획을 세웠다. 오후 9시가 되자 이들은 마을 청년 22명을 이끌고 뒷산 꼭대기에 올라 '대한독립만세'를 크게 불렀다.
그러나 바로 달려온 경찰에 21명이 체포됐고 그 가운데 장지희와 장영창을 비롯한 김득룡·장두박·장영희·장영남·장영옥·장영석 등 8명이 재판에 넘어갔다.
장지희와 장영창은 1919년 5월 24일 대구지방법원에서 징역 1년을 받았다가 6월 25일 대구복심법원에서 징역 8월로 감형됐고 장지희는 9월 8일 고등법원에서 형이 확정됐다.
그리고 김득룡·장영희·장영남·장영옥·장영석은 5월 24일 대구지방법원에서 징역 5월을, 장두박은 태형 90을 받았다.
◆석적면 성곡동 만세시위

이곳의 독립만세는 성곡동에 거주하는 양반 장병규·장준식·장영조·장재식 네 사람이 이끌었다. 이들은 3·1운동이 전국에서 일어나고 독립을 요구하는 함성이 높아가자 자신들의 마을에서도 독립만세를 결행하기로 결심했다.
특히 장영조는 인근 선산에서 독립만세가 일어났다는 소식을 듣고 박팔문 등 마을 사람들에게 함께 독립만세를 부르자고 제안했다. 드디어 36명이 모여 4월 9일과 10일 이틀 동안 오후 8시 성곡동 북쪽 밭에서 독립만세를 불렀다.
이로 인해 21명이 체포됐으며 그 가운데 장영조와 박팔문은 재판에 넘겨졌다. 장영조는 1919년 5월 17일 대구지방법원에서 징역 1년 2월을 받았다가 6월 17일 대구복심법원에서 징역 8월로 감형됐다. 박팔문은 5월 17일 대구지방법원에서 징역 4월을 받았다가 6월 17일 대구복심법원에서 태형 90으로 형이 확정됐다.
◆3·1운동 이후...장진홍 의사

3·1운동 이후 칠곡군 출신 독립운동가로 가장 대표적인 인물은 장진홍(1895~1930) 의사다. 칠곡군 인동면 무림리가 본관인 그는 1907년 칠곡군 소재 인명학교를 졸업하고 1918년 광복단에 가입해 활동하면서부터 본격적으로 독립운동을 전개했다.
이후 장 의사는 1925년 베이징으로 망명해 폭탄 제조법을 배우고 국내에 잠입, 영천에서 다이너마이트를 제조해 대구 덕흥여관 박노선을 시켜 포장된 폭탄상자를 배달토록 해 조선은행 대구지점을 폭파했다.
이 사건 후 장 의사는 오사카에 거주하는 동생 장의환의 집에서 체포됐고 사형이 확정되자 일제에 의해 치욕스런 죽음을 당하느니 차라리 깨끗이 죽는다는 유언을 남기고 사형 집행을 하루 앞두고 향년 36세에 자결했다. 장 의사가 순국했다는 소식을 들은 대구형무소 수감자들은 감방을 파괴하고 대한독립 만세를 외쳤다.
장 의사의 유품은 독립운동관에 전시돼 있으며, 칠곡군 왜관읍 애국동산에는 '순국의사 장진홍 선생'이라는 명문이 새겨진 기념비가 세워져 있다.1962년 3월 건국공로 훈장이 추서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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