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셋 대구경북] <3>정치부터 바꿔야

입력 2018-07-18 05:00:00

지역민이 부려먹는 정치인부터 만들자

미국 정치학자 데이비드 이스턴은 정치에 대해 명쾌한 정의를 내놓은 바 있다. '가치의 권위적인(authoritative) 배분(allocation) 과정'이라는 것이다.

즉 정치란 개인 혹은 집단이 어떠한 가치관과 우선순위 그리고 권위(authority)에 기반을 둔 선택을 통해 희소한 자원과 가치를 배분할 것인가를 결정하는 과정이라는 의미다. 더 쉽게 설명하면 예산 배정과 국책사업 수혜지역 결정 등 한정된 국가자원을 어떻게 나눌지 고민하고 결정하는 과정이 정치라는 뜻이다.

자연스럽게 정치인은 선거에서 국민의 선택을 받은 뒤 앞서 설명한 정치 과정에 참여하고 그 결과에 책임을 지는 사람쯤 될 것이다. 그렇다면 그동안 대구경북에선 정치가 제대로 작동하고 정치인이 제 역할을 했을까?

◆대구경북 '동메달 국회의원'의 요람
"새누리당은 '경상도 국회의원은 동메달이고, 수도권 국회의원은 금메달이다'라고 항상 생각해왔다."

지난 2015년 7월 김무성 전 새누리당 대표최고위원이 취임 1주년 기자회견에서 한 말이다. 발언 직후 대구경북 지역민들은 새누리당이 배은망덕하다며 크게 반발했다. 이에 김 전 대표는 수도권 선거의 중요성을 강조하다 나온 실언이었다며 곧바로 사과했고 후폭풍도 잦아들었다.

하지만 자존심에 상처를 입은 대구경북 시도민들은 당시 설화(舌禍)를 계기로 새누리당(자유한국당)에 대한 '묻지마 지지'를 철회했다. 대구경북에 대한 보수당의 진심을 알았기 때문이다. 더 이상 잡아놓은 물고기 신세에 머물지 않겠다는 각오를 다지기도 했다.

지역 정치권에선 '이제 대구경북도 정신을 차려야 한다. 부산경남과 충청권처럼 지역정치권을 경쟁체제로 전환하고, 지역에 더 많은 결실을 가져다주는 정당에 힘을 실어주는 관행을 정착시켜야 한다'는 주장에 힘이 실렸다.

그렇게 보수당과 틀어진 지역 민심은 이듬해 총선에서 김부겸 더불어민주당-홍의락 무소속 후보에게 금배지를 안겼다. 허소 민주당 대구시당 사무처장은 "비(非)보수당 후보도 사람 좋고 능력 있으면 대구경북에서 정치를 할 수 있다는 신호탄을 쏘아올린 기념비적 사건이었다"며 "제2, 제3의 김부겸-홍의락이 되려는 정치 신인들의 움직임이 활발하다는 점이 가장 큰 수확"이라고 평가했다.

나아가 지난 6월 제7회 전국동시지방선거에선 자유한국당 독점구도에 확실하게 경종을 울렸다. 바른미래당 대구시당 관계자는 "40년 가까이 지역인재를 독점했던 정당이 받아든 성적치곤 초라하기 그지없는 지방선거 결과였다"며 "내용까지 들여다보면 한국당의 몰락은 기정사실이 아닌가싶다"고 평가했다.

지난 2016년 4월 총선에서 대구 지역에 출마한 이른바 진박(진실한 친박) 후보들이 한자리에 모여 박근혜 정부의 성공을 위한 공동 행동에 나서기로 했다. 매일신문 DB
지난 2016년 4월 총선에서 대구 지역에 출마한 이른바 진박(진실한 친박) 후보들이 한자리에 모여 박근혜 정부의 성공을 위한 공동 행동에 나서기로 했다. 매일신문 DB

◆반복되는 공천 농단의 뿌리, '우리가 남이가' 이제 그만
'우리가 남이가'는 경상도에서 아주 정겨운 표현이다. 어느 조직에서든 이 구호 하나면 단박에 유대감과 동지의식으로 구성원들이 하나가 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지금도 경상도 지역 시'군'구 재경향우회가 열릴 때마다 단골 건배사로 애용된다. 선창자가 '우리가' 하면 모든 참여자들이 '남이가'로 화답한다.

하지만 정치 영역에서 '우리가 남이가'라는 표현은 굴곡이 많았다. 지난 1992년 제14대 대통령선거에 나선 김영삼 민주자유당 후보 진영은 '우리가 남이가'를 앞세웠다.

부산경남 출신인 김 후보가 대구경북으로 지지세를 확장하기 위해 경상도는 한 뿌리라는 점을 강조하는 한편 지역감정을 조장해 호남 출신 김대중 민주당 후보를 고립시키기 위한 전략으로 채택됐다.

특히 1992년 12월 11일 터진 초원복집 사건으로 '우리가 남이가'라는 문구는 유명세를 치렀다. 초원복집 사건은 부산의 음식점인 초원복집에서 정부 기관장들이 모여 김영삼 민자당 후보 당선을 위해 지역감정을 부추기자고 얘기를 나눈 것이 통일국민당 관계자의 도청에 의해 세상에 알려진 사건이다. 당시 자리에서는 "우리가 남이가, 이번에 안 되면 영도다리에 빠져 죽자"는 얘기가 오간 것으로 전해진다.

정치권에서 '우리가 남이가'라는 표현이 애용되는 이유는 크게 세 가지다.
첫째, 하향식 표현이다. 권력관계에서의 약자나 손아래 사람이 먼저 '우리가 남이가'라고 표현하는 일은 없다. 철저하게 강자가 약자에게 자신의 뜻을 관철할 때 양념처럼 곁들이는 말이 바로 '우리가 남이가'다.

둘째, '우리가 남이가'라는 표현은 진영 논리를 앞세워 합리적인 이성을 마비시키는 기제로 작용한다. '우리가 남이 아니고 한 편이면 같은 이해를 추구하는 만큼 아무 생각 말고 나만 보고 따라오라'는 의미가 담겨 있다. 선동이 필요한 대중 정치인에겐 더 없이 매력적인 표현이다.

셋째, 일체의 반대 의견과 소수 의견을 허용하지 않겠다는 선언이 담긴 표현이기도 하다. '우리가 남이가'라는 반(半)선언, 반(半) 물음식 표현에 이른바 '토를 단다'는 것은 사실상 '나는 다른 길을 가겠다'는 표현이기 때문이다. 건강한 토론문화가 끼어들 틈이 없다.

그래서 그동안 '우리가 남이가'만 믿고 자행된 한국당의 공천 농단은 모두 적폐다. 냉철한 이성과 조목조목 따지는 합리주의 대신 패거리문화로 지역정치를 오염시켰기 때문이다.

지역 정치권 관계자는 "대구경북 시도민과 특정 정당이 한 편이 될지 남이 될지 시간을 두고 냉정하게 판단하고, 주권자에게 '우리가 남이냐?'라고 겁박하는 머슴을 단죄할 수 있는 정치가 지금 대구경북에 필요하다"며 "적어도 다음 선거에서 '우리가 남이냐'라고 묻는 정치인에게는 기회를 주지 않아야 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장세용 구미시장, 장 시장은 지난 6월 지방선거에서 민주당 후보로는 처음으로 경북의 기초자치단체장으로 당선됐다. 매일신문 DB
장세용 구미시장, 장 시장은 지난 6월 지방선거에서 민주당 후보로는 처음으로 경북의 기초자치단체장으로 당선됐다. 매일신문 DB

◆성과로 말하는 정당, 지역에서 힘 실어줘야
정치에는 외상이 없다. '이번에 뽑아주면 정말 잘 하겠다'는 표현은 정당과 정치인의 자세가 아니다. '지난 임기 동안 이러이러한 성과를 냈습니다. 한 번 더 기회를 주시면 다음 몇 가지 공약도 꼼꼼하게 추진하겠습니다'가 정답이다.

심지어 정치 신인마저도 자신의 활약했던 분야에서의 성과로 유권자들의 평가를 받아야 한다. 예를 들면 '제가 기업을 내실 있게 성장시킨 역량을 지역 사회를 위해 발휘하고 싶습니다' 정도는 돼야 한다. 지난해 대통령선거 과정에서 한 후보는 '공직은 경험하는 자리가 아니라 증명하는 자리'라고 규정하기도 했다.

이런 관점에서 현재 대구경북 정치를 독점하고 있는 한국당의 행태는 실망스럽다. 주요 선거 때마다 주권자에게 '살려 달라'는 표현을 반복하고 있기 때문이다. 국민에게 힘이 되는 정치가 아니라 지역 주민에게 폐를 끼치는 정치를 하고 있다.

대구의 지역내총생산(GRDP)은 전국 꼴찌를 면하지 못하고 있고, 시민들은 먹는 물에 대한 우려를 씻어내지 못하고 있다. 그런데도 한국당은 여전히 표를 달라고 한다.

지역 정치권에선 "철저한 상벌 시스템이 필요하다"며 "한국당도 잘 못하면 밀려날 수 있고 다른 정당도 잘 하면 지역 정치를 주도할 수 있다는 선례부터를 만들어야 한다"고 강조한다. 다만 이를 위해선 각 정당들의 역량 강화가 필수다. 세대 교체와 정책 역량 강화는 한국당만의 숙제는 아니기 때문이다.

최신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