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 산책] 다시, 떠남

입력 2018-07-16 10:29:46 수정 2018-08-13 19:14:15

박시윤 수필가

박시윤 수필가
박시윤 수필가

방문이 저절로 열리고 닫힌다. 노트를 넘기는 바람, 일상을 기록한 습작 노트 위로 육지의 시간은 고단했다. 설익은 문장들이 씨앗처럼 화르르 일어나 바람을 따라갈 채비를 한다. 비밀을 들킨 듯 쿵쾅이는 심장, 분명 나는 요동하고 있다. 끝을 가늠할 수 없는 바람, 내 안에 웅크린 백색의 자아가 범람한다. 혼돈에 빠진 영혼을 핑계로 나 다시 이대로 떠나도 괜찮을까.

몸 붙이고도 마음을 정착하지 못했던 시간이 있었다. 간신히 마음을 다독이고, 간신히 목숨을 지켜왔으나 바람이 내 안에 들면 천명처럼 육신이 아팠다. 육신이 아파지면 영혼에 구멍이 뚫리고 더욱 또렷하게 바람이 들고 났다. 그럴 때면 슬픈 천명을 안고 미지의 세상을 동경하곤 했다.

몇 해 전, 바람을 따라 동쪽 바다를 건넌 적이 있다. 나를 쥐어흔들던 바람은 맑았으며 싱싱하였으며 한결같았다. 바람이 일어나는 곳에서는, 내 영혼이 자유할 것이고 그리하여 내 꿈이 몇 곱절의 자신감으로 부풀어 오를 것만 같았다. 육지 밖으로 벗어나는 일은 대단히 조심스러운 일이었으나 확고한 의지가 나를 이끌었다. 그리하여 나는 연고도 없는 섬에 다다랐다. 분명 사람이 살고 있으나 사람의 소리가 아닌 바람의 소리가 났고, 메아리를 가진 소쩍새 울음소리와 울울창창한 나무들의 소리가 났다. 퍼드덕대며 날아가는 새의 날갯짓에서도 바람이 일었다. 바람, 참 맑은 것이었다. 섬에 사는 동안 한 번도 내 바람에 의심을 품은 적이 없었다.

내 기억이 싱싱하게 머무는 곳, 사계절을 돌고 돌아 두 해를 살고도 여전히 속살이 그리운 곳, 나는 겉도는 육지의 시간을 안고 다시 섬으로 간다. 육지의 밖, 혹은 바다, 그리하여 섬, 울릉도는 내게 그런 곳이다. 작동하지 못하는 내 영혼을 불러다 정착을 이루게 하는 곳. 바람은 대체로 맑았으며 혼돈하는 내 영혼을 또렷하게 깨우는 곳. '어제는 개망초꽃을 피웠어. 오늘은 해국과 달맞이꽃을 피웠어. 그리고 내일은 네가 지나는 길목길목에 접시꽃을 피울 거야.' 바람이 속삭인다.

근 몇 달, 육지의 시간을 살면서 괜찮다, 괜찮다 스스로를 다독이면서도 나는 다시 혼돈의 시간을 걷고 있다. '나 다시 떠나는 거야. 그 섬 한 번 더 훔쳐보는 일 그리 나쁜 일은 아닐 거야.' 나는 본능을 일으켜 바람이 일어서는 섬 울릉도로 간다. 울릉도 깊은 골짜기엔 새벽이면 싱싱하게 환생하는 바람의 골이 있다. 먼 곳, 아득한 곳, 그래서 더 궁금한 땅.
전설 같은 섬에서 나 무한히 싱싱해져서 바람과 함께 다시 돌아올게요.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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