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제4회 시니어 문학상 대상-논픽션]뒤로의 여행②

입력 2018-07-10 05:00:00

초등학교 졸업 후 중학교에 진학을 못하고...

첫 번째 산 고개를 넘는데 사방이 온통 까맣게 물들고 있었다. 밤마다 돌을 던진다는 늑대들이 이쪽저쪽 숲속에서 나와 앞을 가로막을 것 같았다. 고무신은 어디로 갔는지 맨발에 돌부리가 밟힐 때마다 휘청거렸다. 두 번째 산 고개에 도착하자 까맣게 덧칠을 한 나무들은 기기묘묘한 형상으로 나를 위협하고 있었다. 길 양쪽에 빽빽이 늘어선 소나무들은 열병식을 치르는 군인들로 변해있었다. 거총을 한 군인들 사이를 빨리 벗어나고 싶었지만, 다리가 움직여 주지 않았다. 울음소리도 목 안에서 맴돌았다. 몽당 빗자루 귀신이 나온다는 뫼 등을 지나다 오금이 저려 결국, 주저 않고 말았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꿈을 꾸는 것처럼 호롱불이 다가왔다. 엄마였다. 빤짝이는 별이 보였다.

일러스트 전숙경
일러스트 전숙경

뒤이은 영상은 고난에 맞선 엄마와 나의 전학증에 관한 이야기였다. 오학년 여름방학 때였다. 자식들 잘 먹이고 공부시켜 보겠다는 일념으로 비탈밭을 팔아 부산 달동네 판잣집 방 한 칸을 얻어, 출발을 며칠 앞둔 날이었다. 뒷산에서 뻐꾸기 울음소리가 한낮을 알리자 엄마는 밭고랑 끝에서 흙을 툭툭 털며 오라는 손짓을 했다. 나는 막냇동생을 업고 커다란 소나무가 있는 오대조 할아버지 뫼 등으로 따라갔다. 엄마는 머리에 두른 누런 무명 수건으로 이마의 땀을 닦고, 바가지에 싸 온 보리밥을 따로 덜어주며 말했다.

"큰아버지 큰어머니 말 잘 듣고 공부 열심히 해라." 보리밥 한 숟가락을 입에 넣으며 난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학교 졸업 때까지 큰아버지 집에서 지내기로 했지만 동작이 느리고 눈치가 없어 가끔 큰아버지로부터 꾸중을 들어야 했다. 그때마다 엄마가 보고 싶었다. 빨리 부산으로 가고 싶었다. 우는 날이 많았다. 기회 있을 때마다 기별했다. 데려가 달라고,……

드디어 육학년 1학기를 마치고 전학을 가게 되었다. 부산으로 떠나던 날 큰어머니는 책 몇 권을 싼 검정 보자기 매듭 끝에 박 바가지 세 개를 달아 주시며 일렀다. 도회지에선 물바가지가 귀하니 바가지가 깨어지지 않도록 꼭 옆에 붙어있으라고.

담임선생님은 반 친구들을 데리고 여객선 부두까지 나와 교가도 불러주고 잘 가라는 작별인사로 반 친구 한 사람 한 사람 손도 잡도록 해주셨다. 몇몇 친구들은 낯선 곳으로 가는 걱정스러운 내 마음과는 달리 도청 소재지인 부산으로 전학 가는 걸 부러워했다. 선생님과 반 친구들이 돌아가자 통영에서 부산 집까지 데려다주기로 한 오촌 당숙은 보따리를 잘 지키라는 말을 남기고 길 건너 술집으로 가셨다.

나는 보따리에 앉아 있는 것이 지루했다. 여객선 부두는 사람도 많고 구경거리도 많았다. 주위 구경에 한걸음 한 걸음 빠져있을 즈음 호루라기 소리가 요란했다. 승선 차례 줄을 서려는 사람들이 한곳으로 몰려 갑자기 부두는 소란스러워졌다. 오촌 당숙이 큰 소리로 나를 불렀다. 얼굴에 술기운이 완연한 당숙이 물었다. "보따리 어쨌어?," 보따리가 없었다. 누군가가 가져간 것이 분명했다. 승선표 검사는 시작되고 오촌 당숙은 주위를 살피다 혀를 껄껄 차며 나의 손을 끌고 여객선에 올랐다. 나중에야 알았다. 그 보따리 속에는 나의 전학 증명서가 들어 있었다는 걸,

통신시설이 열악한 당시엔 전학증을 잃어버리면 다시 전학증을 발급받아 와야 했다. 하지만 엄마는 엉덩이도 다 얹지 못하는 난전 계단에 올망졸망 채소를 담은 함지박을 놓고 오르내리는 발길에 애원의 눈길을 주며 종일 앉아있었지만 우린 끼니를 거르는 일이 많았다. 엄마는 쉬는 날이 없었다. 감기몸살로 몸을 가누기 힘들 때도 쉬면 자리를 빼앗긴다며 그곳을 지켰다. 가끔 엄마는 늦은 저녁 밥상 앞에서 한숨 섞인 넋두리로 나를 학교에 보내지 못하는 것을 안타까워하면서도 달리 방도가 없었다. 나는 이침이면 판자로 얼기설기 엮은 대문 안에서 산동네 아이들이 왁자지껄 등교하는 모습을 문틈으로 내다보고 있어야 했다.

삼 개월이 훌쩍 지나고 나뭇잎이 물들기 시작하자 엄마는 비가 세차게 내리는 날 난전 계단에 놓아야 할 함지박을 부뚜막에 놓아두고 아침 일찍 여객선을 타고 통영 충렬초등학교로 가셨다. 엄마는 전학증을 발급받아 우리가 잠든 늦은 밤에 돌아오셨다. 나는 부산 남부민 초등학교에서 졸업할 수 있었다.

다음 영상실 앞에서 난 한참 동안 주춤거렸다. 내 운명의 갈림길 이야기였다. 열네 살 때였다. 초등학교 졸업 후 중학교에 진학을 못 한 나는 아침 일찍 난전에 장사 가신 엄마 대신 동생들을 돌보고 있을 때였다. 머릿속에 돌덩이가 짓누르는 것 같아 힘겹게 눈을 떴다. 병원이었다. 내가 왜 여기에 누워 있는지 의아했다. 간호사가 이마를 짚으며 안타까운 표정으로 말했다. 어제 적산가옥 지붕에서 떨어진 기왓장에 머리를 맞아 아스팔트 길에 쓰러져 있는 나를 지나던 군인이 업고 병원으로 왔다는 것이었다. 천천히 기억을 더듬었다.

강한 바람이 부는 날이었다. 그날따라 막내가 낮잠을 길게 자고 있었다. 갑자기 적산가옥 일 층에 있는 만화방 가게 유리문에 붙은 만화 그림이 보고 싶었다. 그 적산가옥은 삼층으로 다가구가 거주하고 있는 낡은 건물이었다. 비가 올 것 같아 빨리 만화 그림을 구경하고 돌아올 욕심에 나는 신작로를 뛰었다. 숨을 몰아쉬며 만화방 유리문 앞에 서서 그림 두 장을 본 것까지가 기억의 끝이었다. 그런데 묘했다. 가만히 눈을 감자 꿈속 같은 기억 한 점이 가물가물 거렸다. 움직일 수도, 말할 수도, 볼 수도 없었지만 웅성거림 속에서 한마디 말이 아침 호수에서 피어오르는 물안개처럼 귀에 닿아다 멀어지길 반복했다.

"역시 군인이 최고네,"

일주일이 지났다. 머리 상처도 나아지고 어지럼증도 회복되었으나 왼쪽 다리가 움직이지 않았다. 의사 선생님은 며칠 지나면 서서히 나아질 거라며 퇴원을 허락했다. 집에 온 나는 열흘이 지나도록 앉은뱅이였다. 바깥출입이 불가능했다.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난전 계단 귀퉁이를 지켜야 하는 엄마에게 내 다리마저 무거운 짐을 지우고 있었다.

엄마는 어느 비 오는 날 나를 업고 수소문해둔 부평동에 있는 침술원을 찾아갔다. 집에서 침술원까지 약 한 시간이 걸렸다. 낡은 우산을 내가 받쳐 들었지만, 엄마와 나는 머리 부분만 빼고 비에 흠뻑 젖었다. 침술원 미닫이문을 밀 던 엄마는 멈칫 안으로 들어서지를 못했다. 꽤 넓은 다다미방엔 배에 대침을 꽂고 누워 있는 환자가 빽빽했다. 그들이 숨을 쉴 때마다 긴 침 머리가 나룻배의 노처럼 끄떡끄떡 거렸다. 두 번째 방의 미닫이문을 밀었다. 그 방에는 더 놀라운 광경에 입을 다물 수가 없었다. 손에 침을 꽂은 사람, 발에 꽂은 사람, 무릎에 꽂은 사람, 머리에 꽂은 사람, 등등이 저마다 편한 자세를 취하기 위해 들고, 뻗고, 엎드리고, 기대고, 있었다. 나는 겁이 나 도망치고 싶었다. 엄마는 완력으로 나를 잡아끌며 진료실이 있는 방으로 건너갔다. 몇 사람이 차례를 기다리고 있었다.

침술사는 나의 눈에도 혈색이 좋고 풍채가 뛰어난 할머니였다. 할머니는 내 앞 남자환자의 코에 한 뼘이 넘는 긴 침을 밀어 넣곤 침 머리를 비볐다. 남자의 코에서 검붉은 피가 줄줄 흘러내렸다. '죽은피'라는 할머니 말대로 피 색깔이 검은색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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