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 상반기, 생각지도 않았던 남북정상회담과 북미정상회담이 연이어 열리고, 북한의 비핵화협상과 이에 따른 경협 논의 진전에 대한 기대감이 부풀면서 많은 이들의 마음은 앞서 북녘땅으로 달려간다. 혹자는 북한 대도시 곳곳을 관광할 꿈을 꾸고, 혹자는 "비무장지대(DMZ)는 엄청난 생태계의 보고로 앞으로 한국민이 100년을 먹고 살 세계적인 관광지로 인기를 얻을 것"이라고 예측한다. 맞는 말이다. 어느 누구도 쉽게 발 들여놓기 힘들었던 북한 땅과, 분단의 상처를 그대로 자연의 넓은 품으로 감싸안아온 DMZ는 어쩌면 우리가 예측했던 것보다 훨씬 빠른 시간 내에 전세계적인 SNS핫플로 자리잡을지 모르겠다.
아직은 넘어야 할 산이 많아 상상만으로 그려보는 그 땅. 하지만 이미 DMZ의 속살을 살며시 밟아보고, 금강산에서 내려온 시린 물에 발 한번 담가볼 수 있는 여행지가 있다. 바로 반세기 동안 잠자고 있다 2003년부터 일반인들에게 개방된 두타연이다.
이곳은 직접 운전을 해서 오가기는 엄청 먼 길이다보니 여행사에서 제공하는 프로그램을 이용하는 편이 수월하다. 가족 혹은 연인과 함께하던 여행과 달리 다양한 사람들을 길동무로 만나 인사도 나누고, 하루 빨리 남한과 북한이 자유롭게 오고 갈 그 날을 꿈꾸며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다보면 어느새 강원도 땅을 밟고 있을 것이다.
◆소박한 아름다움, 박수근 미술관

비오는 새벽, 관광버스에 올랐다. 그리고 한참을 달려 창 밖으로 보이는 풍경 속 유독 군부대와 군인들의 모습이 많이 눈에 띈다 싶을 즈음 양구 땅에 닿아있었다.
맨 처음 찾은 곳은 박수근 미술관이다. 양구는 그의 고향이다. 화가 박수근은 고(故) 박완서 작가가 1970년 발표한 소설 '나목(裸木)'의 주인공으로 등장하기도 한다. 박완서의 처녀작이기도 한 이 작품은 두 사람이 지금의 신세계백화점 건물이 미군 PX로 쓰여지던 시절, 박수근이 초상화를 그리는 화가로 박완서는 영어 통역사로 일하던 가난했던 시절의 사연과 전쟁의 상흔 등을 담아낸 소설이다. 박수근 화백의 작품 '나무와 두 여인'의 바탕이 된 작품으로 이곳에서 감상해 볼 수 있다.
교과서에서도 익히 본 적 있는 박수근 화백의 작품. 박수근 미술관은 건물마저도 그의 작품과 닮아 있었다. 돌과 콘크리트, 유리와 금속이 유기적으로 결합된 건물 속 유독 화강암으로 이뤄진 외벽이 눈에 들어온다. 호를 미석(美石)이라고 할 만큼 유난히 돌을 사랑했고, 화강암의 오돌도돌 꺼끌꺼끌한 질감을 반영한 그의 독특한 화법을 닮은 듯 했다. 미술관 풍경마저도 정겹다.
박 화백은 어릴 적 프랑스 농민화가 밀레의 '만종'을 보고 화가가 될 꿈을 꾸었다고 한다. 하지만 평생을 가난에 쫓기며 살았던 그는 제대로 된 미술공부를 하지 못한 채 독학으로 자신만의 미술세계를 구축했다. 한국적인 정서를 가득 담은 단순하고 소박한 주제에, 선과 윤곽으로 대상을 표현하고, 이를 회갈색과 황갈색 등 토속적 색채로 마치 돌의 거칠거칠한 느낌을 살려 그린 그림이 특징이다.
박수근 미술관에서는 그의 유화 작품 10점을 비롯해 다양한 드로잉 작품을 감상할 수 있으며, 그 외에도 천경자, 김환기 등 시대를 풍미했던 한국 유명 작가들의 작품도 함께 만나볼 수 있다. "예술은 고양이 눈빛처럼 쉽사리 변하는 것이 아니라 뿌리깊게 한 세계를 깊이 파고드는 것이다"는 박수근 화백의 글이 가슴에 묵직하게 얹힌다.
◆금강산 맑은 물 흐르는 두타연

양구면 방산면 고방산리 민간인 출입통제선 안에 위치한 두타연. 이곳은 때묻지 않은 자연 그대로의 원시림과 금강산에서 흘러내린 맑은 물을 만날 수 있는 곳이다. 민통선 안에 위치해 있는 만큼 출입신청서와 서약서를 작성하고, 위치추적기 목걸이를 착용해야만 들어갈 수 있다. 아무리 남북관계가 화해무드를 타고 있다지만 여전히 전세계 유일한 분단국가라는 사실을 피부로 체감하는 순간이다. 사전 신청하면 편리하지만, 당일 출입신청도 가능하다.
버스에서 내려서자 열목어를 형상화한 간판이 먼저 눈에 들어온다. 이곳은 맑고 오염되지 않은 찬물에서 산다는 열목어의 최대 서식지로 알려져 있다. 두타연이라는 지명은 1천 년 전 두타사라는 절이 있었다는데서 유래했다고 하지만, 지금은 너른 절터만 남아있을 뿐이다. 현재 절터는 조각공원으로 사용되고 있다.

사실 두타연 일대는 한국전쟁 당시 치열한 전쟁이 벌어졌던 곳이다. 백석산 전투를 비롯해 단장의 능선 전투, 피의 능선 전투 등 이름만 들어도 알 법한 격전지가 이 인근을 배경으로 한다. 그래서 이곳은 빼어난 경관 뿐 아니라 아픔의 역사를 함께 돌아볼 수 있는 곳이기도 하다. 수많은 이들의 피를 뿌렸을 조각공원에는 평화와 통일을 염원하는 조형물들로 채워져 있다. 3㎞에 달하는 두타연 생태탐방로 역시 전쟁의 상흔이 가득해, 길 곳곳에서 '지뢰'라는 빨간 경고문을 볼 수 있다. 한국전쟁 당시 뿌려진 지뢰들이 지금껏 발견되지 않은 채 이곳에 묻혀 있기 때문에 절대 길을 벗어나선 안된다.

비로 불어난 물 때문에 발 벗고 징검다리를 건너느라 금강산이 발원지라는 시원한 물에 발도 한번 담가보고, 한참을 걸어 두타연에 닿았다. 연신 맑은 물이 쏟아지는 시원한 풍경의 두타연은 그야말로 한 폭의 산수화다. 10m높이에서 떨어지는 폭포 아래에는 상당히 널찍한 소가 형성돼 있는데, 이곳은 수심이 최대 12m라고 한다. 동쪽 암벽에는 3평 정도의 굴이 있다. 이곳에서 꼭 봐야 할 명물은 바로 한반도 모양으로 보이는 폭포다. 계곡물이 급류를 타며 1ㆍ2단 폭포로 떨어지는데 그 모습이 영락없이 한반도 지형을 담았다.
◆들꽃의 향연 만나는 곰의 배

다음날 찾은 곳은 강원도 인제 점봉산 곰배령이다. 누가 지었는지 모르지만 작명 솜씨한번 탁월하다. 곰이 하늘 향해 배를 내놓고 있는 모습을 닮았다고 해서 곰배령이라 이름 붙었다고 한다. 이 곳은 여름이면 온갖 들꽃들이 만발해 '천상의 화원'이라는 애칭이 붙었다. 장마철이 끝나고 현란한 꽃의 향연이 시작되는 7월말부터가 이곳의 절정이다. 드넓은 초원에 이름모를 들꽃이 모진 비바람에도 굴하지 않고 예쁜 꽃잎을 피워내는 자연의 신비를 감상할 수 있다.
점봉산은 전체가 유네스코에서 지정한 생물권보존지역이기 때문이 강선계곡에서 곰배령에 이르는 5㎞ 구간 탐방로를 제외하고는 입산이 엄격하게 금지된다. 하루 탐방인원도 최대 450명으로 제한돼 있어 이곳을 여행할 때는 미리 꼼꼼히 계획을 세워야 한다. 출입표를 받아야 입산할 수 있는데 입산 시간은 오전 9시부터 11시까지이며, 늦어도 2시에는 하산을 시작해 출입표를 반납해야 한다.

곰배령까지 오르는 길은 완만한 트레킹로라 등산에 익숙하지 않은 이들도 어렵지 않게 도전해 볼 수 있다. 다만 곰배령 도착 직전 200m남짓은 상당히 가파른 오르막길이다. 한 시간 반 가량 산길을 오르는 동안 잠시도 지루할 틈이 없다. 아름다운 야생화가 여기저기 얼굴을 내밀고 있는데고, 이끼로 가득찬 계곡의 돌과 나무를 구경하는 재미도 쏠쏠하다. 더구나 곰배령까지 오르는 동안 끊임없이 계곡의 물이 졸졸 따라붙으며 친구가 되어 준다. 한여름의 울창한 숲이 짙은 그늘을 만들어주기 때문에 준비해 간 모자를 쓸 필요조차 없었다.
힘든 산행 끝에 드디어 만난 곰배령은 그저 아련한 꿈속같다. 어디가 그 끝인지 가늠할 수 없을 정도로 짙은 운해 사이로 얼핏얼핏 탐방 데크가 모습을 드러냈고, 그 옆으로 핑크색의 둥근이질풀, 옅은 분홍빛의 터리풀과 촛대승마, 흰색의 풀솜대와 노란색의 물레나물 등 갖가지 색상의 꽃들을 만나볼 수 있었다. 곰배령이라 쓰여진 표지석 앞에서 인증샷도 찍고 이름 모를 꽃들과 하나하나 인사를 나누는 사이, 거센 바람과 햇살이 잠시 운해를 몰아내고 드넓은 평원이 그 모습을 드러냈다. 과연 곰의 배 형상인지는 모르겠지만, 해발 1164m 높은 산 가운데 하늘이 내려준 들꽃 천국임에는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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