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 정신 대구경북의 '얼'] <2> 일제의 자제단에 맞서 투쟁 이어간 혜성단

입력 2018-07-08 19:00:00

지역 학생들이 결성한 비밀결사…철시투쟁 이끌고 독립운동 벌였지만 주동자 일제에 모두 체포돼

대구의 끈질긴 3·1운동 뒤에는 일제가 독립운동을 억누르려 만든 ‘자제단’에 맞선 ‘혜성단’의 활약이 있었다.

3·1운동의 뜨거운 불길이 전국으로 확산되자 조선총독부는 이를 막고자 ‘자제단(自制團)’을 조직했다.

자제단은 3·1운동 참가자를 검거하거나 주동자를 설득해 독립운동 동력을 약화시키려 했다. 1919년 4월 6일 대구에서도 전ㆍ현직 관리들이 주축이 된 대구 자제단이 조직됐다. 단원들은 3·1운동에 동조하는 이들을 본부에 보고하거나 경찰에 신고하며 조직적인 방해 공작을 했다.

이에 대응해 1919년 4월 김수길, 이명건 등 대구 계성학교 학생과 졸업생 9명이 비밀결사 조직인 ‘혜성단(慧星團)’을 결성했다.

이들은 4월 6일과 13일 대구경찰서장과 대구자제회 의장 박중양에게 “독립만세 운동을 펼친 동포를 검거한 죄를 묻겠다” 또는“자제회를 설립하고 다수를 강제로 입회시킨 것을 용서할 수 없다”는 내용의 암살 경고장을 보내기도 했다.

혜성단원들은 상인들을 설득해 철시투쟁을 이끌어냈다. 이들은 3월 31일과 4월 1일 야음을 틈타 ‘독립을 위해 생명을 던지거나 옥중에서 신음하는 이들이 있다. 서양의 신문기자들이 대구 시내를 방문할 것이니 독립의지를 알리기 위해 폐점하라’며 철시투쟁을 종용하는 유인물 700매를 조선 상인들에게 배포했다.

이에 조선인 상인들은 4월 1일과 2일 서문시장에서만 80여곳이 일제히 문을 닫는 등 독립운동에 호응했다. 이밖에도 혜성단은 독립운동을 위한 각종 문서를 제작, 배포했으며 독립운동이 활발한 만주에 조직원을 파견해 항일투쟁을 이어가려했다.

그러나 일본 군경의 비밀감시망에 적발돼 5월 중순까지 주동자들이 모두 검거됐다. 김수길은 징역 4년, 이종식ㆍ이영옥ㆍ이명건은 징역 3년, 이영식은 징역 1년, 권성우는 징역 6월을 선고받으며 옥에 갇혔다.

계성 100년사를 집필한 권영대 전 계성학교 교사는 "혜성단은 지역 학생들이 주축이 된 항일투쟁 비밀결사로 학생들이 일제의 위협에 위축되지 않고 오히려 독립운동의 선봉 역할을 한 것 "이라며 "지방에 근거를 두면서도 중앙 및 국외 독립운동단체와 연계하고자 한 점도 주목할 만하다"고 평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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