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비의 공간 '書院' <8>-병산서원, 서애가 후학 길러낸 도량

입력 2018-07-17 14:49:34 수정 2018-07-17 19:36:57

병산서원은 서애 류성룡이 후학을 길러내는 도량으로 삼았다. 병산서원 만대루에서 바라본 병풍절벽과 낙동강이 한폭의 그림이다. 안동시 제공
병산서원은 서애 류성룡이 후학을 길러내는 도량으로 삼았다. 병산서원 만대루에서 바라본 병풍절벽과 낙동강이 한폭의 그림이다. 안동시 제공

지난 2007년 11월 안동 풍산읍 수동리 마을 뒷산에 모셔진 서애 류성룡 선생의 묘소에는 전국에서 수백 명의 유림들이 구름처럼 몰려들어 묘제를 올렸다. 서애 선생 서세 400주년을 맞은 날이었다. 400년. 이제 잊힐 만큼 세월이 흘렀건만, 그의 마음과 혼이 살아있는 듯 도포를 입고 유건을 쓴 유림들의 제 올리는 모습이 아름답다 못해 감동이었다. 묘소에는 그 흔한 신도비 하나 없다. 6대 후손 운(澐)이 지은 간단한 묘비만 서 있다. 제각 하나 없는 초라한 묘소에서 일생을 청빈하게 살아온 서애의 뜻이 고스란히 살아 전한다. 서애 서세 400주년 기념행사가 전국 각지에서 열렸던 것도 청빈과 검소한 삶을 보였던 유덕에 감동한 후인들의 자연스러운 흠모였다. 병산서원은 서애의 청빈과 함께 '충'을 고스란히 품고 있다.

◆병산서원, 서애가 후학을 길러내던 도량

국보 제132호로 지정된
국보 제132호로 지정된 '징비록'은 서애가 임진왜란을 겪으면서 전쟁의 원인과 전황 등을 기록해 후대에 전쟁을 경계하도록 한 책이다. 매일신문 D/B

병산서원은 서애가 후학을 길러내는 도량으로 삼았다. 차경(借景)! 경치를 빌려 자연과 함께 어우러져 살았던 선조들의 지혜가 담겨 있는 말이다. 병산서원의 만대루에서 바라본 병풍절벽과 낙동강은 한 폭의 그림이다. 이곳은 지금에 와서도 한 번쯤 다녀가지 않으면 건축학도라 할 수 없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빼어난 건축미를 자랑하고 있다.

지금도 병산서원에서는 수시로 학회가 열리고 학술토론이 벌어지는 경학장이 된다. 서애의 학문과 사상, 우국충정의 뜨거운 혼이 식지 않고 있기 때문에 끊임없이 학자들이 몰려들고 있다.

임진왜란을 치른 탁월한 공신 서애가 받은 서훈은 거창하다. '조선국'(朝鮮國)을 시작해 '수충'(輸忠), '익모'(翼謀), '광국'(光國), '충근'(忠勤), '효절'(效節), '호성공신'(扈聖功臣) 등의 칭호에 풍원부원군의 봉호를 받고 '문충'(文忠)이라는 시호가 내려졌다. 글자마다 나라와 백성을 위한 그의 충과 효가 담겨 있다.

서애는 임진왜란 1년을 앞둔 시점에서 혁신적 인사를 천거했다. 형조정랑 권율을 의주목사로, 정읍현감 이순신을 전라좌도수사로 삼았다고 서애연보에 나타난다. 현감을 수사에 오르게 한 것은 지금의 6급을 3급에 발탁한 것이나 다름없다. 서애의 탁월한 안목이 나라를 구한 결과가 됐다.

하지만 서애는 큰 공훈에도 당파싸움에 밀려 노년기를 불우하게 은거했다. 그는 나룻배를 타고 강을 건너 언덕을 오르지 않으면 올 수 없는 옥연정사에 은거하며 징비록을 썼다. 혹독한 전쟁과, 이후 가난과 병마로 비참했던 서민들의 살림살이, 그 대책과 비방을 조목조목 적어 후세에 경계토록 했다.

서애가 "이제야 후회한들 무슨 소용이 있으리로만 다만 뒷날에 경계로 삼아야 하겠기에 자세하게 적어둔다"고 한 징비록 저작 목적이 새롭게 와 닿는다. 나라가 어려우면 생각나는 재상 서애, 형제와 우애 있게 지내고 홀로 되신 어머니를 걱정해 안동 인근 벼슬길을 자처했던 류성룡, 하회마을 곳곳에서 그의 뜻이 오롯이 전해지고 있다.

◆겸암·서애 두 형제의 평생 삶은 '충'과 '효'

안동의 명문가인 풍산 류씨 가문은 '충효'(忠孝)를 가훈으로 삼아 실천해온 것으로 유명하다.

풍산 류씨 가문은 고려 말~조선 초에 풍산 류씨 류종혜가 안동 하회마을에 들어와 3년 적선(積善)으로 자리 잡은 이후 그의 5대손 입암 류중영(1515~1573년)이 중심이 돼 류운룡(1539~1601년)과 류성룡(1542~1607년)을 비롯해 많은 학자와 훌륭한 인물들을 배출한 명문가다.

특히 겸암 류운룡과 서애 류성룡 형제가 퇴계 이황(1501~1570년)의 문하에서 수학하면서 대대로 가학(家學)을 형성했으며, 류성룡이 영의정이 되고 공신이 됨에 따라 풍산 류씨는 안동의 대표적인 명문가가 됐다.

두 형제는 항상 부모님을 모시기 위해 번갈아가며 안동 근처 고을에서 벼슬살이를 했다. 임진왜란 때 서애가 영의정으로서 왕을 모시는 처지가 되자 형인 겸암은 벼슬을 그만둔 후 어머니를 모시고 가족들과 피fks하는 등 두 형제는 평생 '충'(忠)과 '효'(孝)에 힘썼다.

서애는 임종하기 전에 자손들에게 "충효 이외에 힘쓸 일은 없다"라는 유훈을 남겼는데, 그의 증손자 류의하(1616~1698)는 유훈을 받들어 당호를 '충효당'(忠孝堂)이라 이름 지었으며 이곳에서 자제들을 교육했다.

또 두 형제는 퇴계학(退溪學)을 발전시켰고, 후손들도 이를 이어받아 '서애학파'(西厓學派)라는 새로운 가학(家學)을 형성하기도 했다.

서애의 8대손 류이좌는 "'화'(和)로써 어버이를 섬기면 '효'(孝)요, '경'(敬)으로써 임금을 섬기면 '충'(忠)이다"라는 의미의 '화경당'(和敬堂) 당호로 그 유훈을 실천하고자 했으며, 남촌댁에서는 사당 담벼락에 '충효'(忠孝) 글자를 새겨 항상 이를 생각하면서 실천하려 했다.

서애는 1592년 발발한 임진왜란 때 영의정과 도체찰사(군 사령관) 등을 지내며 조정의 중추 역할을 했다. 전후 어린 시절을 보낸 안동 하회마을로 돌아가 더 이상 벼슬길에 나가지 않고 옥연정사에서 집필에 주력했다.

국보 제132호로 지정돼 전해오는 '징비록'(懲毖錄)도 이때 완성했다. 징비록은 '지난 일을 경계하여 후환을 삼가다'라는 의미로 임진왜란의 원인 및 전황 등을 기록한 책이다.

지난 2015년 5월 가정의 달을 맞아 국립민속박물관은 '풍산 류씨 집안의 가족 이야기-충효 이외 힘쓸 일은 없다'라는 주제로 류성룡의 가문 특별전을 마련하기도 했다.

천진기 국립민속박물관장은 "'효경'의 '효자 집안에서 충신이 난다'는 말처럼 안으로는 효를 바탕으로 집안을 다스리고 밖으로는 진정한 충을 실천했던 류성룡의 이야기를 통해 가족과 사회에 대한 의미를 되새겨 봤으면 한다"고 특별전 의미를 밝히기도 했다.

◆형제들의 정과 사랑 서린 '부용대 층길'

하회마을 맞은편 부용대 절벽에는 겸암 류운룡과 서애 류성룡 형제의 우애가 전해지는
하회마을 맞은편 부용대 절벽에는 겸암 류운룡과 서애 류성룡 형제의 우애가 전해지는 '층길'이 나있다. 이 두 형제는 평생의 삶을 '충'과 '효'를 실천하면서 살았다. 매일신문 D/B

하회마을 만송정 앞 낙동강을 둘러치고 있는 부용대 절벽, 절벽 우측에 옥연정사(중요민속자료 제88호)가 있다. 정사 마당에는 수백 년 된 노송이 버티고 섰다. 서애가 제자들과 함께 심었다고 전한다. 서애 소나무는 옥연정사와 부용대 절벽 곳곳에서 울울창창 솔숲을 만들어 놓고 있다.

서애와 그의 형 겸암의 우애는 부용대 절벽에 좁다랗게 난 '층길'(친길)에서 고스란히 전해온다. 서애는 1586년 옥연정사를 지었고 부용대 절벽 반대편 입암 위 '겸암정사'(중요민속자료 제89호)에서 후학들과 연구하던 형을 만나러 갔던 길이다. 이 층길은 국립중앙박물관이 소장한 180년 전 하회마을(1828년 하회마을) 그림에서 사실적으로 묘사된 것이 알려지면서 세인들의 관심을 끌고 있다.

한 사람이 겨우 발을 내디딜 정도로 좁다란 500여m의 절벽길은 서애가 아침저녁으로 형 겸암을 찾아다녔던 발자국의 여운이 고스란히 느껴진다. 발아래로는 깎아지른듯한 절벽과 바위, 낙동강 물결이 정신을 아찔하게 한다. 머리 위로는 까마득한 층층 바위가 덮치듯 내려다본다.

층길이 끝날 즈음 눈앞에 아름드리 소나무들이 가로막는다. 이 나무들도 서애가 먼저 세상을 떠난 형님을 그리워하며 제자들과 함께 심었다고 전한다. 향나무와 상수리나무로 둘러싸인 겸암정사는 입암 절벽 위에 버티고 서서 하회마을을 내려다보고 있다. 겸암정사 입구에는 '겸암사'라는 시 한 편이 새겨져 있어 형에 대한 서애의 애틋함이 묻어난다.

'내 형님 정자 지어 겸암이라 이름 지었네. 대나무 그림자 섬돌을 쓸어내리고 매화는 뜰 가득 피어 있구나. 발끝엔 싱그러운 풀냄새 모이고 호젓한 길에는 흰 안개 피어나네. 그리움 눈물 되어 소리 없이 내리고 강물도 소리 내며 밤새 흐르네'

병산서원을 출발해 하회마을까지 화산을 비스듬하게 걸으며 서애의 삶과 나라사랑을 느낄 수 있는
병산서원을 출발해 하회마을까지 화산을 비스듬하게 걸으며 서애의 삶과 나라사랑을 느낄 수 있는 '유교선비문화길'이 조성돼 많은 이들이 즐겨 걷고 있다. 매일신문 D/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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