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춘추] 달팽이 걸음

입력 2018-06-26 11:24:25 수정 2018-10-16 16:26:23

서영옥 미술학 박사

지인이 나눠준 무공해 배춧잎에서 달팽이 한 마리가 꿈틀거렸다. 그 잎을 들어 아파트 화단에 내려놓았는데, 날씨가 연일 건조하다. 습기 찬 곳에 당도하려면 한 달을 달려도 모자랄 달팽이의 느린 걸음이 내심 걱정된다. 비라도 내리면 좋으련만, 날씨도 사람의 일처럼 쉽게 변화되진 않는 것 같다.

서영옥 미술학 박사
서영옥 미술학 박사

지나간 시간들은 모두 짧다. 내가 예닐곱 살 때였던 것 같다. 언니 오빠가 학교에 가고나면 어머니는 내게 한글을 가르쳐주었다. 온종일 언니 오빠를 기다리다 치칠 때쯤이다. 아이는 칭찬을 먹고 자란다는 것을 어머니는 알고 계셨던 것 같다. 숫기 없고, 말도 느린 아이가 잘 할 수 있다는 용기를 낼 수 있었던 것은 어머니의 칭찬에 힘입어서 익힌 한글 덕분이지 싶다. 유치원도 없던 시골에서 드물게 한글을 깨치고 입학한 초등학교 1학년의 기세등등함이란, 돌아보면 봄꿈 같은 추억이다.

손 닿는 곳이면 그리기를 일삼던 내게 어머니는 일찌감치 화구들을 챙겨줬다. 책갈피나 노트에 여백을 남지 않을 만큼 곰바지런히 그렸던 그리기는 초·중·고 그리고 대학을 거치는 동안에도 꾸준했다. 학창시절 내내 함께 한 미술이 삶의 1순위가 된 연유에는 어머니의 격려를 빼놓을 수 없다. 어른이 된 지금도 어머니는 내 글과 그림이라면 무조건 칭찬일색이다. 그랬던 어머니가 어느새 팔순이다. 느린 걸음의 주인공이 된 노모의 뒷모습이 달팽이를 닮았다.

어머니는 얼마 전 큰 오빠 내외와 일본을 다녀온 후 다시는 여행을 가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느린 노모에게 속도를 맞추느라 자식들 고생이 너무 컸다는 것이 이유이다. 며칠 전 작은 오빠네 가족과 함께 나선 여행은 당신의 호언장담이 빈말이었음을 증명한 셈이다. 말과 행동이 달랐던 것은 곰살궂은 자식들과 함께 걷고 싶은 어머니들의 공통된 소망이지 않을까. 팔순 노모의 느린 걸음이 잠시 잊고 지낸 달팽이 같은 여유로운 삶의 가치를 일깨운다.

매일춘추의 문을 노크할 무렵 강의와 글, 그림을 그리는 필자의 대표 직함을 관계자가 물었다. '주어진 삶을 달팽이처럼 천천히 가고 있는 미술학도'라고 답한 것이 공식명함이 되고 말았다. 대표명함이 된 '미술학 박사'라는 꼬리표가 내심 부끄럽다. 그러나 어머니처럼 부족한 논리마저 흉허물로 여기지 않던 지인들과 독자들, 매일신문사에 고마운 마음이다. 덕분에 가슴에 좋은 추억 하나 새긴다. 다음 필진들의 귀한 사연을 고대하며 달팽이처럼 느린 일상으로 돌아간다.

최신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