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바라기 노리코(茨木のり子)라는 일본 시인이 있다. 그녀가 열다섯 살 되던 해 태평양 전쟁이 시작되었고 열아홉 살 때 일본은 그 전쟁에서 패했다. 전쟁과 함께 십대를 보냈고, 패전의 암울함 속에서 이십 대를 맞았다. 그녀 인생의 가장 예쁜 시절이 그렇게 전쟁과 더불어 지나가버렸다. 그래서 이바라기 노리코는 시 '내가 가장 예뻤을 때'(1953)에서 "내가 가장 예뻤을 때/ 주위의 사람들이 많이 죽었다/공장에서 바다에서 이름도 없는 섬에서/ 나는 멋 부릴 기회를 잃어버렸다/ 내가 가장 예뻤을 때/아무도 내게 다정한 선물을 주지 않았다/ 남자들은 거수경례밖에 몰랐고/순수한 눈짓만을 남기고 다들 떠나버렸다"고 적고 있다.
전쟁 때문에 멋 부릴 기회와 달콤한 연애의 낭만을 잃어버린 것이 비단 일본제국의 소녀들뿐이었을까. 일본 제국의 식민지였던 조선의 소녀, 소년들이 경험한 전쟁은 더욱 가혹했다. 주요한의 시 '십이월 칠일의 꿈'(1942)에서 화자는 '어젯밤에 나는 전투기 부리가 되었'고 또 '어젯밤 꿈에 나는 전차(戰車)'가 되어서 솔로몬 제도와 미국 보스턴, 뉴욕, 워싱턴을 쓸어버렸다고 적고 있다. 시의 제목인 12월 7일은 일본이 미국 하와이, 즉 진주만을 공습하여 태평양 전쟁이 시작된 날이다.
시의 화자는 "내 팔심과 내 기운이 다하도록 나의 싸움을 싸우고져한다"고 다짐하고 있다. 그러나 전쟁의 포화가 연일 들려오는 와중에 전투기가 되고 전차가 되어 전쟁터로 날아가는 꿈을 즐겁게 꿀 수 있는 소년들이 세상 어디 있을까. 그 전쟁은 조선인 소년이 목숨을 걸 필요가 없는 일본 제국의 전쟁이지 않은가. 투지에 불타는 화자의 말과 달리 참전을 앞둔 소년의 주체할 수 없는 두려움이 그 꿈에서 강하게 느껴지는 것은 그 때문이다.
이처럼 전쟁으로 인해 일본제국의 소녀들도 식민지 조선의 소년들도 인생의 가장 아름다운 때를 잃어버렸다. 특히나 조선 소년들은 채 스물도 되지 않은 나이, 그들 의지와 상관없이 일본제국을 위해 전쟁에 나가야 했다. 그들 역시 멋을 부리고, 연인에게 다정한 선물을 주며 멋진 이십대를 보내고 싶었지만 남양군도 어딘가에서 일본제국을 위해 싸우다가 죽음을 맞았다. 해방이 되어도 우리 젊은이들은 '인생의 가장 예뻤던 때'를 만끽할 수 없었다. 한국전쟁과 정치적 격변기를 겪으며 인생의 절정기가 역시나 어둡게 지나가 버렸다. 이제 새로운 시대가 열리고 있다. 종전 선언이 되면 남북한 젊은이들은 길고 암울했던 역사의 흐름을 끊고 비로소 그들 인생의 가장 예쁜 때를 향유하게 될 것이다.
정혜영 경북북부연구원 연구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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