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계 이황(退溪 李滉·1501~1570년)은 1546년 마흔여섯 되던 해에 관직에서 물러나 낙향, 예안 건지산 남쪽 기슭에 '양진암'(養眞庵)을 지었고, 1550년에는 상계의 퇴계 서쪽에 3칸 규모의 집을 짓고 집 이름을 '한서암'(寒棲庵)이라 했다.
그 후 전국 각지에서 제자들이 모여들자 1551년 한서암 동북쪽 계천(溪川) 위에 '계상서당'(溪上書堂)을 짓고 제자들을 본격적으로 가르치기 시작했다.
도산서당은 계상서당이 좁고 또 제자들의 간청이 있어 집 뒷산 너머 도산 자락에 지었다. 퇴계는 1557년 57살의 나이에 도산 남쪽의 땅을 구하고, 1558년 터를 닦고 집을 짓기 시작해 1560년에 도산서당을 낙성했다. 이어 이듬해에 학생들의 숙소인 '농운정사'(隴雲精舍)를 완성했다.
퇴계는 계상서당에서 죽음을 맞을 때까지 계상서당과 도산서당을 오가며 제자들에게 자신의 사상과 실천 철학을 가르쳤다.
퇴계가 세상을 떠난지 450여 년이 흐른 지금에도 퇴계의 삶과 철학을 이어가려는 시도와 사람들이 있다. 이근필 퇴계 종손과 김병일 도산서원 원장, 그리고 도산서원선비문화수련원이 퇴계의 철학사상과 실천적 삶을 몸으로 보여주고, 이어가고 있다.

◆이근필 퇴계종손, "예-무릎꿇음, 경-겸손·검소 실천"
이근필(86) 퇴계 16대 종손은 요즘에도 사람들이 찾으면 무릎을 꿇고 앉아 공손히 맞고 대화한다. 퇴계 이황 할아버지가 남긴 유지를 정성과 성심을 다해 봉양하는 정행의 삶을 실천하고 있다.
퇴계 종손은 평생을 '예'(禮)를 다해 상대를 배려하고 존중한다는 '경'(敬)의 마음으로 인간존중·인간사랑을 실천했다. 그렇다 보니 그 예는 무릎 꿇음이 됐고, 경은 겸손이 되어 사람들의 심금을 울려 감동을 일으켰다.
퇴계 종손이 지켜오고 있는 '퇴계 종택'에는 지금도 여전히 배움의 현장이 되고 있다. 인근에 자리한 도산서원선비문화수련원을 찾는 전국의 학생, 직장인들이 종택을 찾아 종손에게서 퇴계의 모습을 보고, 듣고, 체험하고 간다.
예로부터 유가에서 '종가'와 '종손'은 그 자체로 제도였으며 법이었다. 수 백여 년 세월이 지나면서도 선조들의 가르침과 유가의 예법을 잊지 않고 이어올 수 있었던 것도 이 같은 전통에 대한 고집스러움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하지만, 종가의 맏형격인 퇴계 종가와 종손이 개혁적 움직임을 보이면서 종가들이 변하고 있다. 지난 20014년 1월 7일, 퇴계 종가의 문중의결기구인 상계문중운영위원회(이하 문중운영위)는 퇴계 불천위 제사를 위해 안동시 도산면 퇴계 종택에 모인 자리에서 참석자 65명이 만장일치로 불천위 제사를 오후 6시에 지내기로 의결했다.
이에 앞서 퇴계 종가는 2011년 '종손 말이 법'으로 통하는 종가문화를 개선하기 위해 '문중운영위원회'를 구성했다. 종손의 권한을 스스로 내려놓은 것이다.
문중운영위는 제사 간소화를 추진했지만, 불천위인 퇴계와 두 부인의 제사만큼은 자정을 고수해왔다. 운영위는 "퇴계 선생은 '그 시대의 풍속을 따르라'고 가르쳤다"며 초저녁 불천위 제사를 통과시켰다.
이밖에 퇴계 종손은 "죽으면 납골당에 가겠다"고 했으며, 17세손인 이치억(42) 차종손도 "제사가 간소화되지 않으면 종가의 미래는 없다"는 말로 종가의 개혁을 밝히기도 했다.

◆김병일 도산서원 원장, "존중·배려·경 실천한 참스승"
34년의 경제관료 공직생활을 끝내고, 안동으로 내려와 '퇴계처럼'의 삶을 따르고, 퇴계의 사상을 전파해온 지 10년이 훌쩍 넘어버린 김병일(73) 도산서원 원장.
그는 여러 언론에 쓴 글을 통해 '퇴계' 알리기에 나서오고 있다. 특히, 자신이 이사장으로 있는 도산서원선비문화수련원에 숱한 이들을 불러와 퇴계의 삶과 철학, 사상을 배워가도록 하고 있다.
그는 "퇴계 선생은 배운 대로 실천했다. 제자와 가족, 여자 종의 사정과 심정까지 헤아렸다. 자신을 끝없이 낮춤으로써 모든 이들의 존경을 받았다. 또, 그럼으로써 자기도 완성시키고 다른 사람도 완성시키고자 했다"는 말로 퇴계 처럼의 삶을 따르는 이유를 설명했다.
그는 "퇴계는 진리 앞에 겸허했다. 그는 공부는 할수록 점점 진리의 세계가 무궁무진하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남이 자신과 다른 생각을 이야기하면 매우 고마워하며 경청했다"며 "평소에 제자들에게 '자기를 버리고 남을 따르지 못하는 것은 배우는 사람의 큰 병통'이라며 타이르곤 했다"고 했다.
자신보다 26살 어린 젊은 학자 고봉 기대승(1527-1572)과 사단칠정 논변을 8년간이나 전개할 수 있었던 것도 이런 열린 마음이 있었기에 가능했던 일이다. 고봉 선생에게 보내는 편지에 '엎드려 절한다'는 내용의 인사를 했다.
김원창은 자신이 이사장으로 있는 도산서원선비문화 수련원에서 퇴계의 사상을 알리는 데 힘을 쏟고 있다. 수련원생들이 유생들이 쓰던 '유건'(儒巾·검은 베로 만든 실내용 관모)에 도포 차림으로 퇴계의 삶이 배어 있는 현장을 직접 답사하도록 한다.
또, 명상길 걷기 등을 통해 '간사한 생각을 버리고 좋은 일을 하라'는 퇴계의 심신수련법인 '활인심방'(活人心方·사람을 살리는 마음 수양법)을 익히게 한다.
김 원장은 매주 5일 정도 수련원 내 숙소에서 숙식하며 수련생들과 함께 생활한다. "나이와 신분·정치적 입장을 떠나 인간을 존중하고 지(知)·덕(德)을 강조한 퇴계 선생의 정신은 '갑을(甲乙) 관계'나 '세대 갈등'에 시달리는 우리 사회의 갈등을 치유하며 가치 있는 인생을 살도록 하는 귀중한 정신문화 유산"이라 말한다.
◆도산서원선비문화수련원, 누적 교육생 50만 명
도산서원 선비문화수련원은 개원 첫해인 2002년 교육생이 224명에 불과했다. 하지만, 수련원을 찾는 이들이 갈수록 늘어나 2010년 1만2천312명, 2015년 7만3천641명, 2016년 10만4천907명, 2017년에는 13만6천명을 기록했다. 올해는 15만 명의 수련생을 목표로 하고 있으며 이미 누적 교육생이 50만여 명에 이르고 있다.
수련원은 '선비정신은 21세기 문화의 시대, 우리의 자랑스런 국민정신이다'라는 슬로건으로 ▷나보다 남을 위하는 겸손과 배려의 박기후인의 자세 ▷자기인격을 닦고 나서 사회에 기여하는 수기치인의 삶 ▷공동체가 어려울 때 자신을 희생하는 견위수명의 실행을 실천덕목으로 삼고 있다.
이틀의 수련기간 동안 도산서원을 찾고, 퇴계 종손 특강, 퇴계묘소, 배려와 사랑으로 아껴준 시아버지를 죽어서도 곁에서 모시고자 하는 맏며느리 묘소, 애국충정과 희생정신을 본받을 수 있는 하계마을, 견위수명을 실행한 이육사의 삶, 노송정, 학봉종택 등 퇴계선생의 삶이 배어 있는 현장을 체험하면서 배운다.
특히, 이근필 종손은 남녀노소 누구에게나 무릎을 꿇고 겸손한 모습으로 수련생을 맞이, 진정한 의미의 '경'의 자세를 보여준다. 수련생들은 이처럼 겸손한 종손에게서 퇴계선생의 모습을 보게 된다.
종손은 수련생에게 직접 쓴 좋은 글씨를 나누어주고 있으며, 연간 수만 장에 이른다. 종택 문 앞을 나설 때에도 일일이 수련생들과 악수를 나누며 응원의 말씀을 전하는 것 역시 수련생 마음에 큰 감동을 전한다.
도산서원선비문화수련원에서는 현대사회에 필요한 선비정신을 생각하는 강의와 이를 실생활에서 실천으로 옮길 수 있게 선비정신 실천 다짐을 해보는 시간 등으로 퇴계의 삶을 현대인들에게 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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