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재 현장] 두 얼굴의 '워라밸'

입력 2018-06-12 11:18:09 수정 2018-06-12 18:58:13

매일신문 경제부 서광호 기자
매일신문 경제부 서광호 기자

주변 사람들이 아프다. 의식을 잃고 쓰러진 사람이 여럿이다. 어지럼증이 심해 병원에 가니 뇌출혈 진단을 받은 이도 있다. 적지 않은 직장인들이 크고 작은 병 하나쯤은 달고 있다. 속병에 약봉지를 끼고 살거나, 굳은 목과 허리를 주무르며 견딘다. 병치레의 가장 큰 원인은 과로다. 쉴 틈 없이 일해서다. 처음엔 피로가 쌓인다. 그러다 아픈 곳이 생긴다. 참을 만큼 아프다가 증상이 더 악화된다.

'일과 삶의 균형'을 뜻하는 '워라밸'(Work & Life Balance)이란 신조어가 나온 배경이다. 전조는 2012년부터 있었다. 정치권에서 나온 '저녁이 있는 삶'이라는 슬로건이 많은 공감을 얻었다. 이는 절박한 아우성과 같다. 일에 지쳐 삶을 제쳐 두어야 하는 직장인의 설움이다. 이 같은 바람에 부응해 '주 52시간 근로'라는 정책이 마련됐다. 또 삶의 질을 유지할 적정 소득을 보장하기 위해 '최저임금 인상'도 이뤄졌다.

최근 통계는 워라밸에 좀 더 가까워진 듯하다. 임금이 늘고 근로시간이 줄었다. 통계청의 사업체노동력조사를 보면 올해 3월 사업체(5인 이상)의 임금총액은 전년 동월보다 8.1% 증가했고, 근로시간은 2.9% 감소했다. 한 해 사이 임금은 362만원에서 391만원으로 늘고, 근로시간은 170시간에서 165시간으로 줄었다.

하지만 워라밸에도 그늘이 있다. 바로 정규직과 비정규직의 격차다. 고용 형태에 따라 워라밸의 양극화가 나타나고 있다. 정규직인 상용임금(월급)은 지난 한 해 동안 32만원(8.3%)이 증가한 412만원인 데 비해, 비정규직인 임시일용임금은 고작 6만원(4.1%)이 늘어난 158만원에 그쳤다. 임금 차이가 더 벌어졌다.
업종과 업체 규모별로 보면 차이는 더 심해져, 차별이라 일컫는 게 더 정확한 듯하다. 특히 고용 비중이 큰 업종에서 양극화가 두드러졌다. 제조업의 경우 지난 1년 사이 정규직은 51만원(12.4%)이 오른 463만원을 월급으로 받게 됐지만, 비정규직은 6만원(3.7%)이 인상된 180만원에 그쳤다. 30~99인 규모의 제조업에서 정규직은 17만원(4.9%)이 올랐지만 비정규직은 외려 20만원(-9.4%)이 줄었다. 건설업과 도소매업, 운수업, 숙박음식점업 등에서도 정규직과 비정규직의 임금 격차가 더 커졌다.

두 얼굴의 워라밸이다. 돈과 시간이 한층 여유로워진 쪽과 늘어난 여가에도 쓸 돈이 빠듯한 경우로 나뉜다. 특히 눈여겨봐야 할 점은 한 해 사이 근로시간은 정규직(-2.7%)보다 비정규직(-5.2%)이 더 많이 감소했다는 것이다. 일할 시간이 더 많이 줄고, 월급은 덜 받는 모양새가 됐다. 일에서 벗어난 것이 아니라 쫓겨난 것은 아닌지 생각해볼 대목이다.

워라밸이란 말은 달콤하지만 씁쓸한 뒷맛을 남긴다. 비정규직이나 저임금 업종에서 일하는 사람에게는 먼 나라 이야기다. 상대적인 박탈감마저 느끼게 한다. 정부가 근로시간을 줄이고 임금을 높이는 정책을 펴지만, 기울어진 노동환경에서 그 효과가 차별되게 나타난다.

아픈 주변 사람들은 다시 일하고 있다. 잠시 몸을 추슬렀다. 방전(放電) 직전의 휴대전화처럼 곳곳에서 경고음이 울리지만, 빠듯한 살림에 돈벌이를 중단할 수는 없다. 일과 삶이 균형을 찾는 길은 여전히 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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