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 산책] 친구의 말맛

입력 2018-06-11 11:52:56 수정 2018-06-12 15:31:46

그저께까지 들녘에는 보리가 서 있었던 것 같은데 어느새 모들이 논을 채우고 있다. 오뉴월 들녘은 마술을 보는 것 같다. 카드를 펼쳐 보이던 마술사가 손바닥을 펴들면 한순간에 카드는 사라지고 비둘기가 날아오르는 장면이랄까. 보리밭이 순식간에 무논이 되었다가 어느 순간 초록 벼들이 줄을 맞추고 섰다. 부지런한 농부가 만들어내는 마술이다.

호미곶에는 이장을 하는 친구가 있다. 마술사 같은 농부다. 마을 일을 다 하면서 논농사, 밭농사는 물론 염소 농장까지 거뜬하게 처리해 내고 있다.

봄부터 초여름까지는 무척 바쁜 시기이다. 논두렁에 세워둔 지팡이까지 용을 쓴다는 농번기인 셈이다. 농사일에는 어설프기 짝이 없는 나는 이때만큼은 그 친구의 농장으로 가지 않는다. 처음에는 일손을 도우려고 마음먹기도 했지만 오히려 일거리를 만들 것만 같았다. 그래서 들에 보리가 사라지고, 논마다 물이 들어오고 이앙기가 부지런히 모내기를 끝낼 때까지 진득이 기다리곤 했다.

그런데 다른 데 정신을 팔다 보니 벌써 빈 논이 보이지 않았다. 내일쯤 전화를 해보아야지 하고 있는데 친구가 먼저 전화를 했다. 저녁 무렵, 삼정 관풍대가 보이는 바닷가에서 만났다. 바람을 볼 수 있다는 섬, 그 관풍대를 보며 마주 앉았다.

친구가 대뜸 물었다. "밭에 뭘 좀 심었나?" 내 텃밭을 두고 하는 말이었다. "우리 부부가 먹을 만큼 딱 그만큼 심었어." "거름은 넣었어?"

"조금 넣었어." "거름 없으면 가져다줄게." "아니 있어." "거름은 적당히 넣어야 해. 크게 키우려는 욕심에 지나치게 많이 넣으면 채소가 제 맛을 잃게 돼. 적당한 것이 제일 좋아."
우리가 만나자마자 나눈 이야기이다. 그런데 지금껏 친구와 나누었던 이야기를 곰곰이 되짚어보면 늘 그 친구가 내게 뭘 주겠다는 이야기가 많았다. 내가 그 친구에 무엇을 나누겠다는 말은 별로 없었다. 그러고 보니 야채며, 고추며, 처음 이사 왔을 때는 햅쌀까지 싣고 왔다. 농부이기 때문에 그런 것일까. 늘 넉넉한 친구다. 오늘은 거름을 주겠다고 했다. 그러면서 지나치면 그 작물 고유의 맛을 잃는다고 경고하였다. 그 말을 놓칠세라 내가 한마디 붙였다. "거름이 지나치면 야채 맛을 잃는다고? 사람도 지나치게 부요하면 사람 맛을 잃는 게 아닐까?" 그 친구가 말을 받았다. "내 말이 그 말 아이가."

강사리 농부인 친구의 말맛이 달다. 말의 빛깔을 순식간에 바꾸어 버리는 마술사다. 슬쩍슬쩍 다가오는 밤바다가 맞장구를 쳤다.

김일광 동화작가

김일광 작가
김일광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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