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석제 소설가
지난 세기부터 지금까지 꾸준히 큰 인기를 끌고 있는 '무협'이라는 대중예술(소설·영화·드라마 등)에서 만들어진 전문용어가 일상에서 쓰이는 경우는 생각보다 많지 않다. 그중 대표적인 경우가 '내공'(內功)이다.
무협물에 나오는 무공(武功)은 무예나 무술과는 개념 자체가 다르다. 칼이 아닌 검기로 상대를 제압하고 한번 도약하면 수십m를 날아가며 꽃잎을 날려서 수십 보 밖의 사람을 살상할 수도 있는 초능력이다. 주먹으로 치고 손바닥으로 때리고 손가락으로 찌르는 공격이 아닌 권풍(拳風), 장풍, 지풍의 바탕이 되는 것은 그것을 발출하는 고수가 가지고 있는 내공, 내력이다. 내공은 반복적인 육체적 단련을 통해서 얻어지는 외문무공, 곧 외공(外功)과 달리 비급이나 구결(口訣) 등의 비밀스러운 문장 또는 호흡법과 몸속에서 온몸의 혈도로 기를 운행하는 등의 방법으로 축적된다. 시일이 경과할수록 높아진다고 하여 십년, 일갑자(60년) 등의 단위로 수위가 일컬어지며 양도, 양수가 가능하다.
무협에서 말하는 내공이 현실적으로 존재할 수 있을까? 기능성 자기공명장치(f-MRI) 같은 최신의 관측장비를 동원하지 않고도, 에너지 질량 불변의 법칙을 논할 것도 없이 그런 건 있을 수 없다. 수련기간이 길수록 내공의 수위가 높아진다는 설정은 동양적인 경로사상의 발로일 수는 있으나 나이가 들면 들수록 인간의 신체적 능력은 떨어지게 마련이다. 인간의 내면, 뇌세포 어디에서도 초인적인 물리력으로 전화될 수 있는 에너지를 찾을 수는 없다. 간단히 말하면 내공은 인간의 상상의 산물이다.
하지만 내공이라는 개념이 없었다면 무협지의 재미는 반감되거나 거의 사라졌을 것이다. 도통(깨달음), 열반, 사리처럼 이해할 수 없는 신비한 힘과 능력을 압축적,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예는 과학과는 상관없이 인간을 공감케 하고 고무한다. 그 또한 인생사와 인간세의 흥미로운 단면이다.
'그 사람 내공이 대단하다' 하는 식의 표현은 어떤 인간이 가지고 있는 보이지 않는 신비한 힘을 긍정하는 데서 나온다. 오늘날 내공이 외부로 발현하는 방식은 신언서판, 그중에서도 특히 언어이다. 정치, 재판, 회담, 담화, 조약, 예능, 인터넷, 뉴스, 댓글, 사회네트워크서비스(트위터 등의 SNS), 술자리와 카페의 대화 등등 수많은 언어가 범람하는 지금, 드높은 자신만의 내공을 지닌 이들을 보기는 지난하고 가짜 고수, 사마외도(邪魔外道)와 마두를 보는 것은 너무도 쉽다.
치열한 경쟁사회 속에서 살아오면서 복잡다단한 정세 변화에 적응하고 극기를 거듭하여 마침내 금강불괴(金剛不壞) 같은 존재가 되어 세상 사람들의 존경을 받는 어른을 찾아보기 힘들다는 말이 나온 지는 오래되었다. 반면 가짜 어른으로 행세하면서 수십 년을 숨겨온 추괴한 본질을 하루아침에 드러내는 일은 거의 매일처럼 분야를 가리지 않고 일어난다. 이제 어른은 정말 몇 분 남지 않은 듯한데 며칠 전 또 한 어른이 가셨다. 꽃봉오리와 같은 깨달음의 시 몇 편을 남기고.
'어제그제 영축산 다비장에서 오랜 도반 하나를 한 줌 재로 흩뿌리고/ 누군가 훌쩍거리는 그 울음도 다비로 날려보냈다/ …/ 언젠가 나 가고 나면 무엇이 나올 건가/ 곰곰이 돌아보니 내가 뿌린 재 한 줌뿐이네'(설악 무산 조오현 스님, '재 한 줌'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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