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티아고에 날 내던지다
한 국가의 절반 정도를 이동했을 뿐인데 비행기로 3시간 반을 갔다. 가로 175㎞, 세로 4329㎞의 비현실적으로 늘씬한 비율을 가진 칠레는 넓은 태평양에 기대어 빙하가 있는 남단의 극지방부터 북단의 사막까지 다양한 자연환경을 품고 있다. 그리고 라틴 아메리카 국가 중 유일하게 경제위기를 겪지 않고 성장하는 나라다. 이곳의 수도 정치, 경제의 중심인 산티아고가 우리의 다음 행선지였다.

공항버스에서 내려 지하철 직원에게 가장 핫한 지역이 어디냐고 물으니 '베야스 아르떼스(Bellas Artes)'역을 추천해줬다. 베야스 아르테스는 한국말로 '순수미술'이라는 뜻이었다. 스페인어를 잘했다면 직원에게 물어보지 않고 지하철 노선도만 보고 이 역으로 향했을 것 같다. 산티아고의 첫 숙소는 베야스 아르테스 역에서 바로 보이는 안데스 호스텔로 잡았다. 당구대가 있는 로비를 포함해 전체적인 시설이 깔끔했고 가격도 비싸지 않았다. 며칠 묵으면서 점점 느꼈지만, 우리 숙소는 역 이름처럼 여행자가 머물기에 예술적인 위치였다. 산티아고를 가로지르는 '마뽀쵸 강(Mapocho River)'과 넓은 수변공원, 수산시장, 국립미술관, 문화센터, 수많은 갤러리, 맛집, 예쁜 카페, 엄청난 규모의 서점 등 모든 장소가 직접 걸어 다닐 수 있는 거리에 몰려 있었다. 이쯤 되면 지하철 직원에게 절이라도 해야겠다. 그라시아스 호벤(Gracias Joven)!
그 날 저녁, 끼니를 때우고 누웠는데 도저히 잠이 오지 않았다. 우린 일심동체로 산티아고의 밤거리로 나갔다. 일요일 밤거리는 생각보다 더 한산했다. 택시를 타고 클럽으로 향했지만 다음날이 월요일이라 모든 클럽이 문을 닫았다. 이대로 집에 가긴 너무 아쉬워, 기사에게 어디든 문을 연 곳이 있으면 세워달라고 했다. 택시는 큰 무대가 있는 펍에 우리를 내려주었다. 그런데 우리가 예상했던 서양식 펍과는 많이 다른 분위기였다. 테이블은 오래된 맛집처럼 촘촘히 붙어있고 아시아인은 고사하고 외국인조차 없는 것 같았다. 가족 단위로 온 사람들만 꽤 보였다. 손님들은 돌아가며 무대에서 칠레 대중가요를 불렀다. 분위기가 살짝 적응이 안 됐지만 어떻게든 재밌게 놀아보려고 했다. 종업원에게 당당히 제일 독한 술을 달라고 했다. 불붙은 바카디를 처음 마셔봤다. 바카디를 두 잔 마시고 난 후 정신을 차려보니 무대 위에 있었다. 에미넴 랩을 하면서. 예림이는 10년째 나의 팬클럽 회장을 도맡은 사람처럼 열성적으로 무대 아래서 춤을 추며 응원했다. 참고로 말해서 절대 취하진 않았다. 단지, 흥이 폭발했던 밤이었다.
◆먼 친척보다 더 친근할 것 같은 칠레사람들

산티아고에 도착한 다음 날 우린 칠레의 대표 음식인 '세비체'를 먹기로 했다. 현지인들이 많이 가는 맛집이 어디냐고 물으니 호스텔 직원이 두 곳을 추천해주었다. 옆에 있던 다른 직원이 그 중 한 곳은 주인이 개를 심하게 때리는 걸 봤다며 거긴 가지 말라는 귀여운 당부도 더했다.

우린 식당에서 연어 세비체와 오징어& 조갯살 세비체를 주문했다. 처음 한, 두 입은 해산물이 신선하고 맛있었는데 자꾸 먹다 보니 머리가 지끈해질 정도로 신맛이 강했다. 우리나라 음식에서 느껴지는 냉면과 초고추장의 새콤함이 아니었다. 어딜 가든 남들보다 1.5배는 더 먹는 우리인데, 결국 1/4 정도 남겨놓고 포기했다. 누군가 칠레에서 세비체를 시도한다면, 우리처럼 욕심내지 말고 하나만 시켜서 다른 메뉴와 함께 먹으라고 권해주고 싶다.

경황없던 첫째 날과는 달리 둘째 날부터 산티아고의 매력이 하나 둘 씩 드러나기 시작했다. 칠레의 수도는 상파울루나 부에노스아이레스가 갖지 못한 사랑스러움이 배어있다. 깔끔한 거리와 남미국가의 수도임에도 나쁘지 않은 치안상태, 우아한 중세· 근세 서양 건축물들과 어우러진 독특한 외관의 포스트 모더니즘 건축물들. 아기자기하거나 제법 세련된 개인 상점들…. 뭔가 남미 여행에서 크게 기대했던 요소들이 아니어서 더 신선하게 다가왔다.
'호세 빅또리노 라스따리아(José Victorino Lastarria)' 거리에서 프리마켓이 한창이었다. 뭘 살까 둘러보다가 캠핑 때 입기 좋은 재킷을 하나 구매했다. 남미사람들이 강아지를 사랑해서 그런지 배변 주머니도 옷 속에 있었다. 이건 사용했던 주머니일까 아주 잠시 고민했다.

근처엔 '산타 루시아(Santa Lucia)' 공원이 있었다. 규모가 크진 않지만, 꽤 높고 가파른 언덕이 있는 공원인데 언덕의 정상에 도달하니 산티아고 시내가 한눈에 들어왔다. 올라가는 내내 꽤 가파른 경사인데도 정원에 누워 사랑을 속삭이는 연인들은 여행의 분위기를 한껏 살려주었다.
시내 구경 중 가장 강렬하게 남은 기억은 시내버스다. 산티아고의 시내버스는 버스 두 대가 하나로 이어져 있다. 버스를 이어주는 지점에선 항상 누군가 기타를 연주하며 큰소리로 노래를 부른다. 흥미로운 부분은 승객들이 노래를 따라 부르는 것이다. 아이도 어른도 모두 따라 부른다. 우리나라였다면 눈살을 찌푸리거나 조용히 경청하거나 둘 중 하나였을 텐데, 이곳에선 손을 흔들며 함께 따라 부르고 춤을 추는 승객도 있었다. 나중에 친해진 칠레인 친구에게 이야기했더니, 도리어 내게 "너희 나라엔 버스에 노래 부르는 사람이 없어?"라고 눈을 동그랗게 뜨며 쳐다본다. 그 반응 또한 뇌리에 깊이 박혀있다. 일상에서 이렇게 타인과 친근한 기운을 교류하는 대도시가 또 있을까?
◆발파라이소에서 만난 찬란한 보석
여행한지도 어느덧 한 달이 지나고 있었다. 아무거나 잘 먹는 우리라 괜찮을 줄 알았는데 한식에 대한 향수는 시간이 지날수록 짙어졌다. 우린 예림이의 생일을 기념해서 양념치킨을 파는 한국식 치킨 전문점에 가기로 했다. 숙소에서 친해진 칠레인 친구 한 명도 동행했다. 식당엔 생각보다 메뉴가 너무 다양해서 다른 맛으로 3마리나 시켰다. 종업원에게 생일축하 노래를 틀어줄 수 있느냐고 여쭤봤는데 안된다고 해서 아쉬웠다. 동행한 친구가 손님 테이블마다 가서 함께 생일 축하 노래를 불러줄 수 있겠느냐고 여쭤보았다. 손님들은 흔쾌히 승낙해 주셨고 예림이가 식당 2층으로 올라오는 순간 스페인어로 부른 생일축하 노래가 실내를 가득 채웠다. 목소리로만 채워진 생일축하 노래는 예상보다 큰 감동을 주었다. 주책스럽게 내 마음도 뭉클해져서 눈물이 날 것 같았다. 그 친구는 헤어지기 전 우리를 위해 직접 쓴 시도 선물해주었다. 멋진 기억을 만들어준 친구를 떠올리면 입가에 미소가 떠오른다. 치킨은 생각보다 너무 커서 한 마리 정도가 남아버렸다. 우린 남은 치킨을 포장해서 발파라이소로 이동했다.
산티아고에서 차로 2시간 거리의 발파라이소는 칠레 최대의 무역항이자 국민시인 파블로 네루다가 생을 마감했던 도시다. 바닷가 주변 땅은 평지로 되어 있지만, 바다와 멀어질수록 달동네처럼 경사가 점점 가팔라진다. 19세기엔 가난한 이민자들이 발파라이소에 정착했고, 돈이 부족했던 그들은 항구에서 선박이나 컨테이너를 만들 때 썼던 철판을 주워 집을 만들었다. 여러 색깔의 철판과 그라피티로 도시 전체가 하나의 미술작품처럼 만들어진 발파라이소는 역사적 배경과 아름다운 풍경으로 유네스코에 등재된 도시다. 관광객들은 산티아고에 온 김에 당일치기로 발파라이소를 방문하는 경우가 많다. 이곳에서는 '아센소르(Ascensor)'라는 낡은 승강기를 타고 높은 곳으로 올라가 발파라이소의 경치를 관람한다. 어떤 아센소르는 무려 100년이 넘는 역사를 가지고 있다. 벽화들을 구경하다가 바다를 더 가까이 보고 싶은 마음에 선착장으로 내려갔다. '무예 바론(muelle baron)' 선착장은 폭이 넓고 광장처럼 규모가 상당해서 탁 트인 느낌이 들었다. 해가 질 무렵 시끄러운 음악 소리에 한껏 멋을 부린 젊은이들이 선착장으로 모이기 시작했다. 무슨 일인가 싶어 선착장 끝으로 가보니 디제이들과 맥주 파는 부스가 설치되어 있었다. 선착장 파티였다. 예림이와 난 맥주를 사서 낮에 남겼던 치킨을 꺼냈다. 정말 세상에서 가장 맛있는 치맥이었다. 역시 음식은 버리는 게 아니다. 그리고 신나게 춤을 췄다.
해가 완전히 저무니 발파라이소의 진면모가 드러났다. 바다를 향해 빽빽이 세워진 언덕 위 집들이 영롱한 불빛 파노라마가 되어 선착장을 에워싸고 있었다. 이 세상 그 어떤 보석이 저것보다 빛날까? 자연과 사람이 함께 만들어낸 황홀한 풍경에 정신마저 아득해지는 것 같았다. 발파라이소는 산티아고처럼 치안이 좋지 않아 선뜻 밤에 가보라고 권하기가 어렵다. 하지만 기회가 된다면 따뜻하게 채비를 하고 블루투스 스피커와 와인, 간단한 안주를 챙겨 또 한 번 선착장을 찾고 싶다.
글 사진 황희정 디자이너 https://instagram.com/hyiju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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